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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형석 연세대 몀예교수 칼럼 "더불어민주당이 국민과 민주정치를 버렸다."
    동아일보의 객원논설위원이신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의 칼럼 ‘더불어민주당이 국민과 민주정치를 버렸다.’를 소개하겠습니다. 며칠 전 TV에서 뉴스를 들었다. 민주당을 대표하는 한 최고위원이 민주당은 김대중 대통령으로 출발해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을 거쳐 지금은 당 대표인 이재명으로 이어져 왔다. 이재명이 민주당과 국가를 대표할 시대정신을 이끌어 가야 할 단계라고 했다. 그것은 이재명의 주장과 신념을 대변한 선언이다. 국민도 그 뜻을 이해는 한다. 문재인 정부에서 현재까지 국정의 중책은 민주당이 맡아 왔고 지금도 절대적 여소야대의 국회이기 때문에 국민의 관심과 기대가 민주당에 집중돼 있을 정도다. 문제는 민주당 안에서는 그런 선언이 가능할지 모르나, 국민의 민주당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은 초창기보다 더 증대하고 있다. 국가와 민주주의를 위한 우려와 걱정은 한계선까지 도달한 상태다.국민은 김대중 대통령의 동족 간의 평화통일을 위한 열성과 노력을 부정하지 않는다. 남북 간의 경제적 격차가 심하므로 경제적 원조를 베풀면 15년쯤 후에는 통일이 가능할 것 같다는 견해를 믿고 싶었다. 그런데 국민이 알고 있는 것보다도 너무 많은 원조를 했다. 그 결과는 핵무기 개발과 공산정권 굳히기에 도움을 주었다. 지금의 김정은 정권을 키워주는 결과가 되었다.노무현 정권은 어떠했는가? 우리 국민이 이런 상태로는 살 수가 없고 불안하여서 이민이라도 가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할 정도의 무질서와 혼란 상태가 되었다. 국민에게 물어 보라. ‘노무현 정부가 남겨 준 업적이 무엇인가?’라고. 그 주역을 담당한 세력인 86세대 운동권의 등단과 확장기였다. 대통령 자신이 자기모순을 극복하지 못했다. ‘나같이 불행한 대통령’은 다시 태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을 몸소 남겨 주었다.그 뒤를 계승한 문재인 정부도 마찬가지다. 민주당과 운동권은 물론 문 대통령 스스로가 공은 내세웠으나 과(過)는 인정하지 않았다. 퇴임 후에도 자신의 임기 5년 동안에 쌓아 올린 정치적 업적을 윤석열 정부가 계승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국민은 문 정부와 같이 가지 않는다고 추방한 윤석열을 왜 대통령으로 선출했는가? 중요한 것은 문재인 정권이 남겨 준 업적이 무엇이며, 윤 정부가 계승해야 할 과업이 있다면 무엇인가를 묻게 한다. 정치 기반인 경제 분야는 어떠했는가? 이명박 정부를 계승했다면 경제성장은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외교는 어떻게 했으며,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는 민주국가의 위상을 지켜 왔는가? 북한 동포를 뒤로하고 김일성 정권 세습화에 동조했다면 그것은 실정 중의 실정이다. 김대중 정신에 위배되는 결과가 되었다. 대한민국으로 귀순해 온 동포와 중국에서 우리 품으로 오려는 북한 동포들에 대한 처신은 앞으로도 역사의 평가를 받아야 할 과제다. 친북 정책은 북한 동포를 위한 절대적 의무와 권리이다. 김정은 정권을 위한 종북이 아니다.현재에도 민주당은 국정운영 방향과 방법은 물론 절차까지 관여하는 국회의 주도권을 행사한다. 국가를 위해서보다는 윤 정권을 타도하고 임기 내라도 재집권하겠다는 자세다. ‘그것도 애국심인가? 국민을 위한 정치인의 양심인가?’라고 국민은 묻는다. 누가 보든지 민주당은 국가보다는 정권을 위했고, 지금은 당 대표인 이재명의 사당이 되었음을 의심치 않는다. 민주정치는 실종되었고 싸워서 이기면 그것이 정의가 된다는 개인과 집단의 투쟁이 필수적이라는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 초창기부터 실정에 앞장서 왔던 임종석 전 실장,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송영길 전 당 대표, 각 분야에 자리 잡고 있던 운동권 출신의 잔여 세력이 이재명 대표를 앞세워 정권 재장악에 동참하려는 기세다. 민주당 안과 주변에 있던 친북좌파까지도 예외는 아니다. 민주국가에서는 선한 공존의 질서가 유지되어야 한다. 지금은 국가적 방향과 국민의 진실과 정의, 자유와 휴머니즘 정신이 보장, 구현되는 나라 선택에 직면하고 있다. 우리는 자기 잘못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 지도자를 원하지 않는다. 진실과 정직 없는 ‘내로남불’의 정의관, 인격을 갖추지 못한 개인이나 이기적 집단세력에 정권을 위임해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을 위하고 국민을 섬기려는 지도자를 선출해야 한다. 여야를 가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국민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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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1
  •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가 그립다
    '의대 정원 확대’에 대한 반발로 전문의 파업이 대형 병원 중심으로 사직서를 제출하고 근무를 중단했다. 이에 따라 의료 현장의 혼란이 가시화되고 의료 공백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안타깝기가 이를 데 없다. 이 안타까운 현실을 보면서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리는 장기려 박사가 문뜩 생각나고 그리워진다. 장기려 박사님의 꿈은 어린 시절부터 의사였다. 그래서 경성 의학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평양 의과 대학과 김일성 종합 대학 교수를 지냈다. 한국 전쟁이 일어난 1950년, 장기려 박사님은 철수하는 군인들의 손에 이끌려 아내와 5남매를 북에 둔 채 둘째 아들만 데리고 월남하였다. 그리고 부산에서 천막을 치고 복음 병원을 세워 행려병자를 치료했다. 장기려 박사님은 가난한 사람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는 다짐을 하며 하루에 200명이 넘는 환자들을 돌보았다. 그럴 뿐만 아니라 1959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간 절제 수술에 성공하는 등, 당시 우리나라 외과 의사 가운데 최고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병원이 커지고 무료 진료가 불가능해지자 장기려는 1968년 한국 최초의 의료 보험 조합인 청십자 의료 보험 조합을 설립하였다. 청십자병원은 가난한 사람을 정성껏 치료해 줄 뿐만 아니라 치료비를 깎아 준다고 소문이 나 늘 많은 환자가 찾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해 있던 농부가 장기려 박사에게 하소연했다. “선생님, 제가 당장은 돈이 없지만 나중에 꼭 벌어서 갚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사정 좀 봐주세요. 내일 당장 모내기를 해야 하는데 이렇게 병원에 묶여 있으면 한 해 농사를 망치게 됩니다.” 농부의 말을 들은 장기려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밤에 문을 열어 줄 테니 그때 가세요.” 농부가 깜짝 놀라자 장기려는 웃으면서 말했다. “병원에서는 아마 병원비를 내지 않으면 퇴원을 안 시켜 줄 거예요. 그런데 돈이 없으니 도망을 쳐서라도 일을 해야 가족을 돌볼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장기려는 그렇게 말하고 농부에게 돈까지 쥐여 주었다. “얼마 안 되지만 차비나 하세요.” 농부는 고마운 마음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는 수술비가 없는 환자를 위해 자기 돈으로 수술을 해 주고, 그나마도 감당할 수 없게 되면 밤에 몰래 환자를 탈출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평생 자기 집 한 채 가지지 못하고 병원 옥상 사택에서 살다가 1995년 12월 추운 겨울날 새벽에 세상을 떠났다. 내 마음이 그러하듯 창밖에는 겨울비가 밤새 주룩주룩 내린다. 오늘따라 ‘바보의사 성산 장기려 박사님’이 그저 그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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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다큐‘기적의 시작’ 관람 후기
    ‘은종’이라는 동료 시민의 ‘기적의 시작을 보고’라는 관람 후기를 소개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일대기를 그린 또 다른 다큐극 영화 ‘기적의 시작’을 보고 왔습니다. 두 말이 필요 없습니다. 꼭 보십시오. 건국 전쟁을 보신 분이라면 더더욱 꼭 보십시오. ‘건국전쟁’이 큰 그림을 그리는데 치중했다면 ‘기적의 시작’은 이승만 대통령의 디테일한 부분을 세밀히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건국 전쟁은 역사를 잘 모르고 일방적으로 세뇌 당한 분들에게 유익한 영화입니다. 4.19는 이승만이 원인인가? 김구의 정체, 런 승만의 문제, 한강철교 폭파사건 등 이승만 대통령이 오해받고 있는 부분의 팩트를 설득력 있게 제시함으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오해를 푸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에 대한 역사를 잘 아는 분들이 보았을 때 거의 다 아는 내용이었고 소수의 부분은 새로운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의 시작은 자료를 수집하는 데 있어서 훨씬 더 섬세합니다. 이승만에 대한 책 몇 권을 섭렵했던 분들도 새로운 내용을 보고 저런 자료를 어떻게 찾았을까 하고 그 수고에 감탄하게 됩니다. 어쩌면 흥행에 치명적이 될 수도 있는 이승만이 한성 감옥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된 과정이나 서거하기 전 기도한 장면 등을 삽입한 것은 기독교인들에게 많은 감명을 줍니다. 이승만의 삶은 기도에서 시작하여 기도로 끝납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은 기도로 시작한 나라이니 기도를 놓지 말아야 국가가 번영한다는 무언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만약 성도들이 단체관람한다면 ‘기적의 시작’이 더 감명을 줄 것입니다. 기적의 시작의 증언자들은 이승만과 직접 만난 분들을 등장시켜 훨씬 더 사실적으로 다가왔다. 백선엽 장군,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 이인수 박사, 그리고 그 며느리의 증언은 어느 책에서도 볼 수 없는 사실적이고 감동적인 얘기들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농지개혁, 6.25 전쟁에 대한 일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맺어진 경위 등은 훨씬 더 자세하고 섬세하게 묘사되어 역사의 진실에 더 가까이 갈 수 있게 해줍니다. 무엇보다도 깜짝 놀란 것은 이승만의 경제에 대한 관심입니다. 벌써 한성감옥에서 쓴 ‘독립정신’에 앞으로 한국은 공업국이 되어야 한다고 예견한 것은 대단한 통찰력이었고, 실제로 6.25 이후에 공업국이 되기 위해 그가 이룬 업적을 세밀한 자료와 더불어 제시한 것은 그동안 몰랐던 내용이었습니다. 다큐 영화가 자칫하면 지루할 수 있는데, 텔렌트 임동진의 탁월한 연기력으로 이승만을 잘 살려내었습니다. 아마도 무료 출연이었을 것인데, 눈물과 마음으로 연기하는 것이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대한민국을 정말 사랑하는 대배우라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다른 무명의 배우들이 적절하게 사건들을 잘 재현해내어 다큐에 몰입할 수 있도록 톡톡히 한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승만 한 개인에게 너무 많은 빚을 졌습니다. 그동안 런 승만, 독재자, 친일파 등등으로 왜곡된 이미지를 이제는 바로 잡을 때가 되었다. 위대한 거인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때가 되었습니다. 모든 국민들에게 이승만을 바로 알릴 때가 되었습니다. 두 영화를 꼭 보십시오. ‘건국 전쟁’은 전체적인 그림을 그립니다. ‘기적의 시작’은 섬세하게 그 안을 들여다 봅니다. 성경으로 비유하면 ‘건국 전쟁’은 마가복음에 비유한다면 ‘기적의 시작’은 요한복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둘 중에 한 영화만 선택하지 마십시오. 두 영화 모두 보시는 것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요, 애국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건국 전쟁은 제법 관람객들이 있었는데, 기적의 시작은 관객면에서 많이 부족해 보입니다. 이점이 안타깝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기적의 시작’이 훨씬 더 애정이 갑니다 우리교회 성도님들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가슴에 더 와닿는다고 했습니다. 건국 전쟁을 보신 분들은 반드시 기적의 시작도 함께 보십시오. 다른 감동을 느낄 것입니다. ‘기적의 시작’을 먼저 보셨습니까? ‘건국 전쟁’도 보세요. 두 영화가 결합할 때 우리는 이승만 대통령과 대한민국을 좀 더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총선 전에 두 영화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할 일은 두 영화가 흥행해서 대한민국 국민들의 역사인식이 바뀌도록 열심히 홍보하는 일입니다. 아직 보지 못하셨다면 먼저 극장으로 가십시오. 교회 단체관람을 강력히 추천합니다.”라고 동료 시민 ‘은종’은 말했습니다. 김덕영 감독의 ‘건국 전쟁’이 개봉 27일만에 100만을 돌파하며, 다큐로는 드문 흥행 기록을 세우며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권순도 감독의 ‘기적의 시작’, 그리고 ‘건국 대통령 이념 보급회’의 김효선 사무총장의 ‘이승만의 독립 외교 33년’ 등 다른 기록 영화들도 ‘건국 전쟁’과 거의 동시에 선을 보였습니다. 이장호 감독의 이승만 관련 영화 ‘하우보만의 약속’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동안 영상 매체는 “대한민국은 태어나서는 안될 나라”라는 주장을 하며 반공 애국 진영, 특히 이승만 건국 대통령을 비방하고 폄훼하는 반역 세력의 전유물처럼 이용되어 왔습니다. 그런 영상 매체가 이제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밝히려는 일에 효율적으로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승만이 ‘독재자’ 또는 ‘친일파’로 낙인 찍히며 국민의 뇌리에서 아예 지워버려야 할 추악한 인물로 악마화 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가 독립운동과 반공 투쟁에서 승리해서 대한민국의 건국 대통령이 되었고, 공산군의 6.25 남침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내고 부흥시키는데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이승만만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쉽게 공산화되어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김일성의 지배를 받는 위성국가로 편입되었을 것을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세계적인 위인이자 천재였습니다. 그는 이 나라의 국부였고, 애국자요, 선지자요, 예언자요, 세계가 공산당을 열광할 때 “공산당은 망한다”고 외쳤습니다. ‘전시 중립론’이라는 논문을 쓴 국제 정치가였고, 훌륭한 선교사였고, ‘재팬 인사이드 아웃’의 저자인 작가였고, 민족 복음화를 소망한 하나님의 종이었고, 철저한 반공주의자였으며, 그는 하나님 중심의 철저한 자유 민주주의 투사였습니다. 그는 당시 최고의 학력 소유자였습니다. 죠지 워싱톤대 학사였던 클린턴 대통령과 동문이었으며, 하바드대 석사였던 오바마 대통령과 케네디 대통령과 동문이었으며, 프린스턴대 박사였던 윌슨 대통령과 동문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도 이만한 학력 소유자를 찾기 힘들었습니다. 대한민국에 자유의 등불을 달아준 불세출의 위대한 정치가였습니다. 탁월한 외교가였으며, 토지개혁을 단행했고, 양반과 상놈을 구분하는 ‘반상 철패’를 했으며, 의무 교육을 실시했고, 여성들을 투표에 참여케 했습니다. 의회 정치를 실시 했습니다. 그의 애국정신과 업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한 시대의 등불이었습니다. 전교조에 의해 역사 왜곡이 극에 달한 이 나라는 이승만을 바로 알아야 대한민국이 사는 것입니다.
