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12-02(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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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수군을 만나면 도망쳐라.’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는 ‘7본창’이라는 별칭의 ‘와끼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장군이 있었다. 일본열도를 뒤흔드는 명망 높은 ‘와끼자까’의 일본 수군임에도 이름없는  이순신의 조선수군에 의해 연전연패 끝에 수몰되자 ‘토요토미’가 휘하 장수들에게 직접 내린 엄명이었다.

 

 “조선수군을 만나면 도망쳐라.” 

 

일본 수군은 이순신 장군과의 대적을 피하면서 제거할 음모를 꾸며야만 했다.


 천여 척의 전선과 10만 명의 병력으로 압도적인 전력 차이임에도 이순신 함대와 만나면 전패하니 굳이 접전하여 더 큰 손상을 막아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전략인 셈이다. 절대적인 수적 열세인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에 통제영을 설치하고 견내량의 사나운 물목을 틀어쥐고 전력을 다해 일본 수군의 서진을 막고 있었다.

 

 장군은 괭이바다나 진해만, 부산포 쪽의 왜군을 치기 위한 출동과 승전고를 울리면서 귀환하실 때에도 대부분 견내량을 지나 다니셨다. 덕분에 곡창인 호남을 지켜 낼 수 있었고 국가도 존속 할 수 있었다. 장군의 말씀대로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를 실현 하신 것이다.

 

 맑은 날 부산포에서 300석의 군량미를 싣고 보급선을 띄우면 3, 4일 후에는 인천이나 노량진에 닿아 한양의 왜군을 배불리 먹일 수가 있었다. 개전 초기 일본 육군의 너무나 빠른 승리 곧 너무나 빠른 조선 육군의 괴멸에 전선이 너무 늘어져 보급에 애를 먹고 있었다. 진격 로 상에 있던 조선 관아에서 입수한 환곡이 아니었다면 버티는 것부터 무리였고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과 호남과 경상좌도의 관군이 왜군의 보급로를 위협해 오고 있었다.

 

 그나마 이순신의 함대에 의하여 곡창인 전라도를 향하는 남해가 막히니 우마차를 이용해 육로로 수송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순신 장군이 틀어쥔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급소인 ‘견내량(갯내량)’ 물목은 거제도와 통영 반도가 만들어낸 수로이다. 길이 약 3km, 폭 300~400m의 좁은 해협으로 부산, 마산 방면으로 항해하는 많은 선박들로 붐빈다. 해협 양쪽 입구에는 작은 섬들이 산재하고 물살이 거셀 뿐 아니라 바다 밑에 암초가 많아 옛 부터 해난사고가 잦았다.

 

  1,170년 정중부의 난으로 거제도의 폐왕성(둔덕면 거림리)으로 귀양 온 고려 의종이 배를 타고 건넜다 하여 전하도(殿下渡)라고도 한다. 지금도 고려 골이라 불리는 곳에는 고려인들의 무덤이 남아 있고 왕을 모시고 왔던 반씨 성을 가진 장군의 후손들이 거제시 둔덕면 곳곳에 살고 있다. 

 

 1419년 5월, 조선 태종은 대마도의 왜구를 정벌하기 위해 전군에 비상 소집령을 내린다. 조선 수군의 주력인 전선 227척과 수군 17,285명이 이 좁은 해역에 집결하였다. 견내량은 하루에 두 번 물살이 바뀌니 썰물을 타면 힘들이지 않고 넓은 바다로 나갈 수 있다. 

 

 가조도와 칠천도가 있는 괭이바다 쪽에서 통영 쪽으로 썰물이 빠져나갈 때 배를 몰아 한산도, 비진도를 지나 구을비도나 홍도 쪽으로 내려가서 ‘쿠로시오 해류’를 타면 힘들이지 않고 대마도로 접근할 수 있다.

 

  그래서 조선의 대마도 정벌군은 대마도까지 직선거리로 가장 가까운 부산포가 아닌 견내량에 집결했던 것이다. ‘견내량’ 물목은 “한 달에 두 번 가장 큰 파도가 일어나는 한시 때는 물이 홍수 진 강물처럼 펄펄 날아간다.”고 할 정도로 격랑의 바다이다. '갯내량'의 '개'는 바다를, '내'는 냇물을 '량'은 기둥처럼 쭉 뻗은 협소한 물길을 말한다.

