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 고아의 아버지 참전용사 위트컴 장군을 아십니까?
어제 저녁에 텔레비전을 보다가 뉴스에 ‘파란 눈의 의인’, ‘고아의 아버지’,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위트컴 장군’이라는 멘트가 나왔습니다. 누구인지 궁금해서 위트컴 장군(Richard S. Whitcomb)에 대해서 살펴 봤습니다.
부산시 남구 대연동에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유엔이 관리하는 전몰장병 묘지인 ‘세계 유엔 기념공원’이 있습니다. 전쟁과 평화의 기억이 공존한 부산은 6·25 전쟁에서 전투는 없었지만 전쟁의 흔적이 짙게 남아있는 곳입니다.이곳에는 1950년 6.25 전쟁에 참전해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우방국 2,300여 기의 영령과 함께 유일하게 미국 장성인 리차드 위트컴 장군이 잠들어 있는 곳입니다.
리처드 위트컴은 1894년 미국 중부 캔자스주 캔자스시티에서 출생했습니다. 아버지 조지 허버트 위트컴은 캔자스주 대법관을 역임한 저명 법률가였고, 어머니 제시 위트컴 역시 당시 남자대학에서 최초로 강의한 법학 교수였습니다. 전통적인 청교도 가문에서 태어나 엘리트 교육을 받은 리처드 위트컴은 유년 시절 기독교적 정의와 인류애를 터득했습니다.
캔자스주 토피카의 워시본(Washbon) 대학에 진학한 후 미식축구 선수, 토론회 우수 토론자로서 명성을 얻었으며, 같은 시기 학생 자원 선교활동회(SVM· Stu 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s)에서도 활동하며 선교사로서 필리핀에서 사역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미국이 참전을 결정하여 학군사관후보생(ROTC)으로 장교 임관한 위트컴도 전쟁에 참전하여 유럽에서 활약했습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당시 독일 해군의 이동 감시초소인 아이슬란드 케플라비크 기지 건설 참여 후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중 가장 치열한 전투였던 오마하 전투에 참전하여 5만여 명의 연합군 병력, 군수 물자 수송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제임스 밴 플리트(James Alward Van Fleet)와 더불어 프랑스 최고 무공훈장을 받았습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는 17만 명의 대규모 병력이 동원된 필리핀 상륙작전의 수송, 군수 보급 업무를 마치고 준장으로 승진했으며, 1953년 6·25전쟁 휴전협정이 무르익어갈 무렵 부산의 제2군수기지 사령관으로 부임했습니다.
군수기지 사령관으로 재임하던 1953년 11월 27일 오후 8시 30분, 부산역 부근에서 큰 불이 났습니다. 난롯불 부주의로 일어난 불은 강풍을 타고 순식간에 확대되어 대화재가 발생했습니다. 14시간에 걸친 화마는 부산역 인근 번화가의 주요 건물 및 민가 등 약 1,250호를 태우고 다음 날 오전 10시 20분에 완전히 진화되었습니다. 피해는 주택 3,132채가 완전히 소실되었고, 사상자 29명, 6,0 00여 세대 3만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습니다.
판자집도 변변히 없어 노숙자에 가까운 생활을 하던 피난민들은 부산역 건물과 인근에 있는 시장 점포 등이 유일한 잠자리였는데 대화재로 오갈 데가 없게 되었으며, 입을 옷은커녕 먹을 것도 없었습니다.
참상을 목격한 위트컴 장군은 민간에 사용할 수 없는 군수 물자를 직권으로 군수창고를 열어 추위에 갈 곳이 없는 이재민들에게 천막촌을 건립해 주고 군용담요와 군복, 먹을 것 등을 3만 명의 피난민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었습니다. 정부도 할 수 없었던 용단이었으나 군수 물자 무단 전용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연방 의회의 청문회에 불려갔으며,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도 증언해야 했습니다. 의원들의 쏟아지는 질책에 장군은 조용히 말했습니다.
“우리 미군은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하지만, 미군이 주둔하는 곳의 사람들한테 위기가 닥쳤을 때 그들을 돕고 구하는 것 또한 우리의 임무입니다. 주둔지의 민심을 얻지 못하면 우리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고, 이기더라도 훗날 그 승리의 의미는 쇠퇴할 것입니다”라고 답했으며,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이다(War is not done with sword nor the rifle. Genuine triumph is for the sake of the people in the country).”라고 말해 오히려 의원들은 일제히 기립하여 오래도록 박수를 받았습니다. 미국 정부는 추가 군수품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군수기지 사령관의 1차 소임은 장기전으로 소모된 유엔군에게 막대한 장비와 탄약을 재보급하여 화력 전투를 보강하고 한국군의 전력을 증강하여 유리한 조건으로 휴전을 성립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긴박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투에 사용할 군수 물자를 무단으로 전용하며 민간의 아픔과 고통을 품는다는 것은 비상식적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위트컴은 한국인들이 겪고 있는 전쟁의 고통과 필연적 후유증을 인간적인 측면에서 가슴 아파했던 것입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 온 뒤 장군은 전쟁이 끝났는데도 돌아가지 않고, 정치권을 설득해 군수기지가 있던 곳을 이승만 대통령한테 돌려주면서 ‘이곳에 반드시 대학을 세워달라’고 청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약 50만 평의 캠퍼스 부지를 제공받았고, 휘하 공병부대를 동원하여 교사(校舍) 건축을 도왔습니다.