    • 오피니언
    • 강석종 칼럼
    2024-03-08
  • 이승만 영화 ‘기적의 시작’이 만들어진 배경 이야기
    권순도 감독의 ‘[기적의 시작]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기적입니다.’라는 글을 소개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영화 '기적의 시작'을 만들고, 전국 개봉을 하기까지 모두 기적의 순간입니다. ■ 영화의 시작 ■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저의 아버지께서 '이승만 대통령 영화를 만들어 보라'는 권유를 하셨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유명하지 않은 제가 그 당시 더 기반이 없었던 시절, 그런 권유를 받으니 너무 막연하고 막막하게 다가 왔습니다. 저는 대학 졸업 후에는 부모님 댁에서 같이 사는 것 외에는 따로 '부모님으로부터 금전적인 도움은 받지 말자'고 했고, 또 그것을 실천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신 어머니는 우리나라 영화계와 아무런 인맥도, 기반도, 심지어 카메라 한 대 조차 없던 아들이 이리저리 일감을 찾아다니는 모습에 안쓰러워 ‘카메라 한 대 얼마 하니? 카메라 한 대 사줄게. 그것 가지고 시작해 보라’고 하셨지만 저는 그것마저 거절했습니다. 많은 예술인들이 그렇겠지만, 저 역시 이 분야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돈벌이가 시원치 않았고, 포기하고 다른 일을 해 볼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었습니다. 친구들이 만나자고 하면 누가 밥값을 내야 하는지 신경이 곤두섰고, 스스로를 단련시키기 위해 버스나 지하철 다섯 정거장 정도는 교통비를 안 쓰고 걸어 다녔습니다. 물론 저의 집안이 그 정도 돈 못 쓸 정도로 여유가 없지는 않았으나, 저는 속으로 '이 나이에 돈벌이도 못하면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다니는 것은 사치다'라고 생각하며 가급적 걸어 다녔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 온 저의 영화 인생은 그렇게 밑바닥부터 시작되었고, 많은 분들이 도와주셔서 비록 독립영화이지만 조금씩 규모를 키워가며 제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처음에는 순회 상영을 다니며, DVD를 찍어 판매하는 수준에서 점차 작품을 작은 영화관에서부터 상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작품이 하나 둘 씩 영화관에 걸려 작품을 찾는 관객들이 늘었고, 이번엔 멀티플렉스 상영관 전국 개봉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랜 기간을 지내면서 아버지의 권유를 당장 실행해 옮겨 작품을 완성할 수는 없었으나, 덕분에 이승만 대통령과 같이 일하거나 생활했던 분들을 만나 뵈면 꼭 이 대통령에 대해 질문하고 이를 기록해 두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백선엽 장군님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뵌 분들은 그 당시에도 꽤 계셨으나, 백 장군님처럼 이승만 대통령과 같이 큰일을 하며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셨던 분은 없었습니다. 백 장군님은 이승만 대통령과의 일화와 본인이 참여했던 전투에 대해 매우 실감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전후방 전투 현장을 직접 보여주시며 설명하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런 귀한 증언들은 매번 카메라로 기록해 두었습니다. 그렇게 기록하는 데는 많은 비용이 들지 않아 저는 그 당시에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했습니다. 요즘과 달리 20년 전에는 6mm 테잎을 썼는데, 당시의 기록이 멀쩡하게 보존된 것도 작은 기적입니다. 한편 해를 거듭하며 시간이 지나도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왜곡과 비난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아니, 멈추기는커녕 점점 심각해져만 갔습니다. 또 많은 젊은이들이 그런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모습에 국부 더 나아가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를 두고만 볼 수 없어 '22년 12월부터는 아예 작정하고, 그동안 모았던 자료들과 추가 인터뷰를 통해 '기적의 시작'을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 국민 대배우의 합류 ■ 제작 과정에서 국민배우 임동진 님도 합류하시게 되었습니다. 원래 그런 대배우분께 극영화도 아닌 다큐멘터리에 넣을 재연장면에 출연해 주시라고 요청하는 것은 큰 결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임 배우님께서는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으셔서, 속으로 많이 놀랐고, 겸손한 모습에 크게 감동했습니다. 임동진 배우님과 같은 영화계 거물이 합류하셨음에도 제작환경은 딱히 나아지지는 않았습니다. 제작진은 그 분 이름을 내세워 따로 모금하지 않았고, 제 성격상 여기저기 제작비 모금하러 다니기도 쑥스러워 그러지 못해서 프로듀서 김재동 목사님이 모금해 오신 제작비 내에서 해결했습니다. 그런 형편 속에 많은 분들의 우려와 달리 제작은 무사히 마쳤습니다. ■ 아들 이인수 박사의 생전 마지막 고백 기록 ■ 이번 작업에서 또 기억에 남는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로 이 대통령의 쓸쓸한 말년을 제일 가까이 곁에서 지켜보셨던 이인수 박사님과의 인터뷰입니다. '23년 11월 별세하신 이인수 박사님의 인터뷰는 결코 쉽게 성사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작품을 위해 그분의 증언을 꼭 담고 싶었으나, 그분의 체력에 한계가 많으셨던 때라 인터뷰 약속을 잡고 갔다가도 두 세 번 실패하여 헛걸음을 하고 돌아 왔습니다. 인터뷰가 어렵게 되자 이인수 박사님과의 인터뷰는 포기했습니다. 사모님이신 조혜자 여사께서 마치 곁에서 대신 말씀을 전하시듯 하고, 이인수 박사님은 옆에만 앉아 계십사 하는 게 저의 새로운 바람이자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무 약속도 없이 임동진 배우님과 이화장을 둘러 보러 갔다가 이인수 박사님 컨디션이 최상인 것을 발견! 당장 카메라를 켜고 마이크를 연결해 인터뷰를 진행하였습니다. 그때 마침 장비를 가져간 것도 다행이었고, 그게 이인수 박사님의 생전 마지막 인터뷰가 되었습니다. 다시 봐도 당시 이 박사님은 혼신의 힘을 다해 인터뷰에 응해주셨던 모습이 역력합니다. 이 모든 것이 관객들에게 감동을 전해주는 것 같습니다. ■ 신앙인 이승만 재조명 ■ 이승만 대통령이 젊은 시절 선교사들이 전해 준 예수님을 한성 감옥에서 복역 하며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영접한 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난제 앞에서 하나님께 매달렸고, 우리나라 첫 국회를 기도로 시작했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작품에서 비기독교인들을 의식해서인지, 기독교 색채를 빼고 있습니다. 종교를 떠나 그런 이승만의 모습은 인간 이승만을 이끄는 원천적인 힘이었기 때문에 저는 제 작품에서 그런 부분을 다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마지막 기도는 임동진 배우님의 뛰어난 연기력과 맞물려 관객들에게 많은 감동을 선사해 줍니다. ■ 전국 극장 개봉 ■ 드디어 ‘24년 2월 22일! 기적의 시작은 전국 개봉됩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어렵지만, 영화를 만드는 것도 어렵고, 영화를 한 개 극장에라도 걸기도 어렵고, 극장에 걸었다 해도 관객들을 사로잡기에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그 모든 과정에 전문 인력이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저예산 독립영화에서는 이 모든 과정이 한 두 사람의 몫입니다. 전국 극장에서 개봉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전국 극장 개봉을 위해서 제작사들은 적게는 수 천 만 원, 많게는 수 억 원의 홍보비를 씁니다. 저희는 '기적의 시작' 홍보를 위해 쓸 수 있는 금액이 거의 없었습니다. 금액을 밝히기에 민망해 그럴 수는 없지만, 그 금액조차 제작 과정에서 다 소진했기 때문입니다. 홍보를 위해 쓴 금액은 전단지 인쇄에 30만원 가량, 작품을 소개해 주시는 유튜브 분들께 음료수를 사 드리거나 식사 대접을 한 게 전부입니다. 주말에는 감독인 제가 손수 전단지를 챙겨 광화문이나 시청 같은 곳에 가서 전단지를 돌렸습니다. 젊은이들 중에는 전단지에 이승만 대통령 얼굴이 있는 것을 보고 바로 접어버리며 불쾌감을 표현한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수모를 당하면서도 전단지를 나눠 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것이 많은 홍보비 없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원초적인 홍보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SNS 홍보도 했으나 제가 인플루언서가 아니다 보니 효과는 미미했던 것 같습니다. 넉넉잡고 홍보비로 100만 원 정도 썼던 것 같은데, 그런 상황에서 전국 개봉까지 이어진 것은 '기적'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습니다. 어렵게 잡은 서울 두 개의 극장(필름포럼과 허리우드). 시사회 이후 5개월간 상영을 통해 관객 수 천명이 관람하고, 입소문을 듣고 오는 관객 수가 줄지 않자 멀티플렉스에서 이를 눈여겨보고, 일단 전국 10개 극장에서 상영을 시작해 보자고 제안을 준 것 같습니다. 수 많은 난관을 뚫고 드디어 전국에 소개되는 ‘기적의 시작’. 여태까지는 저와 조력자 분들의 힘으로 끌고 왔으나 이제부터는 여러분의 관심과 성원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렇게 극장에 걸게 되었는데 보러 와 주시지 않으면 허무하게 극장에서 내려지게 됩니다. 극장에 와서 봐 주시는 것은 작은 애국입니다. 교회에서 단체관람 와 주시면 좋겠습니다. 조만간 CGV에 예매가 열립니다. 예매를 많이 해 주시면 더 많은 상영관을 확보하여 더 많은 관객 분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독 권순도 올림
    • 주요뉴스
    2024-03-07
  • 이제는 ‘기적의 시작’이다!
