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3(금)
 

박정희(1917~1979)는 1963년~1979년까지 재임한 대한민국의 3번째 대통령으로 우리나라의 산업화를 통해 ‘한강의 기적’이라는 유례가 없는 경제 발전을 이룩한 부국 대통령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박정희가 정권을 잡은 1961년 1인당 국민소득은 한국은 북조선보다 낮은 82달러였으나, 북조선은 한국보다 50% 이상 더 높은 124달러였습니다. 그후 반세기만에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를 넘어서는 부유한 국가가 되었고, 2018년에는 3만 3,434달러였습니다.

2018년 기준 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GNI)은 142만 8,000원으로 한국(3678만7000원)의 3.9%에 불과하며, 한국의 1978년대 수준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끈 산업화는 수천년 이어져온 한국 사회를 뿌리부터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승만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없었고, 박정희가 없었다면 경제 발전은 없었습니다. 자유대한민국에서 온갖 혜택을 다 받으며, 누릴 것은 다 누리면서 박정희 대통령을 욕하는 자들은 대한민국에서 살 자격이 없습니다. 차라리 북조선으로 가는 것이 좋습니다.


오늘은 어제에 이어서 그 두 번째 시간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과 성과가 무엇인지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8. 제주도의 명물 감귤 사업을 조성하고 도로, 항만 등 국제적인 관광지로서의 입지를 구축했습니다.


현재 제주도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관광지임과 동시에 제주도의 특산물로 대표적인 명물은 바로 감귤입니다. 우리나라의 여느 지역들과는 달리, 제주도의 귤은 한라봉이라고 매우 크면서도 맛이 일품입니다. 이런 제주도의 감귤 사업과 관광지 조성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요? 바로 1972년으로 거슬러 올라 갑니다. 제주도 정책은 한마디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과 같습니다.


외국인 상대 관광 산업이 수출보다 외화가득률이 높다는 것을 깨달은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에 제주도에 들려 외국인을 상대로 한 국제 관광지로의 개발할 결심을 하고, 청와대비서실에 제주도 관광종합개발 계획의 입안을 지시했습니다. 그리고는 국내 신혼여행지에 머물러 있던 제주도에 1천억 원의 투자를 지시합니다. 그 뒤에도 1976년에 5백억 원을 투자하였고, 80만 평의 중문관광단지가 들어섰습니다.


이외에도 5·16도로 개설, 어승생 수원지 건설 등 제주발전에 초석을 다졌습니다. 실제로 박정희 대통령과 제주도의 인연이 깊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임기 시절 제주도 관광종합개발계획을 입안했고, 이를 토대로 서귀포시에 중문관광단지가 들어섰습니다. 또한 먹는 물이 부족했던 제주에 어승생 수원지를 만들어 ‘수돗물 혁명’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러한 계획들은 1961년 9월 박정희가 최고회의 의장으로 있을 때, 초도 순시차 처음으로 제주도를 방문하였을 때 계획되었습니다.


일정을 연장해가면서 제주도의 실정을 샅샅이 살펴본 후 미개발 자연자원과 민속 등을 자원으로 한 관광 개발, 광활한 초원을 활용한 축산, 그리고 따뜻한 기후에 적합한 감귤재배를 진흥시켜 제주도를 개발하고 제주도민의 소득수준을 전국 시∙도의 중위권 수준으로 끌어올릴 것을 결심하였기 때문에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이어 박정희 의장은 제주북초등학교에서 가진 시국강연회에서 가장 시급한 해상교통의 개선책으로 악천후하에서도 제주해협을 쉽사리 드나들 수 있는 대형 여객선의 필요성을 강조한 후 3만여 명의 도민들에게 제주-부산, 제주-목포 간 대형여객선 투입을 약속하고 제주개발계획을 천명했습니다.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내린 박 의장의 지시에 따라 조달청은 제주 항로에 대형  여객선을 건조, 투입시키기 위해 이를 국제 입찰에 붙였습니다. 입찰 결과 일본의 조선소가 낙찰되고 63년 10월 12일 역사적인 취항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배가 바로 제주-부산 간에 취항했던 890톤급의 도라지호입니다. 이보다 두 달 앞서 정부는 국고보조로 국내에서 건조된 514톤급의 가야호를 제주-목포 간에 투입, 운항시켰습니다.


