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23일 작성된 ‘스카이데일리’ 허겸 기자의 「무등산 절에 정체불명 100명은 누구?」라는 기사를 소개합니다.
1980년 5·18 직전 광주의 한 절에서 100여 명의 외지 남성들이 국군 장교들에 의해 목격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이에 따라 이들이 무기고 탈취와 교도소 습격의 조직적인 무장봉기에 가담했는지, 이들의 정체를 둘러싼 의문이 새롭게 증폭될 전망입니다.
이 절은 김대중 정부가 2000년 9월 북으로 돌려 보낸 비전향 장기수 손성모가 스님으로 신분을 감추고 간첩으로 암약했던 당시 반(反)국가세력의 거점으로 일부 기능했습니다. 손성모는 1988년 4월 첫 재판에서 “나는 간첩이 아니다”라고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일체를 부인하면서도 “김일성 주석님의 조국 통일 노선을 실현하기 위해 나선 사람”이라고 자신의 남파 경위를 직접 밝힌 바 있습니다.
‘민주화 백서’ 등 5·18 증언집에서는 시민군이 이 절을 ‘사수’ 하려 했다는 증언이 다수 발견되었습니다. 이런 장소에 5·18 사건의 최초 충돌로 간주되는 전남대 앞 유혈사태 4일 전에 거동 수상자 100여 명이 우리 군에게 포착된 사실이 ‘민간 5·18 진상조사위원회(민진사)’의 초동 조사 활동 과정에서 구체적인 영상 증언으로 확보됐습니다.
‘민진사’는 정보당국과 군 당국 출신 인사에 이어 학계와 민간단체 인사가 자발적으로 합류하며 100명 안팎 규모로 외연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에서 발족한 뒤 편향됐다는 지적이 끊이질 않아 온 기존 정부 조사위 활동의 사각지대로 꼽히는 외부 세력의 개입 가능성 등을 확인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특히 순수하고 순박한 대다수 광주시민을 40여 년간 가스라이팅 한 배후 세력이 만약 존재한다면 그 실체를 벗기고 전모를 낱낱이 드러내는 데 역량과 지혜를 모으고 있습니다.
22일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광주시 동구 운림동 무등산 자락에 자리한 증심사(證心寺)에서 5·18 직전 낯선 청년 100여 명이 우리 군 장교들에 의해 목격됐습니다. 이들에 관한 목격 증언이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광주에 있는 ‘전투병과 교육사령부(전교사)’ 군수지원단 소속 장병과 군무원 약 70명은 1980년 5월 14일 점심 식사 이후 무등산을 등반했습니다. 의무병과 사진병 2명만 사병이었고 소수의 군무원을 제외하면 모두 장교들이었습니다.
이 시점은 5·18로부터 4일 전입니다. 목격자들은 그날이 수요일이었다고 증언했습니다. 대한민국 육군은 매주 수요일을 ‘전투 체육의 날’로 정해 구보와 등산 등 체력강화 훈련을 합니다. 그해 5월 18일은 일요일이고 5월 14일은 수요일이었습니다.
군수지원단 장병과 군무원들은 버스 2대에 올라 부대를 출발했습니다. 군인들은 전투복을 착용했고 군무원들은 자유 복장으로 참가했습니다.
증언은 대단히 구체적이었습니다. 버스는 지산동에서 담양군 남면 방향의 무등산을 넘어가는 산길 도로를 지났습니다. 이곳은 현재 ‘무등산 옛길’로 불립니다. 이어 김덕령 묘지 충장사에 도착한 뒤 군인들은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국군 일행은 충장사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무등산 산악행군길에 올랐습니다. 충장사(김덕령 묘지)~바람재~토끼봉을 거쳐 오후 3시쯤 중머리재 정상에 오른 뒤 무등산 정상의 육군 미사일부대가 보이도록 단체 사진 한 컷을 찍은 것으로 장병들은 기억했습니다.
이후 증심사 계곡의 소로길(작은길)로 내려오던 중 100명이 넘는 수상한 남성들이 장교들의 시야에 잡혔습니다. 머리는 긴 장발이었고 눈빛은 살기가 돌았다고 목격자들은 증언했습니다. 군인들은 “극도의 경계심을 갖는 예사롭지 않은 눈빛을 한 이들이었고 긴장한 모습이 있었다”고 훗날 증언했습니다.