    스카이데일리 임명신 기자의 “[기획] 이승만 다큐 ‘건국 전쟁’ ‘기적의 시작’… ‘길 위에 김대중’ 압도”라는 글을 소개합니다. 권순도 감독이 20년 구상 끝에 작년 10월 내놓은 ‘기적의 시작’은 독립영화 특유의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건국 전쟁’ 흥행 속에 역주행 중입니다. 같은 주제의 두 다큐는 상보적이며 상호 심화학습을 가능하게 한다. 필히 두 편 모두 볼 필요가 있습니다. ‘건국 전쟁’과 ‘기적의 시작’은 같은 목표, 다른 매력 건국 대통령 우남 이승만(1875~1965)을 다룬 두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조용한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 2월 1일 개봉한 김덕영 감독의 작품 ‘건국 전쟁’이 주목받으며 4개월 전 나온 권순도 감독의 작품 ‘기적의 시작’도 역주행에 가속도가 붙었다. 두 작품 다 철저히 사료와 증언을 바탕으로 구성된 다큐지만 흐느끼는 관객이 속출할 만큼 뜨거운 반응이다. 두 편의 이승만 다큐가 또 다른 역사 인물 다큐를 압도한 것도 눈길을 끈다. 훨씬 유리한 여건 속에 제작된 김대중 탄생 100주년 기념작 ‘길 위에 김대중’이 개봉 4주 후 12만 관객을 동원한 반면 ‘건국 전쟁’은 개봉 열흘 만에 누적 관객 수 18만 명을 돌파했다. 누적 관객 수 3위, 개봉관 수도 개봉 당초보다 3.3배 늘어난 상태에서 11일 누적 관객 수 24만 명을 넘어섰다. 다큐로선 이례적인 성적이 어디까지 갈지 관심을 모은다. ‘기념관 하나 없는 이승만’이 ‘기념시설 최다의 김대중’을 이겼다는 말까지 나온다. 한편 ‘기적의 시작’은 작년 10월 하순 서울 시내 단 두 곳(종로3가 낙원상가 헐리우드 극장·신촌 필름포럼)에서 개봉된 가운데 주로 각종 애국단체∙교회 등의 상영회를 통해 관람객을 늘려 갔다(현재까지 5000명 정도). ‘건국 전쟁’이 2월 1일 전국 CGV에 걸리고 화제를 부르자‘기적의 시작’ 역시 개봉 약 4개월 만인 22일 CGV 재개봉이 결정됐다. ‘기적의 시작’ ‘건국 전쟁’은 대한민국이 어떻게 세워졌고, 멸망의 위기를 넘어 훗날 선진국으로 도약할 기틀을 구축했는지 조목조목 짚는다. 농지개혁, 문맹퇴치(교육개혁), 안보·경제발전을 담보한 한미 동맹, 자원 빈국의 산업화에 절실한 원자력발전의 토대 마련 등 다가올 산업화가 이승만 대통령 시대에 어떻게 준비됐는지를 두 편의 다큐 영화 는서로 다른 톤으로 설명해 준다. 각각의 장점이 있으며 지루하지 않을 반복 학습 효과가 기대된다. ‘기적의 시작’은 이승만을 다룬 최초의 본격 다큐 영화라는 의미 외에 애국지사로서의 역정과 기독교 신앙의 상관성을 조명한 점도 돋보인다. 창군 및 구국의 영웅 백선엽 장군(1920~2020)과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1931~2023) 박사의 생전 마지막 인터뷰, 원로배우 임동진 목사의 이승만 연기 역시 독보적인 부분이다. 두 다큐는 1천 수백 년에 걸친 왕조 시대와 근대 식민지 시대를 겪은 중세적 공동체에서 자유 민주공화국 헌정 질서 마련이 얼마나 천지개벽할 일이었는지를 묵직하게 일깨운다. 공통된 주제지만 두 감독이 친분이 있거나 사전 협의한 것도 아닌데 내용상 겹치지 않는다. 상보적이며 상호 심화 학습판이므로 둘 다 관람할 가치가 충분하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공산화가 신생국들의 대세였던 시절, 이승만은 현대 국가(자유민주공화국)의 본질과 시스템을 이해한 유일한 한반도인으로 볼 만하다. 두 다큐의 시의성도 각별하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위협받는 오늘날, 정통성 논란은 결국 ‘이승만의 나라’ ‘김일성의 나라’ 양자택일의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한국 현대사를 넘어 세계사적 인물 이승만… 우선 다큐부터 ‘건국 전쟁’ 출연자의 한 사람인 류석춘 전 연세대 교수(전 이승만연구원장)는 연구원이 보관 중인 이승만 1차 자료 100박스에 대해 예산 부족으로 손을 못 대고 있다며 아쉬움을 수차례 토로한 바 있다. 그 자료들은 대부분 40년 망명 생활 중 세계정세를 전하거나 논한 신문·잡지 스크랩과 친필 메모들이라고 한다. 한국 현대사를 넘어‘세계사적 차원에서 연구돼야 할 인물 이승만’이라는 시각에 힘이 실린다. 이승만의 생애는 드라마틱하고 불가사의한 요소로 충만하다. 영화∙드라마 등 대중 서사 장르를 통해 그려질 날이 와야겠지만 일단 다큐가 절실했다. 관련 사실들이 극단적으로 왜곡되거나 묻혀 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교과서에서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고 교과서 밖에선 악마화∙희화화됐을 뿐이다. 해석의 문제 이전에 팩트 자체가 엉터리인 경우도 많다. ‘이승만 죽이기 60여 년’… 가짜 뉴스·역사∙왜곡의 결정판 명저 ‘슬픈 중국’의 저자이자 ‘건국 전쟁’ 첫머리에 등장한 송재윤 캐나다 맥마스터대 교수는 조선일보 칼럼 ‘이승만 죽이기 60여 년, 팩트를 지어 내는 역사가들’에서 “김덕영 감독의 작가 정신과 예술혼이 거짓 뉴스와 허위 정보를 마구 엮어 일방적으로 이승만 악인전(惡人傳)을 집필해 온 역사학계의 고루한 시대착오와 부족 주의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고 평가했다. ‘이승만 죽이기’ 최근 사례로 송 교수는 “(역사학자인)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박태균)”가 TV 교양 프로에서 이승만의 1952년 대선 승리에 대해 기호 1번을 독점해 대다수 문맹 유권자 몰표를 유도한 결과라는 취지로 설명한 점을 들었다. 이어 간단한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그게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는 것과 김 감독이 당시의 선거 포스터를 꼼꼼히 뒤져 이를 입증해 냈음을 짚었다. 이승만은 기호 1번이었던 적이 없다. 이승만에 얽힌 대표적 오해인 6·25전쟁 발발 직후 라디오방송 틀어 놓고 도망갔다는 미확인 소문이 오늘날까지 조롱과 저주 담긴 별명 ‘런Run승만’으로 살아 있다. 김 감독의 ‘건국 전쟁’에서 ‘한강 다리 폭파’ ‘3.15 부정선거’ ‘하와이 도피설’ 등을 바로 잡을 증거들이 제시됐다. 또 한4·19 이후 이승만의 행보야말로 ‘독재자’ 낙인이 왜 부당한지에 대한 결정적 증거다. 자신과 무관한 부통령 선거에 대해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난 무일푼의 독재자? 그런 인물이 과연 독재자일 수 있는지 ‘건국 전쟁’과 ‘기적의 시작’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묻고 있다. 한국인이 처음 만난 이승만… ‘건국 전쟁’ 감동 후기 이어져 조지워싱턴대(학사)∙하버드대(석사)∙프린스턴대(박사) 출신의 이승만이 얼마든 취득 가능했을 미국 시민권을 마다한 채 40년간 무국적자의 불편함을 견딘 사실에 김 감독은 주목했다. 아울러 미국 내 이승만의 족적이 그간 어떻게 왜 지워졌는지 현지 교민들 증언으로 전해진다. 1953년 정전협정 1년 후 미국 방문 당시 자유의 투사로 칭송받으며 뉴욕 시가를 대대적으로 퍼레이드한 영상은 ‘건국전쟁’을 통해 처음 세상에 공개됐다. 이승만이 공산주의에 맞설 냉전 구도의 불가피성과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미국 등 서방세계 조야에 열렬히 설명∙설득한 점도 부각된다. 그것이 대한민국 탄생 비밀의 한 측면이다. 공산주의의 본질·실상에 대부분 무지하던 시절이었다. 개봉 초기 ‘건국전쟁’ 포스터 사진만 네이버 영화면에 누락돼 있어 “좌편향 문화계의 이승만 지우기”라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관람객 평점은 10점 만점에 육박했다. “덕분에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어 감사하다” “공산화 저지의 공로만큼은 이승만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취지의 감상 후기가 가장 많다. 조선일보가 김 감독을 자세히 인터뷰한 것 또한 눈길을 끈다. 여기서 김 감독은“(이승만) 공부를 시작한 뒤 큰 반성을 하게 됐고 그를 비롯한 건국 세대에 대한 죄송함을 영화에 담았다”고 밝혔다. 2012년 유튜브에 유포된 악의적 이승만론(論) ‘백년 전쟁’이 오히려 일부 네티즌이 진실 찾기를 시작한 계기가 되었던 것과 흡사한 경우라 할 것이다. 북한은 왜 그렇게 ‘이승만 타도’에 집착했을까… 586세대 김 감독의 각성 김 감독은 1950년대 동유럽 국가들로 보내진 북한 전쟁고아들을 조명한 다큐‘김일성의 아이들’(2020)로 유명하다. 1만명 가량 동유럽에 분산 위탁돼 자라다 스탈린 사후 격변 속에 집단귀국 당한 후 김일성 유일 체제를 위해 잊혀진 존재들이다. 김 감독은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북한에 관심을 가지다가 1990년대 중반까지 평양에 ‘이승만 괴뢰도당 타도’구호가 있었음을 알게 됐으며 그들이 왜 그렇게까지 이승만 타도에 집착했는지 궁금해졌다. 김 감독이 작품 구상 및 제작 과정에서 깨닫게 된 것은 이승만을 향한 집요한 폄훼가 “오랜 세월 좌파들의 선동에 의한 부당한 평가”와 “북한의 공작” 탓이 컸다는 사실이다. 김 감독 자신이 북한에 호감 내지 환상을 가진 586세대 일반의 감성과 역사관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에 그 폐해 또한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거짓의 선글라스를 벗으면 평생 대한민국만을 위해 살았고 애국애족의 마음을 행동으로 실천했던 한 노인의 모습이 보일 것”이라며 울먹였다. 한 네티즌의 댓글 “대한민국이 버린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위대함은 대한민국 국민만 모른다. 참담한 현실에 부끄럽고 한없이 죄송하다”는 심정과 고스란히 겹친다. ‘건국’ ‘산업화’ 없이 ‘민주화’는 불가능… 그러나 뒤틀린 역사교육 김 감독의 말대로 이승만은 “(파고들수록) 100년 앞을 내다보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한 한국사의 유일한 인물”이다. 작품 속에서 그렉 브레진스키 미 조지워싱턴대 교수가 “미래 비전과 안정된 보장 시스템이 존재해야 건국이라 할 수 있다”고 강조했듯이 “바로 그걸 이승만이 해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이란 결코 일본의 패망으로 당연히 얻어진 게 아니었다. 김 감독은 “이승만이 깔아 놓은 레일 위에 박정희의 경제 개발이란 기관차가 달린 것”으로 두 지도자의 시대를 요약한다. 핵심적인 통찰이다. 산업화를 통한 중산층의 성장 없이 이뤄지는 ‘민주’란 ‘인민 민주주의’에 불과하다.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중국(중화인민공화국)도 모두‘민주’를 전면에 내세운다.문재인 정부 시절 현행 헌법에서‘자유’를 삭제하고자 시도한 행위의 의미와 그 궁극적 지향점이 무엇인지 많은 사람이 알아차리게 됐다. ‘독재자’라는 꼬리표가 3대 세습체제 속에 신격화된 북한 권력자들에게 붙는 대신 변명없이 자진 하야한 이승만에게 당연한 듯 붙는 게 온당한지 이제라도 저마다 자문해야 할 시점이다. ‘이승만=살인마’의 관점을 일반화시키면서 제주 4.3의 비극이 대한민국 수립 및 그것을 위한 한반도 유사 이래 최초의 보통 선거(5.10총선) 저지를 위한 남로당의 무장 폭거에서 출발한 것임은 도외시한다. 이것이 지난 30년 우리나라 제도권 안팎의 역사교육 현실이다. 놓칠 수 없는 ‘기적의 시작’ 권 감독의 20년 구상 끝에 태어난 ‘기적의 시작’은 공산주의가 유라시아 대륙을 뒤덮었던 시절 그 끝자락 한반도에서 어떻게 자유 민주공화국이 수립·유지될 수 있었는지, 이승만 덕분에 가능했던 대한민국탄생의 기적과 그것이 어떻게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토대가 됐는지에 초점을 맞췄다. 독실한 크리스천의 면모도 조명했으며 원로배우 임동진의 이승만 재연으로 다큐 이상의 감동을 더했다. 백선엽 장군 인터뷰와 ‘기적의 시작’ 개봉 며칠 후 별세한 이승만의 양자인 이인수(전 명지대 법정대 학장) 박사의 영상은 진귀한 역사적 자료가 됐다. 본인들의 생전 마지막 공식 기록이다. 대통령 하야 후 전주 이씨 문중의 주선으로 이승만 슬하에 30세때 입적한 이 박사와 그 가족은 지난 60여 년간 이승만 죽이기의 실질적 희생자였다. 권 감독에 따르면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한 이 박사가 기적처럼 촬영에 임했다고 한다. 한 마디 한 마디 온 힘을 다하듯 간신히 해독 가능한 발음으로 건국 대통령의 애국 열정과 말년의 부자(父子)인연을 증언한 모습이‘기적의 시작’에 실려 있다. 특히 망명 생활의 근거지였던 하와이에서 몇 개월 휴식한 이승만 내외가 귀국하려던 당일 한국 정부로부터 하와이 잔류를 종용당한 장면, 이후 우울 속 건강 악화로 현지에서 임종을 맞게 된 과정이 생생하게 회고됐다. ‘건국전쟁’에서 하와이 망명설이라는 거짓 뉴스 유포의 전후 맥락을 짚었다면 ‘기적의 시작’은 당사자들의 내면을 전하고 있다. 영화 ‘서울의 봄’으로 현대사 공부? 화제의 이승만 다큐 두 편은 1300만 관객을 동원한 ‘서울의 봄’에 맞선 체제 정당성 대결의 최전선에 있다. 총선을 약 2개월 앞둔 시점에서 또 하나의 선거전이 될 수 있다. ‘서울의 봄’은 대다수 관객에게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허구의 틀을 빌어 사실상 실존 인물과 역사를 거꾸로 해석한 상업영화다. ‘서울의 봄’이 대한민국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 ‘기회주의자가 득세한 적폐의 나라’라는 인식을 강화하도록 유도하는 반면 ‘건국 전쟁’과 ‘기적의 시작’은 대한민국 헌정사의 절체절명 위기와 우여곡절 속에서 이승만이라는 한 애국자가 지향한 가치를 되새긴다. 이승만이 깔아 놓은 레일(자유민주 헌법) 위에 박정희의 산업화(근대화)가 가능했다는 관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1979년 10.26으로 중단될 뻔한 산업화를 완결짓고 민주화 시대를 예비한 게 전두환의 신군부, 즉 제5공화국이다. 그렇다면 영화 ‘서울의 봄’이 기도한 신군부 악마화는 대한민국 헌정사의 부정 아닌가. 이원석 검찰총장이 몇몇 동료들과 ‘서울의 봄’을 관람한 인증 샷과 소감을 남겼다. 기존 민주화운동 세력의 신군부 서사에 충실한 발언이었다. 건국의 역사를 제쳐둔 채 민주화를 말할 수 있을까. ‘건국 전쟁’ ‘기적의 시작’ 관람 권유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 등 정부 요인과 ‘73년생 한동훈’ 등 여당 인사들의 관람 필요성이 역설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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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6
  • 3.1 독립운동 정신으로 4.10 총선 승리하자!