그곳이 바로 지금의 부산대학교로써, 부산대학교가 설립된 배경입니다. 그러나 부산대 학생도, 교직원도, 졸업생도 이런 사실을 거의 모를 것입니다.
이 외에도 이재민 주택 건설, 도로 건설, 의료 시설 건립 등을 지원하고 부산대를 비롯한 각급 학교 설립을 도와 한국과 부산의 전후 재건에 힘썼습니다.
부산 대화재를 계기로 위트컴 장군은 한국 정부와 부산시의 총체적인 재건을 위해 당시 테일러 주한 미8군 사령관과 긴밀한 협의를 하면서 미군대한원조(AFAK) 프로젝트를 계획했고 미국 의회 등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미군대한원조 프로젝트는 부산 대화재를 극복하기 위한 묘책으로 위트컴 장군이 제안하고, 미8군 사령관 맥스웰 테일러(Maxwell D. Taylor) 장군이 승인해 탄생했습니다.
또한 장군은 영도구의 피난민촌에서 만삭의 임산부가 보리밭에서 아기를 낳는 장면을 목격하고 조산소를 설치해 주었으며, 부산 중구에 메리놀병원을 증축하는 데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6.25 전쟁 두 달 전인 1950년 4월 15일 메리놀 수녀회에서 설립한 메리놀병원은 시설도 열악하였지만 밀려오는 피난민 환자들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위트컴은 병원기금 마련을 위해 사령관의 체면을 버리고 자신은 파란 눈의 갓에 도포를 걸친 노인으로, 메리놀 수녀회와 부대원들은 한복을 입은 서양인으로 단장하여 거리 가장행렬을 하며 모금 활동을 펼쳤습니다. ‘사람들은 장군이 체신없이 왜 저러느냐?’고 수근 거렸지만 개의치 않고 이 땅에 기부문화를 조성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습니다.
메리놀병원은 위트컴의 노력으로 미군대한원조(AFAK) 기금을 지원받아 1954년 7월 29일 현재의 위치에 지상 3층 160병상을 가진 정식 병원으로 기공식을 하게 되지만 신축 자금은 부족했습니다.
예하 미군 장병에게는 월급의 1%를 기부하게 하여 기금을 충당했습니다. 메리놀병원, 성분도병원 건립 등 전쟁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가난한 병자들을 위한 장군의 발상과 헌신적 노력에 세계가 박수를 보냈습니다.
한복 차림의 벽안(碧眼)의 장군을 두고 ‘라이프(Life)’지는 ‘한국의 양반(Gentle man of Kore a)’이라고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사명은 1950년 겨울 개마고원 장진호 전투에서 몰살한 수천여명의 젊은 미국 병사들이 유해를 찾아 미국으로 송환하는 일이었습니다. 장진호 전투에서 미국 해병대 절반 이상의 희생이 있었기에 중공군의 남하가 2주간 지연되었고, 이렇게 번 시간을 이용해 피란민들 20여만 명이 그 유명한 ‘흥남 철수’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리처드 위트컴 장군은 1954년 퇴역 후에도 한국에 남았습니다. 전쟁 기간 틈틈히 고아들을 도와온 위트컴 장군은 당시 전쟁고아를 위해 함께 활동하던 한묘숙 여사와 결혼했습니다. 한묘숙 여사는 남편과 결별 후 두 자녀를 키우던 ‘고아원 원장’이었고, 선물 상자를 들고 고아원을 방문한 위트컴 장군은 독신의 노신사였습니다. 한묘숙의 보육 활동에 감동한 위트컴은 이듬해 전격적으로 청혼하였고, 두 사람은 33년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퇴역 후 전쟁고아 돕기, 미군 유해 발굴에 남은 삶을 바치면서 ‘전쟁고아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얻었습니다.
1982년 7월 12일 작고한 장군은 “내가 죽으면 한국에 묻어달라.”는 것과, 부인에게 ‘내가 죽더라도 장진호 전투에서 미처 못 데리고 나온 미군의 유해를 마지막 한 구까지 찾아와 달라’고 유언했습니다. 이에 따라 유엔기념공원 내 미국 묘역에서 영면에 들었습니다.
부인 한묘숙 여사는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북조선은 장진호 부근에서 길죽길죽한 유골만 나오면 바로 한묘숙 여사한테로 가져왔고, 한 여사는 유골 한 쪽에 300불씩 꼬박꼬박 지불했습니다. 그 유골 중에는 우리 국군의 유해도 여럿 있었습니다. 하와이를 통해 돌려받은 우리 국군의 유해는 거의 대부분 한 여사가 북조선으로부터 사들인 것들입니다.