하산길에 계곡 사이에 난 작은 길 양옆으로 약 50명씩 거동 수상자가 나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사이를 걸어 내려가던 군인 중에는 대화를 주고받은 이도 있었습니다. 거동 수상자들을 학생으로 여긴 한 증언자는 “학생이 공부는 안 하고 왜 여기에 있나?”라고 물었고 한참 뜸을 들이다가 그들 중 누군가가 “그저 놀러 왔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당시엔 군과 시민군이 교전을 벌이거나 유혈 충돌하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광주의 애국시민들은 적어도 5·18과 같은 현대사의 처참한 비극이 안방에서 일어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시점이었습니다. 시민군이 트럭과 버스를 계엄군 쪽으로 질주∙충돌하며 군의 총격과 대응 사격을 유발해 양측의 격전이 벌어졌다는 시기보다 훨씬 앞선 때였습니다.
증언에 따르면 군인들은 거동이 수상한 자라는 짐작 정도는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당시 석가탄신일을 앞두고 외지에서 사람들이 찾아왔을 수도 있다고 일부는 생각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낯선 남성 100여 명이 고정간첩 또는 북한에서 남파된 특수작전 대원일 가능성은 적어도 그 순간에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일부 증언했습니다. 반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장교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양측은 충돌이 없었고, 증심사 입구까지 다다른 군인들은 부근에 주차한 버스를 타고 부대로 복귀했습니다.
그러나 4일 뒤 5∙18이 본격 시작되고 20일 광주역과 노동청에서 최초의 군인∙경찰 사망자가 발생한 데 이어 다음날인 21일 아침 이른바 ‘군 분교 습격 사건’으로 불리는 20사단 사령부 및 62연대 지휘 차량 피습 사건이 벌어지자, 당시 등산에 참가했던 군인들 사이에서 “그놈들이다”라는 밀담이 조심스럽게 오갔다고 합니다. 이후 계엄군을 악마로 묘사하는 시대 분위기 속에서 이 증언은 40여 년간 묻혔습니다.
당시 전교사 군수지원단의 A모 대위는 “남루한 복장에 머리가 긴 장발이었고 검게 그을린 인상을 가졌다”고 최근 본지에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날카롭게 경계하면서 당황한 눈빛이었고 늘씬늘씬했다”고도 표현했습니다. 키가 훤칠했다는 뜻인지 ‘늘씬늘씬’의 의미를 되묻자 “덩치가 좋았다는 뜻”이라고 부연했습니다.
연령에 대한 질문에는 “최소한 재수생 이상의 제대한 남자 나이로 보였고, 20대 중반이나 후반으로 보였다”고 그는 답했습니다.
또 다른 증언자 B모 대위는 “그때 증심사 계곡으로 행군하고 하산하는 우리 전투 체육의 날 행사 일행을 보고 지금 생각해 보니 뜻밖에 군인들이 많이 오니까 당혹한 눈치인지 안절부절못한 행동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전라도 학생이라 생각했으나 말투가 달라 수상한 사람들이라는 의심이 들었지만 마침 그때는 초파일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어 불교 신자들이 각 지역에서 온 것으로 생각했고 밥은 절에서 제공하니까 그런 줄 알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왜 머리 긴 젊은이들이 그곳에 있었는지 또 말씨가 전라도가 아닌 학생 같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그곳에 있었는지 수상하고 궁금했다”고 증언했습니다.
당시 계엄군이었던 C씨는 “석가탄신일에 절에 가는 이들은 말끔하고 단정한 옷차림으로 가게 마련”이라며 “행색이 남루하고 초라하다는 증언은 대공 용의점을 두고 의심하기에 충분한 상황”이라고 보충 설명했습니다.
광주 무등산 증심사는 남파간첩 손성모가 위장 잠입한 장소입니다. 대공 수사 기록에 따르면 손성모는 1980년 5월 전남 해남으로 남파돼 승려로 위장해 활동하다 이듬해 2월에 경북 문경시에서 붙잡혔습니다.
손성모는 1988년 서울형사지법에서 열린 첫 공판에서 인정신문 직후 “김일성 주석님께서 제시하신 ‘조국 통일 3대 원칙’은 가장 정당한 통일원칙”이라고 진술했습니다. 그가 직접 기록한 후일담에선 자신을 기소한 검찰을 향해 “나는 나를 ‘간첩’이다 뭐다 하고 장광설을 늘어놓은 검사 놈에게 ‘나는 간첩이 아니다. 김일성 주석님의 조국 통일 노선을 실현하기 위해 나선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썼습니다.