    ‘한국 NGO연합’ 및 ‘자유정의시민연합’의 글을 소개합니다. 오늘은 3.1독립운동 105주년 기념일이다. 이번 4.10 총선에서 3.1 독립운동의 정신으로 좌파와의 싸움에서 반드시 승리하자. 4.10 총선은 대한민국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중차대한 선거다. 선거라기보다 제2의 6.25와 같은 선거전쟁이다. 4.10 전쟁에 나서는 국민들은 죽을 각오로 선거에 임해야 한다. 나 하나쯤의 자만은 바로 죽음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경각에 달린 나라를 구해야 한다. 자유대한민국이 지속적인 성장과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4.10 총선에서 반드시 자유 우파세력이 국회 다수석이 되어야 하는 것은 진정 역사적 대업이고 사명이다. 문재인의 5년과 더불당이 다수당으로 국회를 농단한 8년 동안 우파들은 충분히 경험했다. 다시는 무도한 반 대한민국 세력이 정부와 국회를 장악하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국민적 합의는 이미 충분히 이루어졌다. 그러나 만에 하나 아직도 안일하고, 나약한 국가 정체성으로 대한민국 이념과 사상에 대해서 혼란스러운 사람들이 있다면 차제에 분명하고 확고한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갖도록 분발해야 할 것이다. 영화 ‘건국전쟁’을 봤다면 자유의 가치를 정말 귀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유의 소중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슬프고 안타깝다. 이번 4.10 총선에서 야당은 좌파시만단체와 협약을 맺어 그들에게 최소 10석의 비례대표 자리를 주기로 합의한 모양이다. 그들 대부분은 친북, 종북단체 출신들이며, 이념 측면에서 북한과 궤를 같이 하는 세력들이다. 따라서 이번 4.10 총선에서 야당을 많이 지지하게 되면, 극단적으로 친북, 간첩세력들이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다. 이는 정말 있어서는 안되는 대한민국 최악의 시나리오다. 1975년 4월 30일 월남은 공산화되었다. 당시 미군 철수 후 미군이 남기고 간 많은 최신 무기와 보급품, 병력에서도 월맹군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던 월남이 왜 공산화 되었을까? 당시 월남은 월맹에 비해 정신력에서 이미 패했다. 그리고 정부, 군, 정치판에 월맹의 간첩들이 요소요소에 포진해 있었다. 그것도 고위직에 자리했다고 하니 월남은 월맹의 손바닥 위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대한민국은 어떨까? 아마 지금의 대한민국도 그 당시의 월남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미 대한민국에도 북한 간첩이 35만이 침투해 있다는 소리가 탈북한 북한 고위인사들을 통해 공공연히 흘러나오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의 국민들은 사상이나 이념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침묵은 동조와 마찬가지다. 간첩들의 생각에 동조하는 이 나라의 미래는 어떠할까? 오늘은 3.1 독립운동 105주년 기념일이다. 그러나 독립운동 기념일행사를 할 정도로 나라의 상황이 여유롭지 않다. 해서 오늘 우리는 주사파와 친북세력들을 척결하기 위한 제2의 독립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여 4.10 총선에서 좌파세력들을 패퇴시킬 것을 천명한다. 여기에는 한 치의 머뭇거림도 있어서는 안 된다. 유관순 열사와 안중근 의사 등 위대한 선배들의 뒤를 이어 좌파세력을 척결하고, 자유우파세력 모두가 한 마음으로 4.10 총선 승리를 위해 진군하기를 간절히 촉구한다. 2024년 3월 1일 한국NGO연합/자유정의시민연합
    • 주요뉴스
    2024-03-02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원암 장영주 칼럼,대한민국과 대박민국 (하)
    우리가 인류와 세계에 이바지 할 사명은 옛 조선의 건극(建極)에 또렷이 실려 있다. 홍익인간의 조화와 상생의 밝은 마음씨를 수없이 양성하는 것이다. 깊고 오랜 가르침은 흥보, 놀보 이야기에도 은유적이지만 정교하게 심어져 내려오고 있다. 제비가 마음씨 착한 흥보에게 ‘박 씨’를 물어다 주고 비루했던 그의 삶이 소위 대박을 치는 단순한 줄거리이지만 언제나 가슴 설레는 이야기이다. ‘박’은 ‘밝음’을 의미한다. 제비가 물어다 준 ‘박 씨’는 ‘밝은 씨앗’으로 곧 사람의 양심의 상징이다. 국조 단군 왕검께서는 박달나무 아래에서 태어나셨다. 박달나무는 밝은 땅에서 자라는 나무이고 박달재는 밝은 땅의 언덕이다. 박혁거세는 밝고 빛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분으로 박 씨는 밝은 씨족이다. 착한 사람에게는 양심의 씨앗이 자리 잡아 성장하고 결국 그의 삶이 화엄장려하게 대박이 난다는 선조들의 지혜로운 예언이자 가르치심인 것이다. 흥보가 대박의 주인공이 되는 역전의 삶은 마치 무수한 질곡을 뚫고 세계 10위권에 도착한 지금 우리의 삶과 그 궤적을 같이 한다. 부산엑스포 유치를 위해 대통령 내외가 프랑스 파리를 방문하였다. ‘BUSAN’은 알파벳 속에 B(해운대 마천루)-U(광안대교)-S(해동 용궁사)-A(다이아몬드타워)-N(다대포 해수욕장)등을 내포하고 있다. 김건희 영부인의 가방에는 “부산은 준비되어 있습니다.(BUSAN is Ready)” 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대통령 또한 파리에서 부산 액스포 유치를 위해 영어로 연설을 하였다. 전문가들은 미국의회에서 영어로 연설 할 때보다 좀 더 영국발음에 근접했다고 한다. 장소가 유럽인 만큼 디테일까지 갈고 닦는 정성을 드린 것이다. 이는 결국 ”대한민국은 준비 되어 있습니다.(korear is Ready)" 라는 선언이다. 세계인의 가슴에 한국인의 밝은 미래를 향한 공생의 씨앗을 선물한 것이다. 국조 단군의 밝은 씨앗은 고구려로 이어진다. 고구려의 국시는 옛 조선의 정신과 땅을 ‘다물’려 받으려 했던 다물(多勿)이다. 을밀대를 세운 을밀선인은 ‘다물흥방가(多勿興邦歌)’가를 지어 국민들이 아침저녁으로 부르게 하였다. 가히 고구려의 애국가라고 할 수 있었다. 을밀은 재상 을소, 을파소의 후손이자 을지문덕의 선조이다. 다물흥방가의 몇 구절을 살펴본다. “지나간 것은 법(法)이 되고 뒤에 오는 것은 위(上)가 된다. 법은 나지도 죽지도 않고 위는 귀함도 천함도 없도다. 참 천명의 큼이여, 성품을 낳아 광명에 통하네. 집에서는 효도하고 나서면 충성함이라. 광명은 그래서 모든 선을 행하지 않음이 없고, 효와 충은 그래서 모든 악은 일체 짓지 않나니. 백성의 옳은 바는 나라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니 나라 없이 내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나라가 소중하기 때문에 백성은 사물이 있어 복을 누리고 내가 있기 때문에 나라엔 혼이 있어 덕을 누린다네. 태백의 가르침은 우리의 스승일세. 우리들 자손들은 그래서 더 평등하고, 우리들의 스승은 그래서 가르침마다 새롭다네.” 나라가 옛것과 새로운 것의 조화로 발전해가며 ‘효와 충과 도’가 삶의 스승인 법이 되어 누구나 평등하니 나날이 새롭다고 고구려의 온 백성이 노래한다. 그 정신과 에너지를 ‘다물’려 받아 고구려, 발해의 국혼이 된다. 그 혼은 온갖 고초를 겪어내며 마침내 대한민국을 열어 세계가 인정하는 선진국이 되었다. 국혼이란 문화력으로 소프트 파워의 근원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대통령의 파리에서의 외교성공에는 우리의 뛰어난 선진 기술력과 에스파, 조수미, 싸이의 세계적으로 검증된 스타들의 문화력이 뒷받침을 하고 있었다. 베트남 국빈방문에서도 국위를 크게 선양한 것 역시 세계를 뒤덮는 k-컬쳐의 힘이 바탕이 되고 있다. 영부인 김건희 여사는 미국의 아트넷뉴스과 대담을 한다. ”윤 대통령 취임 후 1년간 해외순방을 다니거나 해외인사들을 만나면 우리나라 문화·예술의 위상이 매우 높아졌음을 느낀다. 국가 간 갈등에는 예술, 문화가 그 해소에 큰 영향을 끼친다. 나는 k-컬쳐의 영업사원으로 대통령과 정부를 돕는 조력자의 역할에 충실 할 것이다.“ 최근 러시아는 푸틴의 우크라이나 전쟁과 바그너 그룹과의 내전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 심연으로 빠져 들고 있다. 21C 부터는 소트트 파워인 평화의 문화력이 아닌 총과 대포라는 살상의 하드 파워만을 신봉하는 철권통치자들과 그의 나라들은 녹아 무너져 내릴 것이다. 세상은 대포와 총의 하드파워의 두려움으로 움직이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결국은 무력으로 평정 된 땅보다 문화라는 소프트 파워에 물든 개개인의 가슴이 훨씬 더 넓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천우신조로 조성 된 한류라는 소프트 파워의 대박기운을 타고 한바탕 신명나게 놀아보자. 자유통일은 절로 이루어지고 우리는 기술대국, 수출대국, 문화대국, 교육대국, 철학대국이 되어 G-4, G-3, G-2국으로 상승 할 것이다. 미래의 대한민국은 반드시 대박민국이 될 것이다. (끝)
    • 오피니언
    2023-06-30
  • “한 위대한 한국인을 눈물로 추모하며⋯”
    “한 위대한 한국인을 눈물로 추모하며⋯” 수원 헤브론 교회 조정환 목사의 글 “한 위대한 한국인을 눈물로 추모합니다.”를 소개합니다. 지금부터 58년 전인 1965년 7월 19일 오전 0시 35분. 하와이의 한 노인 요양원에서 나이 아흔의 한국인 환자가 유명을 달리하였습니다. 서거하시기 한 달 전부터 피를 토했습니다. 그가 숨을 거두기 하루 전인 7월 18일엔 너무 많은 피를 토하셨습니다. 그의 생애 마지막 임종을 지켜보는 이는 평생동안 곁에서 돕고 수발하던 부인과 대라도 잇겠다며 들인 양자와 교민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마지막 호흡을 크게 한번 들이 쉬더니 이내 영면의 눈을 감았습니다. 파란만장한 길을 함께 걸어오며 어떤 어려움에도 우는 법이 없었던 아내가 오열했습니다. 작가 이동욱 씨는 국부 이승만의 영결식의 한 장면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한 미국인 친구가 울부짖었다. ‘내가 너를 알아! 내가 너를 알아! 네가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였는지! 그것 때문에 네가 얼마나 수많은 고통을 겪어 왔는지! 바로 잃어버린 조국, 빼앗긴 국토를 되찾으려는 그 애국심 때문에 네가 그토록 온갖 조소와 비난 받으며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 온 것을 내가 알아.’” 그 미국인은 장의사였습니다. 그는 1920년에 미국에서 일하다 죽은 중국인 노동자들의 유해를 중국으로 보내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승만이라는 중년의 조선인이 찾아와 중국인 유해를 안치할 그 관에 숨어 상하이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한국 독립운동을 하는데 일본이 자신을 현상수배 중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바로 조선인 이승만이었습니다. 이 이승만이 실제 관에 들어가 상하이 입국 밀항에 성공하였습니다. “너의 그 애국심 때문에 네가 얼마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또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비난을 받아 왔는지 나는 안다.”는 피를 토하듯한 절규! 이 절규는 그냥 넋두리로 푸념이 아니라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온 통한의 절규였습니다. 2019년 7월 15일 아침 서울 국립현충원. 이승만 초대 대통령 묘소를 찾았습니다. 나흘 뒤면 그의 50주기입니다. 필자 역시 이 대통령에 대해 부정적 얘기만 듣고 자랐습니다. 그의 생애 전체를 보고 머리를 숙이게 된 것은 쉰이 넘어서였습니다. 이날 아침 이 위대한 대통령 묘 앞에서 나는 “만약 우리 건국 대통령이 미국과 국제정치의 변동을 미리 내다보는 혜안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 자체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였기에 그만이 할 수 있는 건국이었기에 이 역사의 물음 앞에 나는 머리를 가로저으며 흐느끼고 말았습니다. 그 없이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그 없이 우리가 자유민주 진영에 서고, 그 없이 전쟁에서 나라를 지키고, 그 없이 한미동맹의 대전략이 가능했겠느냐?는 질문에 누가 “그렇다”고 답할 수 있을까요? 추모비에 적힌 지주 철폐, 교육 진흥, 제도 신설 등 지금 우리가 디디고 서 있는 바탕이 그의 혜안에서 나왔습니다. 원자력 발전조차 그에 의해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그는 무지몽매한 나라에 태어났으나 그렇게 살기를 거부했습니다. 열아홉에 배재학당에 들어가 외국인들의 눈을 통해 나라밖 신세계를 처음으로 접했습니다. 썩은 조정을 언론으로 개혁해보려다 사형선고까지 받았습니다. 그러한 상황의 감옥에서 낮에는 심문을 당하고, 밤에는 영어사전을 만들었습니다. 이 대통령은 독립하는 길은 미국을 통하는 길밖에 없다고 믿었기에 1905년나이 서른에 조지워싱턴 대학에 입학하고, 하바드를 거쳐 프린스턴대에서 국제정치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41년, 미국에서 ‘JAPAN INSIDE OUT(일본의 가면을 벗긴다)’을 펴냈습니다. 그 책에서 그는 “일본이 반드시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고 역설했습니다. 책이 나온 지 넉 달 뒤 일본이 추측이 아닌 실제로 진주만을 폭격했습니다. 미국 정치인들은 한국인 이승만을 놀란 눈으로 새롭게 보았습니다. 이 대통령은 1954년 이 책의 한국어판 서문을 이렇게 썼습니다. “일본인은 옛 버릇대로 밖으로는 웃고, 내심으로는 악의를 품어서 교활한 외교로 세계를 속이는 그러면서도 조금도 후회하거나 사죄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을 뿐더러 … 미국인들은 지금도 이를 알지 못하고 일인들의 아첨을 좋아하며 뇌물에 속아 일본의 재무장과 재확장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데도 … 심지어는 우리에게 일본과 친선을 권고하고 있으니 …” 이 대통령은 한국어판 서문에서 “우리는 미국이 어찌하든지 간에 우리 백성이 다 죽어 없어질지언정 노예만은 되지 않겠다는 각오로 합심하여 국토를 지키면 하늘이 우리를 도울 것이다.”라고 머릿말을 맺었습니다. 뱁새가 봉황의 높은 뜻을 어찌 알리요마는 관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반일로 살아온 그를 친일이라고 하고, 평생 용미한 것을 친미라고 하는 것은 사실을 너무 모르거나 알면서도 매도하는 것입니다.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는 “어지러운 구한말 모두 중·일·러만 쳐다보고 있을 때 청년 이승만은 수평선 너머의 미국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를 19세기 한국의 콜럼버스라고 부른다. 우리 수천년 역사에 오늘날 번영은 오로지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 박사의 공로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국민은 이 위대한 지도자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했습니다. 거인이 이룬 공은 외면하고 왜곡하며, 과만 파헤치는 일들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건국 대통령의 50주기를 쓸쓸히 보내며, 그에게 감사할 줄 모르는 우리의 자해와 업을 생각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리에서 미 하와이로 물러난 후 한 겨울에 난방할 땔감도 없었습니다. 하와이에선 교포가 내준 30평짜리 낡은 집에서 궁핍하게 살았습니다.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친정에서 옷가지를 보내줄 때 포장한 종이박스를 옷장으로 썼습니다. 교포들이 조금씩 보내준 돈으로 연명하며 고국행 여비를 모은다고 5달러 이발비를 아꼈습니다. 늙은 부부는 손바닥만한 식탁에 마주 앉아 한국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5년이 흘렀습니다. 이 대통령이 우리 음식을 그리워하자 부인이 서툰 우리말로 노래를 만들어 불러줬다고 합니다. 이 대통령도 따라 불렀던 그 노래를 이동욱 작가가 전합니다. "날마다 날마다 김치찌게 김칫국 날마다 날마다 콩나물국 콩나물 날마다 날마다 두부찌게 두부국 날마다 날마다 된장찌게 된장국" 아무도 없이 적막한 그의 묘 앞에 서서 이 노래를 생각하니 목이 메인다. 이 나라는 반만년 역사 동안 적게는 900회, 많게는 1300여회 크고 작은 외침을 받았습니다. 1910년에는 민족 국가로서 조선이 세계 지도에서 사라졌습니다. 세계 2차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의 도움으로 36년만에 일제에서 해방되었으나, 남북으로 분단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남쪽에는 대한민국이 건국되었습니다. 그후 중공의 모택동과 구 소련의 스탈린의 지원 아래 북조선의 김일성이 일으킨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을 통해 온 나라가 황폐해졌으며, 세계에서 두 번째로 못 사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한미동맹으로 지금까지 단 한번도 전쟁이 없었습니다. 2차세계대전 이후 탄생한 100여개 신생 독립국 중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했습니다. 한강의 기적을 통하여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으로 우뚝 올라 설 수 있었습니다. 