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02-06(월)
 

장군의 마음 4화 

 

제목 : "또 다른 의병 항왜 ‘사야가(沙也可)와 준사(俊沙)"

 

 430년 전, 일본이 조선을 침공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거대하고 잔인한 폭력에 노출 된 조선은 당시 국민의 반이 죽거나 다쳤다. 대대적인 그 후유증은 조선의 명줄을 끝끝내 쥐고 흔들었다. 어쩔 수없이 국가적 전쟁에 휘말린 각국의 장졸들 또한 생각이 없을 리 만무하다. 

 

  자신들이 전형적인 약탈전쟁의 비극에 강제로 동원된 존재임을 자각을 하는 무리도 있었다. 일본의 내전 중 ‘히데요시’에게 잔혹하게 정복되는 과정에서 가문전체가 몰살된 경우도 있었다. 꼭두각시 같은 처지에 빠진 용병 이란 지괴감에 빠진 왜군들도 있었다. 이처럼 왜군 중에 조선군에게 투항한 왜군을 ‘항왜’(降倭)라고 하였다. 반대로 조선에서 일본군으로 투항하여 앞잡이가 된 자들은 ‘순왜’(順倭)라고 하였다.

 

  ‘항왜’들은 ‘예의지국 조선’의 높은 문화를 존중하여 나름 잘못된 침략이라는 판단을 내리기도 하였다. 개인으로 또는 부대 전체가 투항하기도 하여 항왜의 수가 1만2천명에 이르렀다. 돌격장, 중간계급, 병사들도 있어 탁월한 능력과 충성심으로 많은 전공을 세운다. 병자호란까지 ‘나의 나라-조선’을 위해 출전도 하며 이 땅에 대를 이어 뿌리 내린다.   


 그중에  안골포 해전에서 이순신에게 항복하고 귀순한 ‘항왜’로 준사(俊沙)가 있다.

 

영화 ‘한산’에서는 물론 감독의 설정에 따른 것이지만 ‘전체를 꿰뚫는 핵심’이라고 할 만한 중요한 키워드 있다. 그것은 바로 ‘의(義)의 가치’에 대한 ‘이순신 장군’과 포로가 된 ‘준사’의 문답이다. 준사가 이순신 장군과 독대하는 장면에서 준사는 “내가 사천에서 당신을 쏘았다.”고 고백한다. 준사는 죄고의 지휘관인 장수(이순신)가 위험을 무릅쓰고 최 일선에서 전투에 임하는 것을 적선인 맞은편의 왜선에서 선명하게 보고 있었다.

 

  부하(나대용)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전투에 임하는 장군의 모습에서 ‘의리’를 보았기에 비록 적이지만 큰 감동을 받는다.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부하들을 사지로 내모는 왜장과 비교 되는 장면에서 준사는 큰 각성을 얻는다. 그리고 “이 전쟁은 무엇입니까? 간절하게 묻사오니 부디 답하여 주십시오.”라고 질문을 한다. 이순신 장군은 '의(義)와 불의(不義)의 전쟁'이라고 답한다. 약탈을 위한 ‘나라와 나라의 전쟁’이 아니라 인간의 가치를 구하기 위한 전쟁이라는 의미이다. 장군의 답에 준사는 진심으로 감화되어 항왜가 되고 끝까지 조선군을 돕는다. 


 영화 ‘한산’에서 준사의 활약은 그 비중이 아주 크다. ‘와키자카’의 조선인 애첩의 비녀와 자신의 목걸이가 같은 무늬임을 발견하고 같은 가치를 지닌 것을 확인한다. ‘와키자카’의 애첩은 군관 ‘임준영’에게 정보를 주고 있었다. 발각이 되자 그 비녀를 뽑아 ‘와키자카’의 가슴을 찌른다. 준사는 혀를 물고 자결 하려던 그녀를 탈출시키고 서신을 자신의 목걸이를 신표로 이순신 장군에게 전한다. 일본군이 전주성이 아니라 전라 좌수영을 직격하려고 웅치로 향한다는 일급 군사기밀이었다.

 

  그의 신물인 목걸이와 ‘와키자카’의 조선인 애첩의 비녀와 거북선 용머리 밑의 충파용 기둥은 똑같은 ‘귀면상’의 모습이다. 무서운 도깨비 같기도 한데 바로 ‘배달국 제14대 천황’인 ‘치우천황’이다.  ‘전쟁의 신’인 치우천황이 철제투구를 쓴 ‘동두철액(銅頭鐵額)’의 모습이다. 이 형상은 실로 4천 7백여 년 만인 ‘2002년 한일 월드컵’의 ‘붉은 악마’의 엠블럼이 되어 대한민국에 부활한다. 영화 ‘명량’에서도 이순신 장군의 대장선 선실에 치우천황이 그려져 있다.

 

  ‘김한민 감독’이 진정 하고 싶은 우리 역사에 대한 뜨거운 속마음이다. 그의 삼부작인 ‘노량’, ‘한산’, ‘명량’의 숨어 있는 진짜 주제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준사는 곧바로 웅치 전투에 합류해 의병들과 함께 왜군에 맞서 싸운다. 영화 종반부 의병부대장 ‘황박’이 전사하고 준사도 죽을 위기에 몰리지만 ‘황진’의 구원군이 등장해 준사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준사는 '의(義)' 자가 적힌 의병 깃발을 들고 돌격한다. 

 

 단군왕조 이전부터 전해내려 오던 ‘366사(事)’를 을파소 선생이 고구려의 동량을 가리치기 위해 다시 엮은 ‘참전계경’이 있다. 그 중 ‘의(義)’를 가르치는 대목이 있다. 


