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2(월)
 

 

여승익의 단상,[世論書筆]

 

4354신축년 08월 12일(목)

 

아침 바람이 시원하다. 창문 밖 공원에서 바람이 인다. 열대야가 주춤해졌다. 이젠 아침저녁으로 시원한 기운을 찾았다. 무척이나 반가운 바람이 일고 있다.


엊그제 저녁, 동네 서점을 들렀다. 이리저리 눈이 가서 발걸음이 멈췄다. 그것은 다산과 제자 황상을 그린 보고서다. 집어 들고 집으로 왔다. 늦은 저녁이라 씻고 잠을 청했다. 어제저녁에 짬이 났다. 그 책을 조금 읽어나갔다. 다산에 관해서는 많은 책을 보았다. 하지만 황상이란 이름은 처음 들어봤다. 이제 들어가는 부분을 읽지만, 제주 추사에게 소치 허련이 있었다면 강진 다산에겐 황상이 있었다.


이 책을 낸 작가 정민이 대단하다 여겼다. 그 이유는 새로운 길을 열었기에 붙인 생각이다. 그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삼근계(三勤契))로 시작됐다. 그리고 나서 치원유고를 만나서 본격적으로 깊은 인연을 맺는다. 작가는 서문 제목을 '맛난 만남'이라고 썼다. 삶에서 만남은 아주 많다. 그런 흔한 만남이 아니다. 인생을 바꾼 만남이 있다. 그게 열다섯 살 황상에게 찾아온 것이다.


책 제목은 '삶을 바꾼 만남', 글쓴이는 한양대학교 국문학과 정민 교수다. 한문학 자료 수집에 꽂힌 사람이다. 펴낸 곳은 '문학동네'이다. 누군가에겐 어떤 만남이 운명을 바꾸는 계기로 찾아든다. 바로 열다섯 황상에게 다산이 내린 삼근계로 맺은 사제의 시간이 그렇다고 작가는 보았다. 일생을 살면서 일상으로 부지런히 부지런하고 또 부지런한 학문하는 자세를 놓치지 않았다.


바로 그런 이가 황상이다. 그이의 어릴 적 이름은 '산석(山石)'이다. 강진 그곳에서 아전을 하는 아비를 뒀다. 다산은 강진에 유배 온 지 1년쯤에 사의재(四宜齋)라 이름 지은 서당을 열었다. 한양 있는 아들에게 삼사재(三斯齋)란 서재 이름도 내렸다. 유배 생활 18년 동안 세 번의 기간으로 나뉘는 데, 이것이 그 첫 번째이다. 가장 돈독한 사제지간을 이루는 이들을 만났다.


다산은 큰 아들 학연, 작은 아들 학유이다. 유배를 와서 가까이 가르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오가는 인편으로 글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서신을 통해 자식들에게 글로써 공부를 이끌었다. 18년 유배 기간 동안 다산은 엄청난 분량의 책을 저술해 '여유당전서'라는 이름으로 남겼다. 여유당(與猶堂)은 노자도덕경에서 따왔다. "겨울에 살얼음 위를 걷듯이 이웃을 두려워하듯이 매사에 조심하라"는 뜻이다.


다산이 반대파의 무고에 자명소를 써서 정조 임금에게 바치고, 고향 마현으로 가 집 이름을 지은 것이다. 여유당에서 다산이 가진 마음 자세를 짐작할 수 있기에 충분하다. 이후 그가 75세 졸 하기까지 그곳에서 학문에 전념을 했다. 황상은 다산 생가를 찾는 걸음을 처음 하고 내려오는 길에 부음을 듣게 된다. 그 길로 되돌아가 스승을 보내고서, 다시 고향으로 길을 나섰다.


황상은 스승 다산이 준 가르침을 몸과 마음으로 행한 유일한 제자다. 그렇기에 과골삼천을 실천하는 마음 가짐을 가졌다. 이것을 현대 글로 이야기하면 '1만 시간의 법칙'이다. 꾸준하게 자기 일에 매진하는 것을 이른다. 오늘날 황상 같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스승이 사라진 시대, 우리들은 삼근계, 과골삼천 같은 말을 어찌 마음으로 새길 수가 있겠는가!


책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했다.

'일흔여섯의 노인은 손에서 공부를 좀체 놓지 않았다.'


... 여유로운 시간의 단상. 南江!

첨부파일 다운로드
Screenshot_20210812-090013.jpg (1.1M)
다운로드
Screenshot_20210812-085944.jpg (1.0M)
다운로드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世論書筆]'삶을 바꾼 만남'을 읽으며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