지금 이 나라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 나라를 세우지 않았다면 우리는 북조선의 돼지 3부자를 ‘어버이 수령님’으로 부르며, 개돼지처럼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국부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혜안을 지닌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이런 그를 누가 친일파로 매도하며, 친미주의자로 선전선동하는 것입니까? 이승만 대통령을 향해 친일파 또는 친미주의자라고 하는 자들을 어떻게 불러야 하겠습니까?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한미동맹, 기독교 입국론’이라는 4대 건국 이념으로 건국하신 선지자요, 국부이신 이승만 대통령께 감사드립니다. 수원 헤브론 교회 조정환 목사의 글 “한 위대한 한국인을 눈물로 추모합니다.”를 소개합니다. 지금부터 58년 전인 1965년 7월 19일 오전 0시 35분. 하와이의 한 노인 요양원에서 나이 아흔의 한국인 환자가 유명을 달리하였습니다. 서거하시기 한 달 전부터 피를 토했습니다. 그가 숨을 거두기 하루 전인 7월 18일엔 너무 많은 피를 토하셨습니다. 그의 생애 마지막 임종을 지켜보는 이는 평생동안 곁에서 돕고 수발하던 부인과 대라도 잇겠다며 들인 양자와 교민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마지막 호흡을 크게 한번 들이 쉬더니 이내 영면의 눈을 감았습니다. 파란만장한 길을 함께 걸어오며 어떤 어려움에도 우는 법이 없었던 아내가 오열했습니다. 작가 이동욱 씨는 국부 이승만의 영결식의 한 장면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한 미국인 친구가 울부짖었다. ‘내가 너를 알아! 내가 너를 알아! 네가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였는지! 그것 때문에 네가 얼마나 수많은 고통을 겪어 왔는지! 바로 잃어버린 조국, 빼앗긴 국토를 되찾으려는 그 애국심 때문에 네가 그토록 온갖 조소와 비난 받으며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 온 것을 내가 알아.’” 그 미국인은 장의사였습니다. 그는 1920년에 미국에서 일하다 죽은 중국인 노동자들의 유해를 중국으로 보내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승만이라는 중년의 조선인이 찾아와 중국인 유해를 안치할 그 관에 숨어 상하이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한국 독립운동을 하는데 일본이 자신을 현상수배 중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바로 조선인 이승만이었습니다. 이 이승만이 실제 관에 들어가 상하이 입국 밀항에 성공하였습니다. “너의 그 애국심 때문에 네가 얼마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또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비난을 받아 왔는지 나는 안다.”는 피를 토하듯한 절규! 이 절규는 그냥 넋두리로 푸념이 아니라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온 통한의 절규였습니다. 2019년 7월 15일 아침 서울 국립현충원. 이승만 초대 대통령 묘소를 찾았습니다. 나흘 뒤면 그의 50주기입니다. 필자 역시 이 대통령에 대해 부정적 얘기만 듣고 자랐습니다. 그의 생애 전체를 보고 머리를 숙이게 된 것은 쉰이 넘어서였습니다. 이날 아침 이 위대한 대통령 묘 앞에서 나는 “만약 우리 건국 대통령이 미국과 국제정치의 변동을 미리 내다보는 혜안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 자체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였기에 그만이 할 수 있는 건국이었기에 이 역사의 물음 앞에 나는 머리를 가로저으며 흐느끼고 말았습니다. 그 없이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그 없이 우리가 자유민주 진영에 서고, 그 없이 전쟁에서 나라를 지키고, 그 없이 한미동맹의 대전략이 가능했겠느냐?는 질문에 누가 “그렇다”고 답할 수 있을까요? 추모비에 적힌 지주 철폐, 교육 진흥, 제도 신설 등 지금 우리가 디디고 서 있는 바탕이 그의 혜안에서 나왔습니다. 원자력 발전조차 그에 의해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그는 무지몽매한 나라에 태어났으나 그렇게 살기를 거부했습니다. 열아홉에 배재학당에 들어가 외국인들의 눈을 통해 나라밖 신세계를 처음으로 접했습니다. 썩은 조정을 언론으로 개혁해보려다 사형선고까지 받았습니다. 그러한 상황의 감옥에서 낮에는 심문을 당하고, 밤에는 영어사전을 만들었습니다. 이 대통령은 독립하는 길은 미국을 통하는 길밖에 없다고 믿었기에 1905년나이 서른에 조지워싱턴 대학에 입학하고, 하바드를 거쳐 프린스턴대에서 국제정치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41년, 미국에서 ‘JAPAN INSIDE OUT(일본의 가면을 벗긴다)’을 펴냈습니다. 그 책에서 그는 “일본이 반드시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고 역설했습니다. 책이 나온 지 넉 달 뒤 일본이 추측이 아닌 실제로 진주만을 폭격했습니다. 미국 정치인들은 한국인 이승만을 놀란 눈으로 새롭게 보았습니다. 이 대통령은 1954년 이 책의 한국어판 서문을 이렇게 썼습니다. “일본인은 옛 버릇대로 밖으로는 웃고, 내심으로는 악의를 품어서 교활한 외교로 세계를 속이는 그러면서도 조금도 후회하거나 사죄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을 뿐더러 … 미국인들은 지금도 이를 알지 못하고 일인들의 아첨을 좋아하며 뇌물에 속아 일본의 재무장과 재확장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데도 … 심지어는 우리에게 일본과 친선을 권고하고 있으니 …” 이 대통령은 한국어판 서문에서 “우리는 미국이 어찌하든지 간에 우리 백성이 다 죽어 없어질지언정 노예만은 되지 않겠다는 각오로 합심하여 국토를 지키면 하늘이 우리를 도울 것이다.”라고 머릿말을 맺었습니다. 뱁새가 봉황의 높은 뜻을 어찌 알리요마는 관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반일로 살아온 그를 친일이라고 하고, 평생 용미한 것을 친미라고 하는 것은 사실을 너무 모르거나 알면서도 매도하는 것입니다.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는 “어지러운 구한말 모두 중·일·러만 쳐다보고 있을 때 청년 이승만은 수평선 너머의 미국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를 19세기 한국의 콜럼버스라고 부른다. 우리 수천년 역사에 오늘날 번영은 오로지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 박사의 공로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국민은 이 위대한 지도자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했습니다. 거인이 이룬 공은 외면하고 왜곡하며, 과만 파헤치는 일들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건국 대통령의 50주기를 쓸쓸히 보내며, 그에게 감사할 줄 모르는 우리의 자해와 업을 생각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리에서 미 하와이로 물러난 후 한 겨울에 난방할 땔감도 없었습니다. 하와이에선 교포가 내준 30평짜리 낡은 집에서 궁핍하게 살았습니다.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친정에서 옷가지를 보내줄 때 포장한 종이박스를 옷장으로 썼습니다. 교포들이 조금씩 보내준 돈으로 연명하며 고국행 여비를 모은다고 5달러 이발비를 아꼈습니다. 늙은 부부는 손바닥만한 식탁에 마주 앉아 한국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5년이 흘렀습니다. 이 대통령이 우리 음식을 그리워하자 부인이 서툰 우리말로 노래를 만들어 불러줬다고 합니다. 이 대통령도 따라 불렀던 그 노래를 이동욱 작가가 전합니다. "날마다 날마다 김치찌게 김칫국 날마다 날마다 콩나물국 콩나물 날마다 날마다 두부찌게 두부국 날마다 날마다 된장찌게 된장국" 아무도 없이 적막한 그의 묘 앞에 서서 이 노래를 생각하니 목이 메인다. 이 나라는 반만년 역사 동안 적게는 900회, 많게는 1300여회 크고 작은 외침을 받았습니다. 1910년에는 민족 국가로서 조선이 세계 지도에서 사라졌습니다. 세계 2차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의 도움으로 36년만에 일제에서 해방되었으나, 남북으로 분단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남쪽에는 대한민국이 건국되었습니다. 그후 중공의 모택동과 구 소련의 스탈린의 지원 아래 북조선의 김일성이 일으킨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을 통해 온 나라가 황폐해졌으며, 세계에서 두 번째로 못 사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한미동맹으로 지금까지 단 한번도 전쟁이 없었습니다. 2차세계대전 이후 탄생한 100여개 신생 독립국 중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했습니다. 한강의 기적을 통하여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으로 우뚝 올라 설 수 있었습니다. 지금 이 나라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 나라를 세우지 않았다면 우리는 북조선의 돼지 3부자를 ‘어버이 수령님’으로 부르며, 개돼지처럼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국부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혜안을 지닌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이런 그를 누가 친일파로 매도하며, 친미주의자로 선전선동하는 것입니까? 이승만 대통령을 향해 친일파 또는 친미주의자라고 하는 자들을 어떻게 불러야 하겠습니까?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한미동맹, 기독교 입국론’이라는 4대 건국 이념으로 건국하신 선지자요, 국부이신 이승만 대통령께 감사드립니다.
    • 주요뉴스
    2023-06-29
  • 최만순의 약선요리,"장마철 습기를 제거하는 차"
    최만순의 약선요리 양생에선 모든 음식재료의 성질을 알아야한다. 무엇이 따뜻하다 하고 무엇을 차다고 할까? 예를 들면 꿀이나 소주, 대추 같은 것은 얼음과 함께 먹어도 속이 덥다. 체온을 돋운다. 배나 수박은 데워서 먹어도 속을 식히고 설사가 나기 쉽다. 이것으로서 꿀이나 소주, 대추는 따뜻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배나 수박은 찬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앞의 것은 재료의 성질이 양(陽)이다. 뒤의 것은 재료의 성질이 음(陰)이다. 이것이 약성(藥性)인 것이다. 또 매운맛은 양(陽)이오 쓴맛은 음(陰)이다. 매운맛은 맛이 짙고 극렬하며 자극성, 흥분성, 방향성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재료는 고추, 후추, 겨자, 마늘 같은 것이다. 이런 종류를 지나치게 많이 먹어보자. 그 자리에서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땀이 난다. 누구나 한번쯤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양성(陽性)인 것이다. 반대로 쓴맛을 가진 재료는 음성(陰性)이다. 씀바귀, 단너삼, 익모초 같은 종류다. 이런 쓴 것을 먹어 보자. 쓴 맛은 상을 찡그리며 자꾸 침을 삼킨다. 그리고 속히 아래로 내려 보내려고 한다. 그러므로 땀을 내는 약이나 흥분제 등은 매운맛이 안 끼는 법이 없다. 반대로 설사약이나 안정제 등은 반드시 쓴맛을 쓰게 된다. 그렇지만 천연의 약재 식재는 한 가지의 성질만 가진 것이 아니다. 여러 가지 성질을 한꺼번에 가진 것이 많다. 그 복잡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이와 같이 복잡한 것이 약과 모든 식재료이다. 모든 유기성 재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복잡한 것에 약재의 가치가 있다. 아울러 불가사의한 효력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학에는 재료에서 유효한 한두 가지 성분만을 추출해서 쓰려고 한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고집하는 일이 많이 있다. 분석은 종합을 전제로 한 분석이라야 한다. 분석과학 시대인 현대에는 분석 그 자체만을 위한 것이 되고 마는 경우가 있다. 분석은 종합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일이다. 가령 인삼 속에는 여러 가지 성분이 있다. 그 중에는 혈액 순환과 호흡 작용, 소화 작용, 생식 기능을 돕는 것도 있다고 추축한다. 분석은 심장이면 심장, 위면 위, 한 장기에만 유효한 성분을 추출해서 말한다. 이런 것으론 인삼의 작용과 효과를 논할 수는 도저히 없다. 현대분석에선 그 밖에 다른 유효성분이 없다고 잘라 말하지 않는다. 찾아가는 중이다. 그러나 있다고 한다면 그로 인한 효과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아직까지는 양생의 기미론(氣味論)에 의하여 종합적인 효과를 논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장마철 습기를 제거하는 차 △효능-장마철 인체에 쌓이는 습기로 인하여 걸리기 쉬운 요통과 관절통을 예방하는데 도움이 된다. △재료- 감초10g, 두충10g, 꿀 △만드는 법 : 손질한 약재를 돌솥에 넣고 1시간 끓여서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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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29
  • [데스크칼럼],"바그너 그룹의 러시아 공격, 세계정세에 미치는 영향"
    러시아의 용병 집단 바그너 그룹이 지난 2일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 있는 푸틴 대통령의 집무실을 공격한 사건이 세계정세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바그너 그룹은 푸틴 대통령의 측근인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이끌고 있는 용병 집단으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공격으로 푸틴 대통령은 부상을 입지 않았지만, 그의 측근 몇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은 푸틴 정권에 대한 큰 타격이 될 수 있다. 푸틴 대통령은 이번 공격이 바그너 그룹의 독자적인 행동이라고 주장했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이 공격이 푸틴 대통령에 대한 반란의 신호탄이라고 보고 있다. 실제로 바그너 그룹은 푸틴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불만을 품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바그너 그룹은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많은 사상자를 내었고, 이로 인해 많은 용병들이 부상이나 사망했다. 또한, 바그너 그룹은 우크라이나에서 많은 돈을 벌지 못했다고 불만을 품고 있다. 바그너 그룹의 공격은 푸틴 정권의 권력 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다. 바그너 그룹은 푸틴 대통령의 측근을 공격함으로써 푸틴 대통령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다. 또한, 바그너 그룹의 공격은 러시아 국민들에게 푸틴 대통령의 정권에 대한 불만을 키울 수 있다. 바그너 그룹의 공격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바그너 그룹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군을 지원해 왔다. 그러나 바그너 그룹의 공격으로 인해 러시아군의 사기와 전투력이 떨어질 수 있다. 또한, 바그너 그룹의 공격으로 인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평화 협상이 어려워질 수 있다. 바그너 그룹의 공격은 푸틴 정권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바그너 그룹의 공격은 푸틴 정권의 권력 기반을 약화시키고,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또한, 바그너 그룹의 공격은 세계정세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바그너 그룹은 러시아의 우방국인 러시아가 아니라 러시아에 공격을 가했다. 이는 러시아의 정권이 불안정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러시아의 정권이 불안정해지면, 러시아의 우방국인 중국과 이란도 불안정해질 수 있다. 이는 세계정세에 큰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세계언론들의 칼럼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전문가들의 견해를 정리해 보니, 다음과 같은 전망이 나왔다. ■바그너 그룹의 공격은 푸틴 정권에 대한 큰 타격이 될 수 있다. ■바그너 그룹의 공격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바그너 그룹의 공격은 세계정세에 큰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향후 러시아 정권과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세계정세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귀추가 주목된다.