제주와 부산 그리고 목포를 잇는 대형 여객선 취항과 더불어 제주의 관광 발전을 위한 획기적인 기반조성사업의 하나는 62년에 기공해서 63년 10월 11일 개통된 제주-서귀포 간의 제1횡단도, 즉 5.16 도로의 건설이었습니다. 이 5.16도로는 제주도의 경제 발전과 관광 개발의 촉진제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4시간 30분이나 걸리던 제주-서귀포 간 자동차 운행시간을 1시간으로 단축시켜 제주도를 1일 생활권으로 만들었습니다.


해상 운송에 있어서는 77년 4월, 3천 톤급의 카페리 1호가 취항했습니다. 두 달 뒤인 같은 해 6월 3천 톤급 카페리 2호가 같은 노선에 취항해 바야흐로 여객선의 대형화, 수송의 대량화, 여객의 대중화 시대가 열렸습니다. 제주항의 건설은 1962년에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67년부터의 제2차 5개년계획 그리고 72년부터 시작된 제3차 5개년계획에 지속적으로 책정되어 꾸준히 추진되고 있었습니다.


육상교통과 수송을 위한 도로 건설에 있어서는 5.16도로(제1횡단도로) 이외에도 일주도로, 중산간도로 및 1,100도로 등 총 4개 국도가 박 대통령의 지시로 건설되고 재임 중에 개통되어 전국 15개 시∙도 중에서 교통망이 가장 잘 발달된 지방자치단체가 되었습니다. 제주도의 관광지 조성은 바로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1964년 2월 연두 순시차 제주도에 들린 박 대통령은 제주도는 농업여건이 타 지방과 다른 만큼 전국 공통사업인 식량 증산은 염두에 두지 말고 수익성이 높은 감귤을 적극적으로 장려하라는 특별지시를 내렸습니다. 이 특별지시에 따라 1965년부터 감귤 식재 붐이 일기 시작하였으며 1968년부터 제주도는 감귤재배를 농어민 소득증대사업으로 책정하여 장기저리자금으로 감귤과수원 조성자금을 지원하게 됨에 따라 1969년부터 획기적인 증식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 과수 중 재배면적이 5천ha를 상회하는 5대 과수는 사과, 복숭아, 배, 포도, 감 등이었는데 감귤이 재배면적에 있어 사과 다음인 2위로 껑충 뛰었으며 1975년부터는 생산량에 있어서도 2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감귤재배 덕택에 1995년도 농가당 소득은 전국 9개 도 가운데 1위인 경기도보다 5만 5천원이 적은 2,721만 5천원으로 2위였고 농업소득만을 보면 전국 1위였습니다.


즉, 이 제주도 경제의 밑바탕이 된 감귤 산업은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에서 감귤나무를 들여오라고 명령을 하면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 결과, 1978년에 드디어 제주도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조성이 되면서 관광객 100만 명이 돌파했습니다. 그리고 그 명맥은 지금까지도 계속 유지가 되고 있습니다. 그 덕인지 제주도에는 50~60대 이상의 장년층에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엄청납니다.


9. 전국 일일생활권이 가능해진 사회, 경제 발전의 획기적인 계기가 된 고속도로 건설 프로젝트입니다.이미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두가 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알려진 박정희 대통령의 대표적인 프로젝트인 고속도로 건설계획. 1970년 7월 7일,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었습니다. 이 사업은 '단군 이래 최대의 토목 공사'라고 불렸고, 근대화의 성공적 진전을 상징하는 사례로 비춰 졌습니다.


현재 경부고속도로 개통은 박정희 정권의 최대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됨으로써 비로소 '전국 일일생활권'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사회, 경제적 발전의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경부고속도로는 총연장 대비 공사 기간을 따져보면 세계에서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완공되었다고 합니다.


1964년 12월 독일을 방문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연장 20km였던 본-쾰른 간의 아우토반을 달리게 되었는데, 고속도로의 수송능력에 놀람을 감추지 못하였고, 경제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고속도로 건설이 필수적이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고속도로 건설에 필요한 자금은 외국에서 빌리고, 도로 건설 이후 수익자부담 원칙에 따라 고속도로 이용자에게 거두어들인 통행료로 빌린 돈을 갚기로 했습니다.


박정희는 “이 공사는 민족의 피와 땀과 의지의 결정이며 민족적인 대예술작품”이라고 했고, 그의 경제 브레인이었던 오원철은 “경부고속도로는 박정희 대통령의 작품이다. 구상부터 계획, 감독, 검사를 혼자서 해냈다. 박 대통령은 우리나라 고속도로의 창시자요 대부이다. 경부고속도로는 역사상 박정희 고속도로로 남을 것이다”라고 평가했습니다.