 

  그러므로 '갯내량'은 바닷물이 홍수 진 강물처럼 흐르는 좁은 수로로 여기서 해전이 일어난다면 전선끼리 충돌할 정도의 대혼전이 불가피하다. 이는 적의 배로 뛰어 올라 우세한 칼 솜씨로 백병전을 벌려 승리를 취하는 일본수군의 전략에 적합하다. 접근을 차단하고 멀리서 포격전으로 제압하는 것이 이순신 장군의 전략으로 협소한 물길보다는 한산도 앞의 넓은 바다가 적합하다.

 

 ‘한산대첩’은 1592년 7월 5일(음)부터 7월 13일까지 견내량에서 부터 한산도 앞바다의 여러 곳에 걸친 해전으로 구성된다. 7월 7일 왜장 ‘와키자카’가 이끄는 함대 73척이 견내량에 집결한다. 다음 날 이순신 장군의 유인전술로 한산도 앞바다까지 의기양양하게 추격하다가 학익진에 말려 세계 해전사상 유례가 없는 대 참패를 당하고 만다.

 

  이로부터 ‘와키자카’는 이순신 장군에게 모두 3번의 참패를 겪게 된다. 조선수군은 첫 승리인 옥포해전으로 부터 합포, 적진포, 사천포, 당포, 당항포, 율포, 마침내 서기 1592년의 한산대첩으로 기록된다. 613년,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1018년, 강감찬의 귀주대첩에 이어 한민족 역사적인 삼대대첩이 된다. 


 “조선수군을 만나면 도망치라.”는 히데요시의 다급한 명령은 이순신 장군과 휘하의 장졸들과 백성들과 한민족의 명운이 어우러져 빚어냈다. 한숨처럼 터져 나온 영원한 승리의 환호성은 갯내량의 파도 넘어 솟구쳐 올라 ‘세계 4대 해전’이 되었다.

 

  세계 5대 해전은 1905년 5월 27~28일 일본 명치해군의 사령관 ‘도고 헤이하찌로(東鄕平八郞)’가 3배나 많은 무적의 ‘러시아 발틱 함대’를 괴멸시킨 ‘동해 해전’을 꼽는다. 동해 해전의 날은 ‘일본 해군의 기념일’이 되었다. 이 해전으로 세계를 경악하게 한 일본의 ‘명치 해군’은 훗날 태평양에서 지구최강의 미 해군과도 맞붙을 정도로 강력해진다.

 

 영국의 명장 넬슨과 비교되는 ‘도고’는 가장 존경하던 분은 ‘이순신 장군’으로 자신은 ‘이순신 장군의 하사관’ 정도의 자격이 있을 뿐이라고 고백한다. 이순신 장군은 마침내 적군의 스승이 된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견내량에서 일본 수군의 쾌속 항진을 근절하지 못했다면 지금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못할 것이고 일본의 지도는 한반도로 확대 되었을 것이다. 


 최근 미군이 주관하는 다국적 연합훈련 '림팩'이 하와이 근해서 8월 4일까지 진행되고 있다. 한국 해군은 "새 역사 쓰러왔다"(We are Here to make New History)'라는 슬로건 하에 역대 최대 규모로 참가했다.

 

  특히 이번 ‘림팩’에서는 ‘안상민’ 해군준장이 환태평양훈련전단장의 자격으로 8개국 수상함 13척과 9개국 해병대 병력 1천여 명을 지휘한다. 그동안 한국해군은 어느 나라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실력을 증명하고 있었다. 2000년 림팩에서 ‘박위’함은 가장 작은 잠수함임에도 적의 함정을 무려 11척(약 9만6000톤)을 격침해 훈련사령관으로부터 ‘작지만 최고(Small But Best)’라는 칭호를 얻었다. 참가국의 모든 해군들이 경악을 금치 못한 것은 작전종료까지 단 한 차례의 공격도 받지 않고 유일하게 생존한 것이었다.

 

 마침 7월중에는 역대 최대의 관객 수를 기록한 영화 ‘명량’에 이어 후속작인 ‘한산’도 개봉 될 예정이라고 한다.


 우리는 우리의 핏줄 속에 녹아있는 위대한 ‘필사즉생’의 DNA에 따라 근해는 물론 지구상의 전 해역을 평화의 바다로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너나없이 틀림없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후예가 아닌가!


       사)국학원 상임고문, 화가  원암 장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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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암 장영주 칼럼]‘조선수군을 만나면 도망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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