    • 주요뉴스
    2023-06-29
  • [뉴스워크] 6월27일(화) “이승만은 선지자였을까? 날강도였을까?”
    이승만은 30살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5년만에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승만은 수십년동안 미국의 정치인, 외교관, 언론인, 군인들을 만나 한결같은 주장을 늘어 놓았습니다. 그 내용으로 강연회에서 연설하고, 그 내용으로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의 제목은 〈JAPAN INSIDE OUT〉 이었으며, 일본의 속내를 폭로한 것입니다. 내용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일본이 조선반도를 집어 삼켰으니, 그 다음은 만주를 먹고, 중국을 침략하고, 여러 나라를 침략하고나서 그리고는 태평양을 건너 미국을 쳐들어 올 것이다. 미국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일본과 한판 승부를 벌여야 할 것이다. 일본의 팽창을 막고, 일본을 다시 일본 본토로 돌아 가게 하려면 조선을 독립 시켜라!” 그러자 미국 학자들과 정치인들은 아무도 귀기울여 주지 않았습니다. 당시 일본과 미국은 좋은 관계였고, 그 넓은 태평양을 넘어 일본이 공격하리라고는 꿈도 꿀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JAPAN INSIDE OUT〉이 출간된 지 반년이 못 되어서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공습이 터졌습니다. 이승만의 책 〈JAPAN INSIDE OUT〉은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미국의 학자들은 ‘수십년에 걸쳐 일본의 침략을 예언한 인물을 못 알아 보았구나…’라며 스스로를 부끄러워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승만을 하나님이 그 시대에 세운 선지자로 알고 존경했습니다. 그후 태평양전쟁에서 이승만의 절친 더글라스 맥아더가 지휘하는 미군은 일본을 몰아 냈고, 일본은 패망했으며, 우리나라는 크게 피흘리는 전쟁 없이 독립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승만은 건국 대통령이 되었으나 1950년 6월 25일, 중국 조선족 부대를 앞세운 북한 인민군의 남침으로 발발한 민족의 비극 6·25가 발생했습니다. 3년간의 혈전 끝에 휴전협정이 맺어지려 할 때 이승만은 휴전을 반대했고 북진 통일을 외쳤습니다. 미군도 소모전에 지쳐 갔고, 미국 내 여론도 휴전 쪽으로 방향이 정해졌을 때 유독 이승만은 휴전을 반대했습니다. 결국 이승만이 내놓은 휴전의 조건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이었습니다. 1953년 10월 1일 조인되었으며, 1954년 11월 18일 발효되었습니다. 미국 앞에 이승만은 거의 날강도였습니다. 거제도 반공포로를 석방시킨 사건을 듣고 맥아더는 친구 이승만을 “오 ~ 나의 십자가”라고 불렀습니다. 이승만이 내놓은 휴전 조건을 볼 것 같으면, “미국아 ~ 6·25전쟁 휴전을 할려면…, 첫째로, ‘경제 지원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당시 한국의 1년 수출액의 34배나 되는 돈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전쟁 후 잿더미 위에서 굶어 죽지 않고 다시 나라를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둘째로, “in and around Korea에 미군을 주둔시킨다고 약속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까지 미군이 이 나라 지켜 주고 있습니다. 한반도에 미군 주둔은 북한 인민군 복무 기간이 10년에 비해, 내 아들 군 복무 기간 1년 6개월! 이를 가능케 했고, 한국 경제발전의 기본 바탕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승만은 고약한 코미디언이었습니다. 셋째로, “너희 미국이 침략을 받으면 그때는 우리가 가서 싸워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당시 태평양 건너 갈 배 한 척도 없는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도와 준다는 것입니까? 태평양을 헤엄쳐 건너 가서? ㅎㅎㅎ 이렇게 미국과 한국 사이에 “상호방위 조약을 맺자. 상호 조약이니까 평등한 조약 맞지? 여기 싸인 하셔”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의 핵심입니다. 미국이 외국에게 당한 최초이자 마지막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이 약속을 해주면 휴전할 때 내가 큰 인심 써서 입 다물고 있을게!” 우리나라 건국 대통령 이승만은 그렇게도 못된 사람이었습니다. 평생의 친구 맥아더 뒤통수 치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참전해서 3만 6천명이 죽은 미군! 그 미국에게 더 내놓으라고 말하는 뻔뻔스런 이 나라의 건국의 아버지였습니다! 당시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후에 말하기를 “이승만 그 날강도에 또 당했어! 도대체 한국이 무슨 힘이 있다고 미국에 전쟁 나면 한국이 도와줄 테니 한반도에 전쟁 나면 한국 병력의 9배 이상을 의무적으로 보내야 하는 거야? 또 인계철선은 뭐야? 우리 청년들을 북한이 내려 오는 길목에 박아 놓고 공격 받으면 미국이 자동 참전해야 된다니! 그리고 한국이 제자리 잡을 때까지 한국 국방비를 미국이 전액 대라는데 아무리 스탈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무슨 이런 조약에 사인을 하고 온 거야?” ㅎㅎㅎ 이쯤되면 이승만은 날강도였습니다. 인정! 이 나라는 반만년 역사 동안 적게는 900회, 많게는 1300여회 크고 작은 외침을 받았습니다. 1910년에는 민족 국가로서 조선이 세계 지도에서 사라졌습니다. 세계 2차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의 도움으로 36년만에 일제에서 해방되었으나, 남북으로 분단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남쪽에는 대한민국이 건국되었습니다. 그후 중공의 모택동과 구 소련의 스탈린의 지원 아래 북조선의 김일성이 일으킨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을 통해 온 나라가 피폐해졌으며, 세계에서 두 번째로 못 사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한미동맹으로 지금까지 단 한번도 전쟁이 없었습니다. 2차세계대전 이후 탄생한 100여개 신생 독립국 중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했습니다. 한강의 기적을 통하여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으로 우뚝 올라 설 수 있었습니다. 국부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게는 날강도였는지 모르겠지만, 대한민국으로서는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혜안을 지닌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이런 이승만 대통령을 향해 친일파 또는 친미주의자라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지금 이 나라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 나라를 세우지 않았다면 우리는 북조선의 돼지 3부자를 ‘어버이 수령님’으로 부르며, 개돼지처럼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한미동맹, 기독교 입국론’이라는 4대 건국 이념으로 건국하신 선지자요, 국부이신 이승만 대통령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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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28
  • [뉴스워크] 6월26일(월) “이승만! 그는 누구인가?”
    지금으로부터 약 73년 전인 1948년 8월 15일, 제헌 헌법(7월 17일)과 함께 출항을 시작한 대한민국호의 첫번째 선장은 바로 우남 이승만 대통령입니다. 그는 애국심과 민주주의 정신을 가진 독실한 기독교인이라고 표현할 수 있으며, 그의 삶에 잘못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대한제국이 아닌 대한민국의 탄생에 앞장섰고, 일평생 기독교인으로 살았습니다. 첫째로, 출생과 성장 배경에 대해 살펴 보겠습니다. 그는 1875년 3월 26일(음력 2월 19일)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에서 아버지 이경선(1839~1913년)과 어머니 김해 김씨 김말란(1833~1896년)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손 위의 두 형이 그의 출생 전에 사망했으며, 사실상 6대 독자였습니다. 아버지 이경선은 조선왕조의 후예인 전주 이씨 가문으로 태종의 장남이며, 세종의 형인 양녕대군의 다섯째 아들 장평정 이흔의 15대손입니다. 즉 태조 이성계의 18대손입니다. 양녕대군은 세자 책봉을 받았지만 왕의 자리를 동생인 세종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선조가 동생에게 상속권을 넘겨 주지 않았다면, 양녕대군의 16대손이었던 이승만은 그때 고종(1852 ~ 1919년)의 위치에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5대조부터 벼슬길이 끊겨 이미 몰락한 집안이었습니다. 부친 이경선은 과거에 낙방해 특별한 직업 없이 살아갔으며, 왕족의 후예로 이승만을 유교 정신에 충실한 선비로 키우고자 했습니다. 모친은 독실한 불교 신자였는데 모친이 절에서 제사를 지내고 용꿈을 꾼 이후 이름을 승룡(承龍)이라고 했는데, ‘늦게 왕이 될’ 사주라 하여 그의 부모가 이름을 승만(승晩)으로 개명시켰습니다. 3살 때 1877년에 아들의 교육을 위해 모친의 결정으로 한성부 남대문 밖 우수현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자랐습니다. 이승만의 호 ‘우남’은 ‘우수현의 남쪽’이라는 뜻입니다. 이승만은 어린 시절부터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생일마다 모친과 함께 사찰에 가서 복과 장수를 기원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입신양명을 위한 한학 공부에 몰두했습니다. 양반으로서 몰락한 가문의 위신을 다시 세우는 길은 오직 과거 급제뿐이었습니다. 이에 서당 훈장의 딸이었던 모친은 이승만에게 천자문을 가르쳤고, 모친의 열정적인 교육열로 인해 6살에 천자문을 암기했습니다. 그는 1887년경 과거에 도전할 때까지 몰락한 가문을 살리기 위해 한학 공부에 열중했으나 그의 목표는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1887년부터 시작한 그의 노력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사실상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해오던 한학 공부는 출세의 수단이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하나의 목표를 위해 정진해온 사람에게 목표의 상실이 얼마나 큰 실망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실망은 더 큰 전환을 위한 새로운 기회였습니다. 그로 인해 그가 기독교 학교인 배재학당에 다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갑신정변에 가담하여 사형수로 한성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한학에 천착했던 이승만은 사실 구시대의 사고와 정신에 갇혔던 인물이었으나 서방 정신을 배울 기회가 생겼는데, 바로 서당에서 함께 공부하던 신긍우가 배재학당을 소개해 주었던 것입니다. 배재학당은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선교사가 1886년에 설립했고, 이후 관직의 등용문이 되곤 했습니다. 정부는 배재학당 졸업생과 재학생을 시험 없이 관료로 임명했기 때문에 갑오개혁으로 인해 관직의 길이 막혔던 양반들에게는 막힌 창문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에 이승만도 1895년에 배재학당의 영어과에 입학했습니다. 영어를 배워서 출세의 도구로 활용하려는 심산이었습니다. 그러나 배재학당의 교육에는 서방의 역사를 비롯한 정치제도 등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것은 그의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 매개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그는 배재학당에서 정치적 자유와 평등을 공부하며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조선왕조라는 정치 체제 속에서 개인은 왕조의 절대적 통치의 대상일 뿐이었고, 정치적으로 개인을 보호할 법적 체계는 전혀 없었습니다. 배재학당에서 이승만에게 민주정신을 불어넣어 준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은 바로 서재필이었습니다. 그는 1884년 갑신정변의 중심인물로 미국에 망명한 뒤 미국 국적을 취득하고, 의사가 되었습니다. 이후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개화파가 중심이 되어 갑오개혁이 이루어지자 1895년에 미국인 신분으로 귀국해 조선의 개혁을 위해서 활동했습니다. 이때 그가 활동했던 장소 중 한 곳이 바로 배재학당이었습니다. 서재필은 1896년 5월부터 배재학당에서 1년간 강의를 했습니다. 그는 이때 학생들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쳤는데, 서재필이 가르친 민주주의의 실천 방식인 토론과 다수결의 법칙은 당시 학생들에게는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배재학당 학생들은 서재필이 1896년 7월 2일에 설립한 독립협회와 유사한 협성회를 만들었습니다.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관민공동회가 대중적 토론의 장이었던 것과 같이, 협성회도 회원들이 모여서 민족주의, 민주주의, 사회개혁 등의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하는 모임이었습니다. 이승만은 협성회의 초대 맴버 13인 중 한 사람이었고, 후에 회장으로 활동했습니다. 배재학당을 통한 이승만의 내적 변화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상투를 제거한 것입니다. 1895년 12월 단발령이 시행되었을 때, 이승만은 조선의 오랜 전통으로 자리 잡고 있던 상투를 잘라 버렸습니다. 이런 행위는 그가 조선이라는 구시대에 갇힌 봉건적 인물이 아니라, 근대정신을 가지고 민주정신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인물로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위였습니다. 그의 내면에 분명해진 독립정신과 민주정신을 확산시키기 위한 도구는 신문이었습니다. 1898년 1월, 그를 포함한 배재학당의 협성회 회원들이 <협성회회보>를 창간했습니다. 그는 협성회보의 주필로 활동하며, 주간 신문인 <협성회회보>를 일간 신문으로 확대했습니다. 또 <매일신문>을 창간했으며, <제국신문>의 창간에도 동참했습니다. 이 신문들은 그가 배재학당에서 배운 민주정신과 독립정신을 확산시키는 하나의 도구였습니다. 그는 독립협회에도 참여했습니다. 수구세력과 충돌은 있었지만, 대중의 지지를 받는 이승만 등 독립협회 회원들은 수구세력의 회유 대상이 되었습니다. 1898년 11월 19일, 이승만을 비롯한 독립협회 회원 17명은 중추원 의관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때 이승만은 박영효를 중추원 의장으로 추천합니다. 