• 최종편집 2024-07-19(금)
 

오늘 4월 17일은 어떤 날인 줄 아십니까?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는 고려의 중앙 귀족 가문 출신이 아니라 원래 전주 지역의 향리였으나, 가솔을 이끌고 쌍성총관부 지역으로 이주했습니다. 이후 이성계의 가문은 고조부 이안사부터 아버지 이자춘(李子春) 때까지 원나라로부터 천호(千戶)라는 지방관의 자리를 얻어, 대대로 이 지역 고려인과 여진족 위에 군림하는 세력가로 성장하였습니다.


쌍성총관부는 원나라가 1258년(고려 고종 45년) 고려에 침입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한 후 설치한 통치 기구였습니다. 이성계는 원나라의 지배를 받던 ‘쌍성총관부’ 지역에서 힘을 키워가던 변방의 세력이었습니다. 철령 이북의 땅을 공민왕(恭愍王, 1330~ 1374)이 이 지역을 수복하기 전까지, 근 100여년 동안 원나라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이성계는 고려 공민왕 시기부터 급부상한 신흥 무장세력이었으며, 위하도에서의 회군을 계기로 새 왕조의 태조로 즉위(1392년)하여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고, 한양으로 천도하였습니다.


고려의 왕은 모두 원나라에 의해 임명되었으며, ‘00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습니다. 조선도 중국의 위구르나 티베트처럼 중국에 책봉받는 형식의 지방 정권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중국과 일본 중에 어느 나라가 더 큰 원수국가일까요? 중국이 더 큰 원수국가일까요? 일본이 더 큰 원수국가일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두말할 것도 없이 503:36으로 중국이 더 큰 원수입니다. 


일본에 위안부가 있었다면 중국에 50만여명의 환향녀가 있었습니다. 일본은 ‘귀속재산’이라도 남겼지만 중국은 가져가기만 했습니다. 


중국은 사실상 1392년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서부터 1895년 하관(시모노세끼)조약때까지 500년간 조선을 속국으로 지배했었습니다. 


1407년 태종은 중국을 숭모한다는 모화루(모화관)을 세우고 영은문의 전신 홍살문도 세워 중국 사신을 영접해 오다가 중국의 요구로 1539년 중종때 중국의 은혜를 영접한다는 영은문으로 이름까지 바꿔 세운 것입니다. 


시진핑이 트럼프에게 “한반도는 중국의 일부였다”고 말해 우리를 분노케 했지만 사실 그들은 500년 이상 그렇게 생각해 왔습니다.


조선은 무력을 사실상 포기하고 중국 밑으로 스스로 기어 들어 간 나라였으며, 중국 황제가 승인을 해야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매년 바쳐야 하는 온갖 공물과 아녀자들을 ‘공녀’로 진상해야 했던 그 당시 백성들은 진이 빠졌습니다.


혹시 ‘환향녀’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여진족이 중국에 청나라를 세웠는데, 그들이 조선에 침입하여 병자호란(1636년)을 일으켰습니다.


「쇄미록」이라는 책에는 임진왜란 때 일본 군대에 끌려가는 여성들이 “나는 어느 읍 어느 촌의 아무갠데 이제 붙잡혀 영영 다른 나라로 갑니다.”하며 큰 소리로 울부짖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쓰여 있습니다.


병자호란때 인조의 ‘삼전도의 항복’ 후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이 약 60만명 정도인데, 그 중에 50만명이 여자들이었습니다. 그 당시 인구를 감안하면 조선 땅에서 젊은 여인네들은 씨가 마를 정도로 끌려 갔습니다. 끌려 가면서도 또한 거기서도 어떤 일을 당했을지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 여성들이 전쟁이 끝난 뒤 다시 조선으로 돌아 왔을 때 그들을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이라는 뜻의 ‘환향녀(還鄕女)’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이 변하여 오늘날에는 ‘화냥년’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호로(胡虜)’라는 말은 아십니까?