“김일성의 통일원칙 실현”을 직접 법정에서 자술했고 5·18을 앞두고 남파된 데다 김대중 정부에 의해 다시 북한으로 돌아 갔지만 대법원은 국보법 위반 혐의를 무죄 취지로 파기 환송했습니다. 대법원은 1988년 10월 “국보법 제3조 1·2호의 국가기밀은 형법 제98조의 국가기밀보다 고도의 국가기밀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며 손성모에 대해 적용한 국보법 혐의에 따라 유죄로 인정한 서울고법의 원심을 깨고 파기 환송했습니다. 당시 대법관은 윤관·김상원·김용준이었습니다.
간첩 공모죄에 대해서 유죄가 확정된 손성모는 사회안전법상 보호감호 조치를 받아 비전향 장기수로 신분이 전환됐으며 김대중 정부 특사로 1999년 12월 형 집행이 정지될 때까지 18년간 복역했고 당시 김대중 정부에 의해 북으로 돌아갔습니다.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당시 대공 수사당국은 손성모가 5·18에 개입한 것으로 혐의를 뒀습니다. 특히 5·18 당시 침투했다는 주장이 제기된 북한 특작부대원들의 길 안내자로 역할 하기 위해 5·18보다 일찍 남파된 것으로 당시 정보당국은 파악했습니다. 재판 기록에 드러난 손성모의 혐의 중엔 그가 5·18이 일어나기 11일 전인 5월 7일부터 증심사에서 승려로 신분을 위장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실제 그가 은거했던 광주 무등산의 증심사는 복수의 대공 혐의 사건들과 실타래처럼 얽혀 있습니다. 일각에선 손성모에 대한 혐의만 제대로 규명해도 5·18 북한군 개입이 확실하게 증명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북한 자료에도 증심사가 당시 시민군의 본거지로 사용됐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북한 조선노동당출판사가 1985년 펴낸 ‘광주의 분노’ 102~103쪽에는 “이때 놈들에게서 로획한 무기는 기관총 (중략) 군사 경험이 있는 50여 명의 청·장년들로 10~20명씩 4개 조로 편성했다. 무등산 입구와 남광주 역전, 광주고등학교가 이들의 본거지였다”고 기술됐습니다.
1988년 강주원∙김길식∙천순남 씨도 무장한 시민군이 5월 21일 오후 전남도청을 점령한 뒤 가장 빨리 배치된 곳이 증심사라고 증언했습니다. 당시 시민군이 도청 점령 이상으로 간첩 손성모가 있던 증심사를 사수하려 했고, 이∙삼중으로 경호했다고 천 씨 등은 진술했습니다. 5·18 유공자 중에 조영훈 씨는 증심사 종무실장으로 일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조 씨는 광주 추모승화공간 지하 돌판 113열 2행에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황석영은 ‘(1985년판)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에서 “21일 보급된 무기들로 무장한 시민군들은 각자 지역 단위의 방어 태세로 들어갔는데 지원동∙학운동 부근에서 예비군 문장우(27세)를 중심으로 학운동 증심사 입구의 배고픈 다리 부근 각 건물에 배치되어 경계를 서고 있었다”며 “이들은 인근 야산을 수색하면서 밤중에 계엄군들이 접근해 오면 저지 사격을 하였다”고 썼습니다.
이 때문에 증심사는 광주사태 당시 단순히 손성모의 체류지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는 시각이 있습니다. 일종의 사령부와 같은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있어 이에 대한 진상규명이 필요하다는 시각입니다. 시민군이 절을 사수하려 한 행위는 통상의 상식으로는 쉽게 납득할 순 없습니다.
증심사 소속 승려들 중엔 시민군에 합세하기도 했습니다. 불교 관련 신문은 성연 스님이 “계엄군의 폭압을 보고 시위에 가담했다”고 보도했고, 진각 스님도 “헬리콥터 기총사격으로 쓰러진 여학생을 적십자병원에 후송한 것이 계기가 돼 적십자 대원으로 합류했다”고 전했습니다. 이들의 증언은 계엄군의 선제 집단 발포와 헬기 기총사격이 없었다는 주장과 각각 배치돼 다툼의 여지가 있고 조사위의 진상 규명 대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