당시 박영효는 갑신정변을 통해 새로운 내각을 수립할 계획을 세웠는데, 이승만은 여기에 가담했습니다. 그 결과 1899년 1월 5일에 이승만은 중추원 의관에서 해임당했고, 박영효의 쿠테타 음모가 발각되어 그해 1월 9일에 경무청에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이승만은 투옥된 지 20일 후인 1월 30일에 감옥으로 반입된 권총을 가지고 최정식, 서상대와 함께 탈옥했습니다. 그는 감리교 선교부로 도망쳤지만, 곧 다시 체포되었고, 탈옥을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사형수로 한성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는 그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었습니다. 같이 탈옥을 시도했던 최정식과 서상대는 사형을 당했습니다. 10kg의 칼을 목에 쓰고, 고문의 후유증 속에서 사형을 기다리는 이승만에게 일상적 평안은 거리가 멀었습니다. 죽음이 목전에 다가온 사람은 죽음 이후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죽음의 위기가 인간을 종교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승만 역시 삶과 죽음의 실존적 위기 속에서 죽음 이후를 생각했습니다. 그는 한성 감옥에서 선교사를 통해 영어로 된 신약성경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성경은 죽음을 기다리는 그의 유일한 친구이자, 신앙인으로서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으며 배재학당에서 들은 설교를 기억했고, 자연스럽게 설교 때 배운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단순했습니다. 먼저 자신의 영혼 구원을 위해, 그 다음은 나라의 구원을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감옥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찾자 그의 마음에는 기쁨과 평화가 임했습니다. 불교와 유교의 전통에 있던 그가 기독교 신앙체험을 한 것이었습니다. 이승만 역시 죽음의 고통을 느끼던 때 경험했던 신앙체험을 주변 수감자들에게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40명이 넘는 수감자들이 개종했습니다. 여기에는 이상재, 이원긍 등의 양반도 포함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이승만은 감옥에서 의미 있는 삶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감옥에서 학교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깊은 신앙체험을 통해 인간 영혼의 소중함을 깨달은 그는 수감자들을 교화할 필요성을 느꼈고, 영어, 일어, 문법, 산수, 한자, 성경, 기도 등을 가르치는 감옥 학교를 열었습니다. 또한, 선교사들이 감옥에 반입해주는 서적들로 옥중 도서관을 만들었는데, 감옥 서장이었던 김영선은 이승만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습니다. 도서관의 책은 주로 기독교 서적이었고, 당시 선교사들이 발행하던 《그리스도신문》, 《신학월보》도 있었습니다. 이승만의 기독교 신앙체험과 개종이 중요한 이유는 그의 정치사상과 기독교가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배재학당을 통해 민주정신을 배웠고, 독립을 위한 자주 의식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면서 인간이 바른 의식을 갖게 하는 것이 기독교이고, 기독교가 바로 나라의 근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성 감옥은 그의 정치관과 신앙관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셋째로, 출소 후 미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총신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정성구 박사님은 칼럼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승만 청년이 한성 감옥에 6년 가까이 있다가 출소하자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30세에 미국 유학을 가게 됩니다. 그때 이승만은 워싱턴DC에 있는 정통 장로교회인 언약교회(Church of Covenant)에 출석하면서 조지워싱턴대학(George Washington University)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그 언약교회의 담임목사는 헴린(Tuenis S. Hamlin)이었고, 그는 하버드대학교(Harvard University)의 이사장이자, 조지워싱턴대학의 이사였습니다. 그래서 헴린 목사는 1900년대 초에 미국 교회의 대지도자로서 이승만을 신앙적으로 알뜰히 보살폈습니다. 이승만은 헴린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그의 신앙적 사상적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후 이승만은 박사학위를 위해서 프린스턴대학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이승만은 처음부터 정치외교학을 공부한 것은 아니고, 1년 동안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 당시 프린스턴신학교의 분위기는 철저한 칼빈주의 신학과 세계관이 지배적이었습니다. 1898년 프린스턴신학교의 교장인 B.B. 워필드(B.B. Warfield) 박사는 화란의 위대한 칼빈주의 신학자요, 대 정치가요, 저널리스트인 아브라함 카이퍼(Abrah a m Kuyper. 1837-1920) 박사를 초청해서 ‘칼빈주의 강연’을 함으로 프린스턴신학교가 칼빈주의 사상이 대세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 이승만은 1년간 신학 공부를 했습니다. 특히 카이퍼의 칼빈주의 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특히 이승만은 워필드의 대를 이은 페톤(Paton) 교장 아래에서 헬라어, 라틴어, 철학을 공부했고, 어드만(Prof, Eerdman) 교수 아래에서 ‘바울 서신연구’를 했고, 그린(Prof. Greene) 교수로부터 기독교 변증학을 배웠습니다. 그 당시 프린스턴 신학교는 위대한 칼빈주의자 월필드(B.B. Warfield) 박사와 칼빈주의 성경신학자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 박사의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승만은 워싱턴의 카버난트 교회의 헴린 목사로부터 정통개혁신앙을 배웠고,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1년간 역사적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이승만의 가슴속에는 장차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독립된다면, 기독교 신앙 위에 즉 성경적 세계관 위에 나라를 세우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경적 세계관이란 바로 카이퍼 박사와 월필드 박사가 말하는 칼빈주의 세계관 그것은 곧 미국의 건국이념과 같습니다. 즉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독립되면 하나님 중심의 나라, 성경 중심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 이승만의 꿈이었습니다. 물론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공부했고, 하와이 감리교회에서 봉사한 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의 멘토였던 헴린 목사와 대 칼빈주의자 B.B 워필드 교수와 페톤 교수로부터 받은 칼빈주의 사상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와 우리 민족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1907년에 조지워싱턴 대학(George Washington University)에서 학사를 취득하고, 하버드대학(Harvard University)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후 1910년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국제적인 인물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유학 5년만에 이룬 쾌거였습니다. 1945년 귀국한 이승만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세우기 위한 기초를 다졌고, 1948년 이승만 대통령은 헌법을 만들고, 선포하기 전 이윤영 의원을 향하여 앞으로 나와 기도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세계역사에 대한민국 같은 나라는 처음입니다. 시편에 있는 대로,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 민족의 위대한 선지자요, 위대한 독립운동가요, 위대한 외교가요, 저널리스트요, 위대한 정치 전략가였습니다. 이러한 위대한 이승만 박사를 대한민국의 국부로 모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었습니다.
    • 주요뉴스
    2023-06-26
  • “38선은 어떻게 해서 그어 졌을까?,새로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올 해는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발생 73주년입니다. 다음 달 7월 27일은 정전 협정 70주년입니다. 김종필 전 총리는 물론, 다수의 국민이 모르는 역사적 사실이 있습니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한 일간지에 연재하고 있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1962년 11월 미국에서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을 만났을 때입니다. 나는 처음에 다소 건방진 태도를 보인 케네디 장관을 향해 “당신네 나라가 우리 한반도를 지구상에서 가장 비참한 분단의 아픔을 안게 한 원인을 만들었소!”라고 따졌습니다. 그가 “그 원인이 무엇이오?”라는 질문에 김종필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38선을 누가 만들었소. 딘 러스크 육군 대령이 긋지 않았소. 왜 아무 죄없는 한국을 반으로 갈라 놓았느냐 말이오. 우리를 분단시켜 싸우게 만든 것이 바로 미국이오.” 로버트의 형 존 케네디(JFK) 대통령 정부에서 국무장관에 오른 러스크는 대령 시절이던 1945년 8월 한반도 지도에 38선을 그어 남쪽은 미군, 북쪽은 소련군이 점령케 하는 초안을 만들었습니다. “장래를 전혀 내다보지 못한 전략적 패착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만일 JP가 케네디 법무장관이 아니라 러스크 국무장관을 그날 만나서 똑같은 소리를 했다면 러스크는 아마도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내가 그때 38선을 긋지 않았더라면 한반도 전체가 공산주의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을 것이오. 그러므로 당신은 나한테 오히려 감사해야 하오.” 일본이 항복한 날 미군 최선봉 부대는 한반도에서 남쪽으로 1,000km나 떨어진 오키나와에 있었기 때문에 미군이 소련보다 먼저 한반도에 들어갈 가능성은 제로였습니다. 그때 소련군은 이미 함경도를 통해 한반도에 들어 오고 있었고, 일주일 정도면 부산까지 밀고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이를 우려한 미국은 소련에게 38도선까지만 내려와 북한 지역에서만 일본군의 항복을 받으라고 제의했던 것입니다. 1990년에 출판된 딘 러스크(Dean Rusk)의 회고록 「As I Saw It(내가 본대로)」 124쪽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넓은 지역에 흩어져 있는 일본군으로부터 언제 어디서 항복을 받아 만주의 주요 지점들이 우리 점령지역에 들어가도록 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육군은 우리 군대가 아주 조금 있거나, 거의 없는 지역들은 아예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했다. 사실은 아시아 대륙에 들어 가는 것 자체를 육군은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아시아 대륙에 상징적으로 군대를 좀 유지한다는 차원에서 한반도에 발판 같은 걸 하나 마련해 두기로 했다. 일본이 항복한 바로 그날인 (미국 동부 시각) 8월 14일 늦은 밤(국방부 작전국 정책과장) 찰스 본스틸 대령과 나는 (국무부, 국방부, 해군이 합동회의를 하고 있던 회의실) 옆방으로 자리를 옮겨 한반도 지도를 자세히 보았다. 급박한 상황에서 우리는 미국이 점령할 지역을 선택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었다. (중략) National Geographic 잡지사가 만든 지도 한 장을 놓고 우리는 서울 바로 북쪽에서 한 편리한 경계선을 찾았으나 지리적으로 자연적인 선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북위 38도선을 건의하기로 결정했다. 국무부, 국방부, 해군 협의회는 우리 건의를 별다른 이의없이 받아 들였고, 놀랍게도 소련 역시 이의없이 동의했다. 당시 미국과 소련 양국 군대가 위치한 지점을 고려한다면 소련이 38도선보다 훨씬 더 남쪽의 선을 요구할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러스크의 이 증언을 보면, 일본과의 4년 간 전쟁에 지친 미국 군부는 아시아 대륙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싫어 했으나, 국무부가 우겨서 한반도에 들어 가기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능한한 한반도 북쪽에 선을 그어 소련의 한반도 전체 점령을 막으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미국 군부의 희망대로 그때 한반도에 미군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소련군은 한반도 전체를 다 점령하고, 소련군 대위 출신 김일성(당시 33세·본명 김성주)을 앞세워 소련의 위성국가로 만들었을 것이 뻔합니다. 실제로 소련은 당시에 나치 독일로부터 해방된 동유럽 여러나라 전부를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때 미국이 38선을 그은 것은 우리 한민족에 엄청난 행운이었습니다. 38선이 그어질 당시의 미국 트루먼이 1955년 출판한 회고록 「Memoirs by Harry S. Truman」 1권 444~445 쪽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내가 듣기로는 번즈 국무장관이 현실적으로 가능한한 멀리 한반도의 북쪽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도록 선을 그으라고 국방부 작전국 정책과에 건의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육군은 한반도로부터의 먼 거리와 병력 부족이라는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물에 직면하고 있었다. 따라서 (먼저 한반도에 진입하는 쪽에서 한반도의 일본군 항복을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소련이 이의를 제기할 경우, 우리가 실제로 병력을 파견하기에는 38도선도 사실은 너무 멀리 잡은 것이었다. 소련이 이의를 제기해서 우리가 실제로 병력을 제 때에 보낼 수 있는 거리에다 선을 그어야 했다면 그 선은 38도선보다도 훨씬 남쪽에 그어졌을 것이다. 