이 공사는 단순한 건설 공사가 아닌, 군사 작전과 같이 군대식 총력 체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사였습니다. 오원철은 “고속도로 건설 동기, 추진 방법, 공사 방식이 모두 군대식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원래 1971년에 개통 예정이었으나, 무려 1년을 앞당겼습니다.


1961년 1인당 국민소득은 82달러에 불과했지만, 1979년에는 1,636달러를 기록해 연평균 18% 증가했고, 수출은 연평균 38% 증가라는 경이적 기록을 세웠습니다. 절대 빈곤국이 세계 10대 경제 대국으로 발전한 것은 행운이나 우연이 아니라, 현명한 지도자의 선견지명 덕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경제 발전에 고속도로 건설계획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경부고속도로 계획이 발표된 직후 월간 <세대> 1968년 1월호가 각계 인사 100명에게 찬반 여부를 조사한 결과, 68%가 무조건 찬성, 27%가 조건부 찬성, 5%가 반대를 표했습니다. 하지만 야당을 비롯한 운동권 학생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고속도로 계획에 극심한 반대를 했습니다. 당장 먹고 살기도 어렵고 차도 별로 없는 나라에 고속도로를 건설한다니 정신이 나간 것 아니냐는 논리였습니다.


경부고속도로는 우리나라 2대 경제권의 중심인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여 경제발전의 첩경이 되도록 하기 위한 이유에서 건설하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미 1967년 초에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방대한 구상을 끝내고 몇몇 구간의 노선까지 손수 결정해놓은 상태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고속도로는 박정희에게 근대화의 상징이자 경제개발의 꿈을 실현시킬 신앙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1968년 12월 21일 우리나라 첫 고속도로인 서울-인천 간 경인고속도로가 개통되었고, 1970년 7월 7일에는 연장 428km, 4차선인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었습니다. 1973년에는 연장 251.8km, 2차선인 대전-순천 간 호남고속도로와 연장 176.5km, 2차선인 남해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영남지방과 호남지방을 연결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1975년에는 연장 201km, 2차선인 수원-강릉 간 영동고속도로가 완공되어 수도권과 영동지방을 연결하게 되었습니다. 고속도로가 만들어진 후 철도 위주의 수송 구조가 도로로 바뀌었고, 전국이 일일생활권으로 연결되었습니다. 공업 단지도 전국 방방곡곡에 건설되었고, 산업 발전과 산업 생산성도 높아졌습니다. 고속도로 건설은 '한강의 기적'이라는 신화 창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10. 농촌의 진흥과 국민의 근면∙자조∙협동 정신을 일깨운 농촌혁명인 새마을운동을 실시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여러 공업화를 통한 급속한 경제 발전은 도시의 엄청난 발전을 가져왔지만, 반대로 농촌의 쇠퇴를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은 이러한 농촌을 다시 부흥시킬 방법을 찾아냈는데, 그것이 바로 새마을운동이었습니다. 새마을운동은 박정희 대통령이 1970년 4월 22일 수해 대책을 숙의하기 위한 지방 장관회의에서 수재민 복구대책과 아울러 농촌재건운동에 착수하기 위하여 마을 가꾸기 사업을 제창한 것에서 비롯됩니다.


이는 하나의 농촌혁명과도 같았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9년 8월 4일에 경남북 수해지구를 시찰하면서 마을 사람들의 자발적인 자조 정신과 협동심에 큰 감동을 받았고, 이를 통해 그는 농민들의 근면, 자조, 협동 정신을 일깨워 농촌을 개발해보자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착안해 냅니다.


그리하여 박정희 정부는 1971년 전국 3만 3,267개 마을에 시멘트 335포대씩을 무상지원하여 각 마을마다 하고 싶은 사업을 자율적으로 하도록 조성하였습니다. 이 결과는 2가지로 나타났는데, 한쪽은 정부가 무상공급한 시멘트로 부락민들이 자제 노력과 자체 자금을 투입하여 마을이 필요로 하는 숙원사업을 해냈습니다.


반면, 다른 한쪽은 시멘트의 무상공급을 받았음에도 뚜렷한 사업을 하지 못했다. 이러한 경과를 지켜보고 박정희 정부는 성과가 있는 1만 6,600개 마을에 대하여 또다시 시멘트 500포대와 철근 1t씩을 무상공급하면서 자발적인 협동 노력을 장려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정부의 절대적인 지원으로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공장, 도시, 직장 등 한국사회 전체의 근대화  운동으로 확대 및 발전되었습니다.


