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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형석 연세대 몀예교수 칼럼 "더불어민주당이 국민과 민주정치를 버렸다."
    동아일보의 객원논설위원이신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의 칼럼 ‘더불어민주당이 국민과 민주정치를 버렸다.’를 소개하겠습니다. 며칠 전 TV에서 뉴스를 들었다. 민주당을 대표하는 한 최고위원이 민주당은 김대중 대통령으로 출발해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을 거쳐 지금은 당 대표인 이재명으로 이어져 왔다. 이재명이 민주당과 국가를 대표할 시대정신을 이끌어 가야 할 단계라고 했다. 그것은 이재명의 주장과 신념을 대변한 선언이다. 국민도 그 뜻을 이해는 한다. 문재인 정부에서 현재까지 국정의 중책은 민주당이 맡아 왔고 지금도 절대적 여소야대의 국회이기 때문에 국민의 관심과 기대가 민주당에 집중돼 있을 정도다. 문제는 민주당 안에서는 그런 선언이 가능할지 모르나, 국민의 민주당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은 초창기보다 더 증대하고 있다. 국가와 민주주의를 위한 우려와 걱정은 한계선까지 도달한 상태다.국민은 김대중 대통령의 동족 간의 평화통일을 위한 열성과 노력을 부정하지 않는다. 남북 간의 경제적 격차가 심하므로 경제적 원조를 베풀면 15년쯤 후에는 통일이 가능할 것 같다는 견해를 믿고 싶었다. 그런데 국민이 알고 있는 것보다도 너무 많은 원조를 했다. 그 결과는 핵무기 개발과 공산정권 굳히기에 도움을 주었다. 지금의 김정은 정권을 키워주는 결과가 되었다.노무현 정권은 어떠했는가? 우리 국민이 이런 상태로는 살 수가 없고 불안하여서 이민이라도 가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할 정도의 무질서와 혼란 상태가 되었다. 국민에게 물어 보라. ‘노무현 정부가 남겨 준 업적이 무엇인가?’라고. 그 주역을 담당한 세력인 86세대 운동권의 등단과 확장기였다. 대통령 자신이 자기모순을 극복하지 못했다. ‘나같이 불행한 대통령’은 다시 태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을 몸소 남겨 주었다.그 뒤를 계승한 문재인 정부도 마찬가지다. 민주당과 운동권은 물론 문 대통령 스스로가 공은 내세웠으나 과(過)는 인정하지 않았다. 퇴임 후에도 자신의 임기 5년 동안에 쌓아 올린 정치적 업적을 윤석열 정부가 계승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국민은 문 정부와 같이 가지 않는다고 추방한 윤석열을 왜 대통령으로 선출했는가? 중요한 것은 문재인 정권이 남겨 준 업적이 무엇이며, 윤 정부가 계승해야 할 과업이 있다면 무엇인가를 묻게 한다. 정치 기반인 경제 분야는 어떠했는가? 이명박 정부를 계승했다면 경제성장은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외교는 어떻게 했으며,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는 민주국가의 위상을 지켜 왔는가? 북한 동포를 뒤로하고 김일성 정권 세습화에 동조했다면 그것은 실정 중의 실정이다. 김대중 정신에 위배되는 결과가 되었다. 대한민국으로 귀순해 온 동포와 중국에서 우리 품으로 오려는 북한 동포들에 대한 처신은 앞으로도 역사의 평가를 받아야 할 과제다. 친북 정책은 북한 동포를 위한 절대적 의무와 권리이다. 김정은 정권을 위한 종북이 아니다.현재에도 민주당은 국정운영 방향과 방법은 물론 절차까지 관여하는 국회의 주도권을 행사한다. 국가를 위해서보다는 윤 정권을 타도하고 임기 내라도 재집권하겠다는 자세다. ‘그것도 애국심인가? 국민을 위한 정치인의 양심인가?’라고 국민은 묻는다. 누가 보든지 민주당은 국가보다는 정권을 위했고, 지금은 당 대표인 이재명의 사당이 되었음을 의심치 않는다. 민주정치는 실종되었고 싸워서 이기면 그것이 정의가 된다는 개인과 집단의 투쟁이 필수적이라는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 초창기부터 실정에 앞장서 왔던 임종석 전 실장,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송영길 전 당 대표, 각 분야에 자리 잡고 있던 운동권 출신의 잔여 세력이 이재명 대표를 앞세워 정권 재장악에 동참하려는 기세다. 민주당 안과 주변에 있던 친북좌파까지도 예외는 아니다. 민주국가에서는 선한 공존의 질서가 유지되어야 한다. 지금은 국가적 방향과 국민의 진실과 정의, 자유와 휴머니즘 정신이 보장, 구현되는 나라 선택에 직면하고 있다. 우리는 자기 잘못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 지도자를 원하지 않는다. 진실과 정직 없는 ‘내로남불’의 정의관, 인격을 갖추지 못한 개인이나 이기적 집단세력에 정권을 위임해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을 위하고 국민을 섬기려는 지도자를 선출해야 한다. 여야를 가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국민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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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1
  •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가 그립다