북위 38도선을 따라 군부가 선을 그었기 때문에 우리는 조선의 옛 수도 서울에서 일본의 항복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일단 한반도에 들어간 소련군은 곧 38선을 봉쇄하고 그 선 이북의 자기네 점령지역을 소련군 대위 출신 김일성(당시 33세 · 본명 김성주)을 앞세워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독일이 연합국에게 1945년 5월 7일 항복한 뒤, 소련은 전쟁 중 점령한 동부 독일을 비롯하여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동유럽 나라들을 전부 공산국가로 만들어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미국이 1945년 한반도에 38선을 그은 것은 우리에게는 행운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후 미군이 점령한 서부 독일과 일본은 미국식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채택하여 오늘날 경제대국이 되었고, 역시 미군이 점령했던 남한은 오늘날 세계 10대 경제강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소련이 점령했던 동유럽 국가들은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했다가 1989년 소련의 해체와 함께 간신히 자유를 찾았고, 역시 소련군이 점령했던 북한은 아직도 공산 독재에 집착하는 무능한 김씨 세습정권에 의해 지구상 가장 가난하고 자유없는 나라가 되어 있지 않습니까? 38선 형성과정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김종필 전 총리도 잘 모르고 있는 걸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저도 잘 모르고 있다가 10여년 전 러스크와 트루먼 대통령 회고록을 읽어 보고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미국 때문에 한반도가 38도선을 경계로 분단되었으며, 이 때문에 한국전쟁의 비극도 발생하였고, 아직까지 우리 민족이 통일이 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미국은 우리 민족의 '불행의 씨앗'이라고 주장하며, 순진한 학생들에게 반미 감정을 불어 넣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지난 70년간 미국은 우리를 크게 세 번 도와 주었습니다. 첫번째는, 1945년 일본 제국주의를 무너뜨리고 우리 민족을 일제의 35년 압제에서 해방시켜 주었으며, 두 번째는, 38선을 그어 남쪽에서나마 시장경제,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이 탄생하게 해 준 것이고, 세번째는, 김일성이 시작한 6·25전쟁때 즉각 군대를 보내 김일성의 적화 야욕을 분쇄한 것입니다. 중공의 한 지방 방송 아나운서는 ‘김치 논란’과 관련해 “소국이 이웃 대국에 무례하게 굴다가는 나라가 망할 수 있다”는 망언을 했습니다. 얼마 전 싱하이밍 중공 대사가 “한국이 중국에 베팅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어디에 베팅해야 할까요? 2017년 4월 시진핑은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에게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중국의 일부였다”고 말했습니다. 문재앙은 2017년 12월 베이징대 연설에서 “중국은 높은 산봉우리, 대국이라 칭하고, 한국을 작은 나라”라고 말했습니다. 2021년 4월 식품의약품안전처 대변인실 공무원이 기자의 질문에 답하면서 “한국은 속국, 중국은 대국이라고 말했습니다. 식약처 공무원은 대통령의 말을 기억했다가 그대로 따라 했습니다. 2022년 2월 중국을 방문 중인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우리나라를 “작은 나라”라고 했습니다. 중화 사상에 물든 우리는 “중국은 대국이요, 우리나라는 소국이라”고 비하했습니다. 중국은 우리나라를 속국 대하듯 하는 안하무인격 태도는 ‘소국은 대국을 따라야한다’는 중화사상∙대국주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중국에는 베팅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인의 팔자를 고친 역사적 베팅을 알고 있습니까? 세계에서 나라 팔자 가장 사나웠던 우리나라가 자유민주에 베팅하고 2천년 가난과 속국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정말 우리나라가 미국에 베팅하지 않고 중국에 줄을 섰더라면 북조선처럼 지옥 속에 살고 있을 것입니다. 천만다행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1948년 미국에 줄을 선 것을 고마워해야 합니다. 아직도 중국에 줄 서자는 종북 정치인들을 보면 그저 한심할 따름입니다. 미국과 아무런 관련이 없던 우리나라가 한미방위조약으로 70여년간 전쟁이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5천년 역사에 이렇게 잘 살게 되었으며, 온 세계가 부러워 하는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손상윤 뉴스타운 회장은 “대한민국 정부는 왜 북조선과 중공 공산당에 6∙25 1급 전쟁 범죄 전범 처벌을 요구하지 않는가? 천문학적 피해 배상 공론화를 시작하자”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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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23
  • 최만순의 약선요리 "더위를 이겨 내는 녹두탕"
    최만순의 약선요리 "더위를 이겨 내는 녹두탕" 벌써 전국에 폭염이 극성이다. 하지(夏至) 이후로는 그동안 지표면에 받은 열들이 쌓여져 더워지기 시작한다. 하지시절은 양기가 제일 왕성한 때다. 이런 날씨에 순응하기 위해서는 인체의 양기(陽氣)를 보호해야 한다. 예부터 무더운 여름의 양생법을 보자. 첫째 기분을 유쾌·상쾌·기쁨 등 좋은 정신을 유지한다. 둘째 만물의 성장에 햇빛이 필요한 것과 같이 외부세계에 흥미를 기른다. 셋째 낙관적, 외향적 성격을 길러서 땀의 순환을 원활히 해야 한다. ′죽림칠현(竹林七賢)′의 중심인물 중국 삼국시대 혜강(嵆康)의 ′양생론(養生論)′에서 ″정심(精心)을 조정하라″고 했다. ″여름에는 마음에 얼음이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여야 한다″고 했다. ″더위를 더위로 생각하면 더위가 생기므로 마음을 고요하게 하면 자연스럽게 시원해진다″는 것처럼 정신양생의 중요함을 말하였다. 금년은 장마가 좀 늦는다고 한다. 장마는 비가 자주 오며 습하고 덥다. 후덥지근하면 인체의 기를 쉽게 상하게 한다. 땀을 너무 흘리면 머리가 무겁고 가슴이 답답하다. 마음이 조급하고 목이 마르다. 미식거리고 심지어 쓰러지기도 한다. 오후에 약간의 휴식을 두어서 피로를 풀어준다. 매일 따뜻한 물로 씻어주는 것도 건강을 유지하는 좋은 방법이라고 한다. 이렇게 하면 더위를 식혀주며 신경계통의 흥분을 가라앉힌다. 신체표면의 혈액순환도 촉진시켜 피부조직의 영양분을 개선할 수 있다. 이때 쉽고 간편한 음식은 있다. 녹두와 소금을 넣은 탕이다. 녹두탕은 과도한 운동을 하거나 땀을 많이 흘릴 때 좋다. 그리고 대량의 찬물이나 빙과류를 마시는 것을 삼간다. 하지 때는 찬물로 머리를 감거나 샤워하는 것은 더욱 금지하여야 한다고 했다. 덥다고 찬물로 머리를 감으면 습한(濕寒)으로 인한 마비나 땀이 노랗게 나서 옷에 묻어나는 ′황한증′에 걸릴 수 있다. 하지 때는 심장에 뜨거운 불기운도 넘쳐난다. 쓴맛의 음식을 먹어서 마음의 불을 가라앉혀야 한다. 약간의 염분도 먹어서 심장근육에 염분이 모자라지 않게 한다. 그러면 심장 박동에 이상이 생기지 않는다. 미국 워싱턴대 ′건강측정평가연구소(IHME)′ 크리스토퍼 머레이(Murray) 교수팀은 국가별로 ′장애보정수명(DALY)′을 조사한 결과다.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82.7세지만 평균 17년간 병치레하다 사망 한다고 한다. 특히 이 조사에서 한국인들이 황혼기에 9.4년이나 건강하지 못한 삶을 산다고 했다. 주된 원인으로는 건전하지 못한 식습관을 꼽았다. ■더위를 이겨 내는 녹두탕 ▲효능-하지 때 발병하기 쉬운 우울증, 심혈관질환, 당뇨병, 고혈압 등을 방지하고 황한증을 예방하는데 도움이 된다. ▲재료-녹두100g, 폐파민트10g, 소금5g. ▲만드는법 1.녹두를 하루저녁 불린다. 2.녹두와 민트를 손질하여 물을 넉넉히 붓고 1시간 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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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21
  • [차석호 칼럼] ChatGPT,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다!
    ChatGPT,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다! ChatGPT와 같은 언어 생성 모델에는 다음과 같은 단점이 있다. 1. 정보제공의 한계: ChatGPT는 훈련 데이터셋에서 학습한 정보를 바탕으로 응답을 생성한다. 이 모델은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지 않으며 실시간 정보에 접근할 수 없다. 특히나 스스로 새로운 정보를 찾아서 학습할 수 없다. 이는 모르는 것이 있으면 스스로 정보를 찾거나 전문가에게 물어보는 등 인간의 행동과는 차이가 있다. 2. 문맥을 이해하지 못한다: ChatGPT는 때때로 주어진 문맥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특히 긴 대화에서 이전의 메시지를 잊거나 일관성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특히 대화나 문맥 속 숨겨진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ChatGPT는 특히 거시기, 충분히, 적당히 등 뜻이 분명하지 않는 단어는 이해를 못한다. 이는 대화나 문맥 속 숨겨진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인간과는 차이가 있는 부분이다. 3. 객관성과 편향성문제: ChatGPT는 사용된 훈련 데이터의 편향성을 반영할 수 있다. 이것은 예측된 문장이 편향적이거나 객관적이지 않게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ChatGPT는 검색한 정보가 잘못된 정보인지 아닌지 판단하지 못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즉, ChatGPT는 인간처럼 스스로 찾은 정보가 정확한지 아닌지 판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4. 생각이나 감정을 가지지 못한다: ChatGPT는 사람처럼 생각하거나 감정을 느낄 수 없다. 이 모델은 기계 학습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하며, 인간의 경험, 감정, 자발적인 생각을 표현할 수 없다. ChatGPT를 포함한 현재 인공지능은 ‘폰 노이만 컴퓨터’에 최적화된 인공지능으로, ‘폰 노이만 컴퓨터’는 태생적으로 계산과 검색에 특화된 컴퓨터이기 때문에 생각이나 감정을 가지지 못한다. 5. 창의성과 복잡한 추론: ChatGPT가 결과물을 생성할 수 있지만, 이는 과거 데이터의 패턴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실제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조하거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컴퓨터, 전화, MP3 플레이어를 합쳐서 스마트 폰을 만드는 것처럼 기존에 있던 것을 조합해 새로운 것을 만들지 못한다. 이것은 인간처럼 생각이나 감정으로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ChatGPT는 기존의 자료를 짜깁기 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6. 민감한 정보 처리문제: ChatGPT는 개인 정보나 회사 기밀 등 민감한 정보를 저장하거나 처리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용자가 이런 것을 공유하면, 이러한 정보는 채팅의 문맥 내에서 계속 사용될 수 있다. 이는 실수로 민감한 정보가 노출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ChatGPT는 스스로 이것을 삭제하거나 파기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ChatGPT의 단점을 알고 사용해야 사용자가 ChatGPT를 맹신하지 않고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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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15
  • [최만순의 약선요리],여름 감기를 예방하는 "금은화차 "
    최만순의 약선요리 뒷산에 금은화가 활짝 피었다. ′황제내경′에 보면 식물에도 오른손잡이와 왼손잡이가 있다. 왼손잡이는 왼쪽으로 감아서 올라가며 ′좌선위양(左旋爲陽)′이라고 한다. 인체 내부의 원양지기(元陽之氣)를 끌어올려 준다. 반대로 오른쪽으로 감아 올라가는 것은 ′우선위음(右旋爲陰)′이라 한다. ′금은화′가 우선위음이다. 금은화는 성질은 냉하고 맛은 달며 독이 없다. 금은화는 인동초의 꽃이다. 금은화는 여름철 잦은 비로 인해 쉽게 발생하는 염증을 예방한다. 더불어 금은화는 여름철 더위로 혈액에 잘 쌓이는 혈지방을 배출하는 작용도 한다. ′우선위음′의 식물들의 성질은 대체로 차갑거나 평(平)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것은 한약의 ′기미론(氣味論)′에서 오랜 경험으로 입증이 되었다. 우리가 흔히 쓰는 ′갈등(葛藤)′이란 단어가 있다. 오른손잡이인 칡(葛)과 왼손잡이인 등나무(藤)의 싸움질을 말한다. 둘은 모두 덩굴식물이며 같은 콩과식물이다. 칡은 예부터 구황식물로 썼다. 갈근과 갈분으론 차와 국수를 해먹는다. 등나무 뿌리는 이뇨제나 부스럼 치료약으로 쓴다. 줄기에 생긴 혹은 위암 치료에도 효과가 있다. 등나무 꽃은 말려 부부 금실 좋으라고 ′신혼 금침(新婚衾枕)′에 넣어준다고 했다. 이렇듯 덩굴식물은 종류마다 정해진 방향으로 올라간다. 방향을 일부러 바꿔놓아도 다시 원래 제 방향대로 자리를 잡는다. 얽혀진 칡과 등나무도 정해진 방향으로 돌다 보니 서로 짓누르게 된다. 그래서 두 식물은 자연에선 대부분 함께 있지 않는다. 한자리에 있더라도 죽이지 않고 각자 제 몫을 하면서 살아가므로 인간사에 교훈을 준다. 양생에서 ′기(氣)′라 하면 의미가 광범위 하여 몇 마디로 설명하기가 좀 어렵다. ′기(氣)′는 대체로 호흡에 관계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좋지 못한 공기는 호흡기를 상하게 한다. 과도한 추위의 기는 혈액 순환을 방해한다. 예를 들자면 찬 것이 몸에 닿으면 피부의 조그마한 숨구멍이 줄어들어 피부 호흡이 정지된다. 그렇게 되면 폐의 부담이 과중해진다. 폐가 갑자기 무리한 노동을 하느라고 열이 생기게 된다. 또 찬 기운에 노출되어 몸이 부어오르는 때는 땀의 배설이 원활하지 않아서다. 부종은 신장의 부담이 과중한 까닭에 신장염이 생긴다. 과도한 냉방으로 한겨울 질병이 여름에 더 많이 발생하는 이유다. ■여름 감기를 예방하는 금은화차 ▲효능-외감풍열(外感風熱)한다. 외부의 각종 냉방기로 인하여 인체 내부에 발생하는 열기를 식혀주며 해독하여 감기도 예방하여 주고 부스럼이나 오장육부에 염증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는데 도움이 된다. ▲재료-말린 금은화 10g. ▲만드는 법 1.깨끗이 말린 금은화를 도자기 그릇에 넣는다. 2.끓는 물을 80도 정도로 식혀서 그릇에 붓고 3분 우려서 마신다.
    • 주요뉴스
    2023-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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