새마을운동은 박정희 대통령의 탁월한 리더십과 우수한 새마을지도자 양성, 그리고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시너지효과를 나타내면서 근대화와 경제성장이라는 성과를 이룬 것이었습니다. 덕분에 우리나라는 보릿고개를 청산하면서 산업혁명과 농업혁명을 단시일에, 그리고 동시에 성공시켰습니다. 이 새마을운동이 범국민적 근대화 운동으로 조직되어 1970년대의 경이적인 경제성장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는 마을은 30%에 불과해 나머지는 비좁고 꼬불꼬불한 고샅길에 가난이 엉켜 있는 형상이었는데, 새마을운동 덕분에 이런 농촌의 인프라를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았고, 농가소득 증가라는 눈부신 성과를 가져왔습니다. 1967년의 경우 농가소득이 도시 가구의 60%에 불과하던 것이 70년에 평균 25만 6천원, 75년 87만 3천원, 78년 160만원으로 8년 사이 6배 이상 증가하며 도시 노동자의 소득을 상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새마을운동은 이후 세계 각지로 퍼져 세계 약 100여 개 나라에서 우리나라의 새마을운동을 배우고 있고, 또 배우려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새마을운동은 우리 한류의 첫 물결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만큼 해외에서는 우리나라의 새마을운동에 주목하고 있으며, 이러한 운동을 주도한 박정희 대통령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11. 자동차 산업을 육성하여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효자산업으로 성장시켰습니다.


1968년에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이 준공된 이후 현재 1공장부터 5공장까지 5개의 단일공장으로 구성되어져 있습니다. 1990년 6개의 차종에 56만대 생산능력에 불과했던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은 2010년 기준 13개 차종을 시간당 330대, 하루 6,600대를 생산합니다. 연간 최대 150만대까지 가능합니다. 설립 이후 2009년까지 차량 누계 대수는 2,580만대에 이릅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수출선적 부두가 공장 내 위치해 수출기지로서도 최고의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산업으로 일컬어지는 자동차 산업 역시 박정희 대통령 시대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1961년 5.16을 일으킨 직후 박정희 정권은 <자동차공업발전법>을 만들어 완성차 수입 금지, 국산화 정책, 수출 산업화 정책 등과 함께 자동차 산업을 활성화시켰습니다.


1962년 세워진 새나라 자동차는 일본 닛산의 부품을 수입해 '새나라 자동차'를 조립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새나라는 관세면제 등의 특혜를 받아 5.16 군사정권 초기 이른바 '4대 의혹사건'의 하나로 물의를 일으켰고, 수요 감소로 설립 다음 해인 63년 5월 생산이 중단된 뒤 65년 이어 신진자동차가 설립돼 새나라 자동차를 인수했습니다.


신진자동차는 도요타와 기술제휴로 '코로나'를 선보였습니다. 60년대 말에는 현대자동차가 미국 포드와 손잡고 '코티나'를 양산하기 시작했습니다. 70년대 초에는 현대, 신진, 아시아, 기아산업 등이 4륜 트럭 생산을 시작해 자동차 공업발전의 촉매 역할을 했습니다. 이후 1975년 현대의 '포니'는 한국을 세계 15번째 자동차생산국가로 부상시켰으며, 1976년에 포니 6대를 에콰도르에 첫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1986년 소형자동차 '포니 엑셀'을 처음 미국에 수출했습니다. 현대차는 포니를 만들고 약 10년간 적자에 시달렸는데,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 주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내에서 외국 차를 못 팔게 하고 독점가격을 보장해주면서 자동차 산업을 육성시킨 것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한국 자동차 산업은 세계 5위권에 진입할 정도로 급성장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지금과 같은 성장을 이루어낼 수 있었습니다. 1960년대 후반, 이웃 나라 중국 대륙에 고속도로가 한 뼘도 없을 때 산지가 7할인 이 작은 나라에 가당치도 않다는 고속도로를 닦으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자동차를 만들자고 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자동차 생산계획 발표에 업계는 놀랐고, 교수와 지식층에선 후진국이 무슨 자동차냐고 반대했습니다.


국회의원이나 장관들도 자가용을 마련하기가 수월치 않았던 그 시절에 국내에서 자동차를 개발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자동차 산업은 국가경제를 일으키는 효자산업으로 급성장을 했습니다. 먹고 살기도 힘든 시기에 이미 앞날을 내다보고 고속도로에 이어 자동차 산업을 육성하여 대표적인 산업으로 만든 것입니다.


강석종 뉴스워크 칼럼니스트 기자 newswalk@naver.com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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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탄.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과 성과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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