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1-15(목)
 

우리 마을은 서씨 집성촌이다. 이들이 이곳에 터를 잡고 산 것은 거슬러 올라가 임진왜란 전후쯤 된다. 조선 시대에는 전쟁 후 피난과 정착, 낙향하거나 은거, 혼인으로 인한 분가, 영농 조건에 따른 이주 등 여러 이유로 사람들이 흩어졌지만, 이곳은 서몽호 의병장이 임진왜란 후 후손들을 데리고 정착한 특별한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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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몽호의병장(조선중기 무신출신의병장,봉익대부가문출신,매곡 골짜기에 공동체를 세운 인물을 조합하여 AI가 생성한 초상화) [출처] 강열우에세이 < 서몽호 할아버지의 마을 >|작성자 커뮤니티도서관다됨더

 

서몽호 의병장의 묘소가 마을에 있고, 제사도 이곳에서 올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 양산 매곡마을을 ‘서몽호 입향조의 마을’이라 부른다.


내가 이 마을로 이사 왔을 때만 해도 어르신들은 종종 "서몽호 할아버지"라는 말을 했다. 나는 그 말이 무척 친근하게 들렸고, 그분의 묘소가 우리 마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깨가 으쓱해졌다.


매년 제사를 지내는 재실에는 ‘행의당(行誼堂)’이라는 글귀가 유난히 또렷하다. 선조들의 행실과 의리를 기리는 곳이다.


서몽호 할아버지는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이웃의 장정들을 모아 의병을 조직하고 직접 의병장으로 나섰다. 각종 전투에서 공을 세워 그 공로를 인정받아 훈련원 주부에 임명되었다. 이는 종6품 품계로, 오늘날의 육군 중령정도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주로 군사 훈련과 병기 관리를 맡는 중요한 실무 관직이었다.


할아버지의 선조들은 이미 고려 시대부터 “봉익대부(奉翊大夫)”, 즉 임금 곁에서 그를 보좌하고 돕는 고위 관직에 올라 있었으니, 역사적으로도 웅장한 가문임은 틀림없다. 그 후손들이 이어져 어언 400년이 흘렀다.


마을 이름을 두고도 이야기가 분분하다. 서몽호 할아버지가 1609년경, 울산 도호부에서 지금의 양산시 웅상읍 매곡리로 가족과 함께 이주하여 정착했다. 이후 서씨 문중의 후손들이 번성하며, 자연스럽게 서씨 집성촌의 중심지가 되었다.


‘매화가 피는 골짜기’라는 뜻의 매곡(梅谷)마을은 실제로 매화나무가 많았던 곳이다. 매화는 바위가 있는 햇볕 잘 드는 남향의 골짜기 지형에서 잘 자라는데, 매곡마을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골짜기 지형으로, 매화가 자라기에 매우 적합한 곳이다


매곡은 봄이면 매화 향기 흩날리던 골짜기였다. 매화 아래에서 서씨들이 마을을 일구었고, 그 향기는 지금도 사람들의 인심 속에 피어나고 있다.


나는 이 서씨 집성촌에서 새로운 밭을 일구고 있다. 서몽호 할아버지가 이 마을에 터를 잡고 후손들과 함께 공동체를 일구며 넉넉한 삶의 바탕을 마련하였듯, 나 또한 그 후손으로서 이 마을에 덕을 더하고 도리를 세우는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


그것이 선조의 이름을 오늘에 이어 사는 후손의 길이라 믿는다.

[출처] 강열우에세이 < 서몽호 할아버지의 마을 >|작성자 커뮤니티도서관다됨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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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열우의 書담 < 서몽호 할아버지의 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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