“믿음이란 하느님의 섭리에 꼭 들어맞는 것이요, 사람의 일을 반드시 이루어 주는 것으로 의(義), 약(約), 충(忠), 열(列), 순(循)이 있다. 그중 ‘의’가 가장 먼저라는 지혜의 가르침이다. 제 22사 의(義.) ‘의’란 정제되지 아니한 순수한 믿음에 부응하여 일어나는 기운이며 그 믿음을 실천하는 기운이다. 의기란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용기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요 용단을 내려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

 

  굳센 의지로 마음의 관문을 걸어 잠그므로 뇌성벽력이라도 그 의로운 기운을 깨지 못한다. 그 의기로 용기를 일으켜 세우면 금강석과도 같이 굳세고 강하며, 그 의기로 용단을 내려 움직이면 물꼬 터진 강물과도 같이 굳센 힘이 있다.(義 粗信而孚應之氣也 其爲氣也 感發而起勇 勇定而立事 牢鎖心關 霹靂 莫破 堅剛乎金石 決瀉乎江河)


 준사는 1597년 명량해전에 다시 등장하니 이순신 장군의 대장선에 동승하여 함께 악전고투에 임한다. 이순신은 안위, 김응함 등에게 적선들을 공격하도록 하고 송여종과 정응두 등은 협력해 일본의 배를 공격하는 상황이었다. 이 때 준사는 바다에 빠진 왜군 중에서 적장을 발견한다. 준사가 적장 “마다시”의 얼굴을 보고 확인하자 이순신은 그 시신을 참수해 목을 높이 걸어 일본군의 사기를 꺾는다. 결국 일본 수군함선 330여 척이 이순신이 이끄는 13척의 조선수군에 대패하고 다시 남해로 도주한다. 이후로는 완전히 서진을 포기한다. 


 이 명분 없는 살육의 전쟁에서 조선군으로 합류하고자한 일본의 무장이 또 있었다. 22살의 일본군 ‘사야가(沙也可)' 선봉장은 조선 땅에 상륙한 지 1주일 만인 4월 20일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朴晋)‘과 ’김응서(金應瑞)‘에게 은밀히 편지를 보낸다. 


 “임진년 4월 일본국 우선봉장 사야가(沙也可)는 삼가 목욕재계하고 머리 숙여 조선국 절도사 합하에게 글을 올리나이다. 지금 제가 귀화하려 함은 지혜가 모자라서도  아니요, 힘이 모자라서도 아니며, 용기가 없어서도 아니고, 무기가 날카롭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저의 병사와 무기의 튼튼함은 백만의 군사를 당할 수 있고 계획의 치밀함은 천 길의 성곽을 무너뜨릴 만합니다. 아직 한 번의 싸움도 없었고 승부가 없었으니 어찌 강약에 못 이겨서 화(和)를 청하는 것이겠습니까. 다만, 저의 소원은 예의의 나라에서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뿐입니다.(후략)” 


  그들의 갈고 닦은 전투실력과 담대함은 조선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철학과 가치관이 뚜렷한 ‘항왜(降倭)’는 또 다른 ‘의병’이 되었다. 투항한 ‘사야가’ 장군은 일본군을 상대로 의병, 관군과 협력하여 벌인 78회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한다. 


  사야가의 호는 ‘모하당(慕夏堂)’이다. 모하당 문집에는 그가 이순신 장군에게 보내는 답신도 적혀 있다. "하문하옵신 조총과 화포, 화약 만드는 법은 전번에 조정에서 내린 공문에 따라 벌써 각 진에 가르치는 중이옵니다. 바라옵건대 총과 화약을 대량으로 만들어서 기어코 적병(왜군)을 전멸하기를 밤낮으로 축원하옵니다." 


  ‘사야가(沙也可)는 훗날의 ‘모하당 김충선’(慕夏堂 金忠善 1571~1642)이다. 선조가 성을 하사하니 ‘김충선(金忠善)’은 모래(沙)에서 나온 금(金)이라는 뜻으로 ‘사성 김씨’의 시조로 본관은 김해 김 씨이다. 종전 후 그는 진주목사 장춘점의 딸과 결혼한다. 그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괄의 난에 공을 세워 ‘삼란 공신’이 되었음에도 나라가 주는 녹을 일체 받지 않는다. ‘신하로서 당연히 한 일에 무슨 대가가 필요하냐?“는 올곧은 마음이다. 조정은 여진족을 막기 위해 내방소를 설치하고 그에게 북방 경비를 맡기니 10년간 빈틈없이 지켜낸다.

 

  그 후, 병자호란이 일어나 북쪽 땅이 짓밟혔다는 소식을 듣자 66세의 나이에 의병을 모아 급히 남한산성으로 달려간다. 그러나 도중에 조정에서 항복을 결정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에 "예의의 나라 군신으로서 어찌 오랑캐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겠는가, 춘추의 대의도 끝났구나."하고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경상도 달성군 우록에 터를 잡아 후학을 가르치며 살다가 72세로 세상을 떠난다.   우록동 삼정산에 부인과 나란히 묻히고 지증추 부사, 병조판서에 추증된다. 뺨 붉은 22세의 젊은 청년 왜장 ‘사야가’는 ‘김충선’ 장군이 되어 조선 땅에 뼈를 묻고 후손들이 번창하고 있다. 같은 시기에 함께 투항하여 활동한 사여모(沙汝某) 김성인(金誠仁)의 후손들도 청도에 살고 있다. 그들이 흠모한 것은 ‘힘으로 빼앗음’이 아니라 ‘의로움의 공유’로써 바로 국조 단군께서 전해주신 “홍익인간 정신‘이었다.     (끝)

                                                        

 원암 장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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