한 여사는 한때 간첩누명까지 쓰면서도 굴하지 않고 남편의 유언을 지켰습니다. 장군의 연금과 재산은 모두 이렇게 쓰였고, 장군 부부는 끝내 이 땅에 집 한 채도 소유하지 않은 채 40년 전에 이승을 떠났습니다.
UN공원에 묻혀있는 유일한 장군 출신 참전용사가 바로 위트컴 장군입니다. 끝까지 그의 유언을 실현한 부인 한묘숙씨도 장군과 합장되어 있습니다.
국가보훈처는 작년 11월 8일, 민족상잔의 비극 6·25전쟁 이재민을 돕고 한국 재건에 힘쓴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했다.’고 평가받는 고(故) 리처드 위트컴(Richard S. Whitcomb) 미 육군 준장에 대한 국민훈장 1등급인 무궁화장 추서안이 국무회의에서 의결됐다고 밝혔으며, 작년 11월 11일, 부산 유엔기념공원에서 열린 유엔참전용사 국제추모식에서 한덕수 국무총리가 위트컴 장군 자녀인 민태정 위트컴희망재단 이사장에게 훈장을 추서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는 전봉준 동상은 있어도, 전태일 기념관은 있어도, 위트컴 장군에 대한 동상 하나 없습니다. 부산에도, 서울에도 없습니다.
위트컴 장군 조형물 건립은 2018년 한 차례 추진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유엔평화기념관에 조형물 설치를 추진할 예정이었지만 노출 빈도가 떨어진다는 내부 지적 때문에 무산됐습니다. 이후 기약 없이 답보하던 조형물 제작은 작년 11월 국가보훈처가 위트컴 장군에게 국민훈장 1등급 무궁화장을 추서하기로 결정하면서 급물살을 탔습니다.
이러한 리처드 위트컴 장군의 인류애와 한국 사랑 정신을 기리기 위해 장군이 떠난 지 꼭 40년 만에 뜻있는 자들이 모여 위트컴 장군 조형물을 만들기로 결의했습니다. 조형물 건립 시민위원회도 11월 10일 발족했습니다.
‘리차드 위트컴 장군 조형물 건립 시민위원회’ 발족 행사장에는 각계각층 인사 100여 명이 모였습니다.
부산 남구를 지역구로 둔 박수영 국민의힘 국회의원은 시민위원회 발족식 개회사에서 “70년 전 부산역전 대화재로 추위와 배고픔에 떨었던 이재민 3만 명이 위트컴 장군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이제 되돌려줄 차례이다. 시민 3만 명의 성금 모금을 통해 기념조형물을 건립하고 장군의 정신을 되새기자.”고 말했습니다.
위트컴 장군의 딸 민태정 위트컴희망재단 이사장은 “조형물 건립은 아버지의 뜻을 기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라며 청중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습니다.
부산지역 정계, 재계, 언론계, 학계 인사로 구성된 ‘리차드 위트컴 장군 조형물 건립 시민위원회’는 2023년 11월 10일까지 1년간 시민 3만 명이 1만 원씩 내는 방식으로 총 3억 원을 모금해 조형물을 건립하는 캠페인을 벌이기로 했습니다.
사업에는 향토건설업체 협성종합건업 정철원 회장이 몇 년 전 조형물 건립을 위해 3억 원을 희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시민모금운동 방식으로 장군의 조형물을 건립하기로 한 것은 동상 건립 자체보다 장군이 부산시민을 위해 베푼 정신을 공유하고 기리자는 취지에서입니다.
모금 예상 인원 3만 명도 의미가 있습니다. 1953년 11월 27일 부산역 대화재와 관련 있습니다. 이날 화재로 6,000세대 3만 명의 이재민은 추위와 배고픔에 떨어야만 했습니다. 3만 명은 당시 위트컴 장군의 도움에 대한 보은(報恩)의 의미가 담겼습니다.
위트컴 장군의 조형물이 올 해 11월 즈음에는 부산에 세워질 것 같습니다. 늦어도 너무 늦었지만, 국가 예산 말고, 재벌 팔을 비틀지도 말고, 70여년 전 수혜를 입었던 피난민 3만명, 딱 그 수만큼 1인당 1만원씩 해서 일단 3억 원을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민주주의의 생명은 참여입니다. 보은도 십시일반, 참여해야 합니다. 1만원의 기적을 이루어 봅시다.
70년전, 전쟁고아들을 살뜰하게 살피던 위트컴 장군을 생각하면서, 메리놀 병원을 세워 병들고 아픈 이들을 어루만지던 장군의 손길처럼, 대학을 세워 이땅에 지식인을 키우려던 그 철학으로, 부하의 유골 하나라도 끝까지 송환하려고 했던 그 마음을 생각하며 각자 내 호주머니에서 1만 원씩 냅시다. 딱 커피 두 잔 값씩만 냅시다.
1만 원의 기적이 한국병을 고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설마 이 땅에 1만원씩 낼 사람이 3만명도 안 되지는 않겠지요?
1만원의 기적은, 부산은행 101-2073-6988-01 (사)국제평화기념사업회를 통해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