이 말은 ‘오랑캐’ 또는 ‘오랑캐의 포로’라는 뜻입니다. 환향녀들 중에서 임신한 상태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이 아이들을 ‘호로새끼’ 또는 ‘호로자식’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때 청나라에 아첨하여 벼슬을 얻은 사람들을 낮추어 ‘호로새끼’ 또는 ‘호로자식’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이 여자들을 끌고 간 목적은 ‘속가(贖價)’를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1인당 25~30냥이었고, 대개는 150~250냥이었으며, 비싼 경우에는 1,500냥이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빈민이라 속가를 내고 찾아 올 처지가 못 되었습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뒤에 돈을 주고 고향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나마 양반집 여성들은 청나라가 많은 돈을 요구해 그곳에서 생명을 끊거나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적지에서 고생한 이들을 따뜻하게 위로하기는커녕 오랑캐들의 성노리개 노릇을 하고 왔다고 하여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았으며, 몸을 더럽힌 계집이라고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병자호란 이전 임진∙정유 양난에 일본에 포로로 잡혀 갔던 여인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비싼 값을 치르고 아내와 딸을 되찾아 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되돌아온 환향녀들이 순결을 지키지 못한 것은 조상에게 죄를 짓는 일이라 하여 이혼 문제가 조선의 정치∙사회문제가 되자 인조는 환향녀들이 창피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집에 돌아 가기를 두려워할까 봐 조정에서 청나라에서 돌아오는 여성들에게 교지를 내렸습니다.


“도성과 경기도 일원은 한강, 강원도는 소양강, 경상도는 낙동강, 충청도는 금강, 전라도는 영산강, 황해도는 예성강, 평안도는 대동강을 회절강(回節江)으로 삼을 것이다. 환향녀들은 회절하는 정성으로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고 각각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라 만일 회절한 환향녀들을 받아 들이지 않는 사례가 있다면 국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지금의 연신내)홍제원의 냇물에서 목욕을 하고 서울로 들어오면 그 죄를 묻지 않고 모든 치욕을 없앤 것으로 생각하고 남성들이 환향녀들에게 청나라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묻지 못하도록 했지만 양반집 남성들은 환향녀들과 이혼하고 다시 결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라에서 환향녀들과 이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여성들은 간신히 이혼을 피했지만 남편들은 모두 부인을 멀리했습니다.


돈을 내고 꿈에도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 왔지만 돌아 오지 못한 여성들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절개를 잃었다면서 식구들에게까지 손가락질을 받았으니 그 여성들이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그리고 중국 사신의 서열이 조선 왕보다 높았습니다. 사신이 한번 뜨면 조선의 산천초목이 떨었습니다. 


중국 조정에 뇌물을 바치고, 사신에 임명된 자들이 조선에 와서 본전의 몇 배를 뽑아 갔습니다.


중국 사신이 오면 조선왕이 나가 영접하던 곳이 영은문이었습니다. 중국 황제의 은혜를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1894년 발발한 청일전쟁에서 패한 중국이 1895년 4월 17일 일본 시모노세끼에서 일본의 이등박문과 중국(청)의 이홍장 간에 조인한 조약에서 “청국은 조선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인정한다”라고 선언함으로서 조선은 중국의 500여년간 지배에서 독립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후 ‘영은문’을 헐었습니다. 그리하여 서대문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바꾸고 영은문 자리에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1897년 바로 그 자리에 독립문(獨立門)을 세웠던 것입니다. 


이 독립문이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난 후 독립 의지를 위해 지은 것으로 잘못 아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이렇게 독립문을 엉뚱하게 항일(抗日)의 상징으로 아는 사람이 많은 것은 반일(反日)이 정치 수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독립하면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으로만 아는데, 서대문에 있는 독립관이나 독립문은 36년간 지배해 온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503년 동안 지배받던 중국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897년 서재필 박사가 주축이 되어 지은 것입니다.


역사학자 Edward Hallet Carr는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말했지만, 만약에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 갔을 당시 접했던 서구 사상과 서양 문물을 임금이 되어 받아 들였더라면 조선의 개화가 2백여년 앞당겨 졌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서인과 인조가 명나라에 대해 지나친 사대주의에 빠지지 않고 광해군이 추구했던 실리주의 노선을 이어갔다면 두 번에 걸친 전란 뿐 아니라 오랫동안 중국과 군신 관계를 청산하고 형제 관계를 유지하면서 국가의 힘을 비축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경술국치 같은 일본의 침략을 당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국 공산당을 존경하고, 반일을 내세우면서 ‘민주화’를 외쳤던 운동권이 권력을 잡으면서 중국이 우리에게 준 막대한 피해는 묻히고 잊혀 졌습니다.


마침내 6·25 남침을 김일성과 모의하고 우리 국민 수십만 명을 살상한 마오쩌둥을 존경한다는 대통령 두 명(노무현, 문재앙)까지 등장했습니다.


독립문에 대한 오해가 희극이 되어버린 사례가 머저리 같은 문재앙의 2018년 3·1절 기념식이었습니다. 그는 3·1절 기념 행사를 마치고 독립문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다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이것이 좌빨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고 하는 자가 자기 나라의 역사도 제대로 모르다니,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요? 무식하면 답이 없습니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36년동안 이 땅의 순진무구한 처녀들 20만명이나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끌려가 성적 노예로 살다가 해방이 되어도 부끄러움 마음에 돌아오지 못하고 대부분의 조선의 딸들이 낯선 타국 땅에서 고향과 부모형제를 그리워하며 죽어 갔습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중국과 일본에 많은 피해를 당했지만, 그 정도를 따진다면 중국이 준 굴욕과 고난이 훨씬 더 큽니다.


우리 국민에게 친중 DNA라도 있습니까? 우리 역사의 어디를 보아도 우리는 저 뙤놈들의 은혜를 입은 적이 없습니다. 임진왜란을 통하여 그놈들의 파병으로 작은 도움을 받은 적이 있지만,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때도 입은 은헤보다는 조선 백성들에게 가한 분탕질이 더 많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중국에 아부하는 저 미친 놈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강한 자에게 꼬리치는 노예 근성으로 밖에 볼 수 없습니다. 노예근성을 보이려면 저 뙤놈들보다도 훨씬 강한 힘을 가지고 있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로써 시장경제를 지키며, 우리가 지금까지 엄청난 은혜를 입었고, 앞으로도 그들의 큰 은혜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미국에 보인다면 국가도 보존하고 5천만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를 중국으로부터 독립시킨 것은 일본이고, 우리를 일본으로부터 독립시킨 것은 미국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일본에게서 36년간 지배당한 것에서 해방된 8∙15만 광복절이 아니라, 중국에게서 503년간 지배당한 4∙17도 광복절이니 둘 다 기념해야 될 것입니다.


김일성 갓끈 교지나 추종하는 반대한민국 세력들은 우크라이나의 비극이 안 보입니까? 우리 아이들도 그렇게 만들 것입니까? 한미일 안보 동맹이 왜 친일이고 굴욕입니까? 대한민국과 국민 지키는 친일과 굴욕 외교는 100번이라도 해야 합니다. 


국민들은 이 나라가 자랑스럽습니다. 왜 운동권 민주화는 이 나라를 저주하는 것입니까? 일본에 대해서만 진돗개처럼 물고 늘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 죽이는 빨갱이 공산당보다 친일과 지일이 100배 낫습니다. 문재앙처럼 북조선에 굴종한 공산 적화통일을 원하는 것입니까?


김정은이나 중국에 대해서는 말 한 마디도 못하면서, 당연한 분노 표현조차 못하면서 한국 문화를 중국의 문화인양 왜곡하고, 스포츠의 공정성을 무너뜨리는 중국에는 한마디도 못하면서, 일본에게만 극대노 하는 선택적 분노는 머리로도 가슴으로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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