    '의대 정원 확대’에 대한 반발로 전문의 파업이 대형 병원 중심으로 사직서를 제출하고 근무를 중단했다. 이에 따라 의료 현장의 혼란이 가시화되고 의료 공백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안타깝기가 이를 데 없다. 이 안타까운 현실을 보면서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리는 장기려 박사가 문뜩 생각나고 그리워진다. 장기려 박사님의 꿈은 어린 시절부터 의사였다. 그래서 경성 의학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평양 의과 대학과 김일성 종합 대학 교수를 지냈다. 한국 전쟁이 일어난 1950년, 장기려 박사님은 철수하는 군인들의 손에 이끌려 아내와 5남매를 북에 둔 채 둘째 아들만 데리고 월남하였다. 그리고 부산에서 천막을 치고 복음 병원을 세워 행려병자를 치료했다. 장기려 박사님은 가난한 사람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는 다짐을 하며 하루에 200명이 넘는 환자들을 돌보았다. 그럴 뿐만 아니라 1959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간 절제 수술에 성공하는 등, 당시 우리나라 외과 의사 가운데 최고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병원이 커지고 무료 진료가 불가능해지자 장기려는 1968년 한국 최초의 의료 보험 조합인 청십자 의료 보험 조합을 설립하였다. 청십자병원은 가난한 사람을 정성껏 치료해 줄 뿐만 아니라 치료비를 깎아 준다고 소문이 나 늘 많은 환자가 찾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해 있던 농부가 장기려 박사에게 하소연했다. “선생님, 제가 당장은 돈이 없지만 나중에 꼭 벌어서 갚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사정 좀 봐주세요. 내일 당장 모내기를 해야 하는데 이렇게 병원에 묶여 있으면 한 해 농사를 망치게 됩니다.” 농부의 말을 들은 장기려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밤에 문을 열어 줄 테니 그때 가세요.” 농부가 깜짝 놀라자 장기려는 웃으면서 말했다. “병원에서는 아마 병원비를 내지 않으면 퇴원을 안 시켜 줄 거예요. 그런데 돈이 없으니 도망을 쳐서라도 일을 해야 가족을 돌볼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장기려는 그렇게 말하고 농부에게 돈까지 쥐여 주었다. “얼마 안 되지만 차비나 하세요.” 농부는 고마운 마음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는 수술비가 없는 환자를 위해 자기 돈으로 수술을 해 주고, 그나마도 감당할 수 없게 되면 밤에 몰래 환자를 탈출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평생 자기 집 한 채 가지지 못하고 병원 옥상 사택에서 살다가 1995년 12월 추운 겨울날 새벽에 세상을 떠났다. 내 마음이 그러하듯 창밖에는 겨울비가 밤새 주룩주룩 내린다. 오늘따라 ‘바보의사 성산 장기려 박사님’이 그저 그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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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다큐‘기적의 시작’ 관람 후기
    ‘은종’이라는 동료 시민의 ‘기적의 시작을 보고’라는 관람 후기를 소개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일대기를 그린 또 다른 다큐극 영화 ‘기적의 시작’을 보고 왔습니다. 두 말이 필요 없습니다. 꼭 보십시오. 건국 전쟁을 보신 분이라면 더더욱 꼭 보십시오. ‘건국전쟁’이 큰 그림을 그리는데 치중했다면 ‘기적의 시작’은 이승만 대통령의 디테일한 부분을 세밀히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건국 전쟁은 역사를 잘 모르고 일방적으로 세뇌 당한 분들에게 유익한 영화입니다. 4.19는 이승만이 원인인가? 김구의 정체, 런 승만의 문제, 한강철교 폭파사건 등 이승만 대통령이 오해받고 있는 부분의 팩트를 설득력 있게 제시함으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오해를 푸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에 대한 역사를 잘 아는 분들이 보았을 때 거의 다 아는 내용이었고 소수의 부분은 새로운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의 시작은 자료를 수집하는 데 있어서 훨씬 더 섬세합니다. 이승만에 대한 책 몇 권을 섭렵했던 분들도 새로운 내용을 보고 저런 자료를 어떻게 찾았을까 하고 그 수고에 감탄하게 됩니다. 어쩌면 흥행에 치명적이 될 수도 있는 이승만이 한성 감옥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된 과정이나 서거하기 전 기도한 장면 등을 삽입한 것은 기독교인들에게 많은 감명을 줍니다. 이승만의 삶은 기도에서 시작하여 기도로 끝납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은 기도로 시작한 나라이니 기도를 놓지 말아야 국가가 번영한다는 무언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만약 성도들이 단체관람한다면 ‘기적의 시작’이 더 감명을 줄 것입니다. 기적의 시작의 증언자들은 이승만과 직접 만난 분들을 등장시켜 훨씬 더 사실적으로 다가왔다. 백선엽 장군,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 이인수 박사, 그리고 그 며느리의 증언은 어느 책에서도 볼 수 없는 사실적이고 감동적인 얘기들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농지개혁, 6.25 전쟁에 대한 일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맺어진 경위 등은 훨씬 더 자세하고 섬세하게 묘사되어 역사의 진실에 더 가까이 갈 수 있게 해줍니다. 무엇보다도 깜짝 놀란 것은 이승만의 경제에 대한 관심입니다. 벌써 한성감옥에서 쓴 ‘독립정신’에 앞으로 한국은 공업국이 되어야 한다고 예견한 것은 대단한 통찰력이었고, 실제로 6.25 이후에 공업국이 되기 위해 그가 이룬 업적을 세밀한 자료와 더불어 제시한 것은 그동안 몰랐던 내용이었습니다. 다큐 영화가 자칫하면 지루할 수 있는데, 텔렌트 임동진의 탁월한 연기력으로 이승만을 잘 살려내었습니다. 아마도 무료 출연이었을 것인데, 눈물과 마음으로 연기하는 것이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대한민국을 정말 사랑하는 대배우라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다른 무명의 배우들이 적절하게 사건들을 잘 재현해내어 다큐에 몰입할 수 있도록 톡톡히 한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승만 한 개인에게 너무 많은 빚을 졌습니다. 그동안 런 승만, 독재자, 친일파 등등으로 왜곡된 이미지를 이제는 바로 잡을 때가 되었다. 위대한 거인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때가 되었습니다. 모든 국민들에게 이승만을 바로 알릴 때가 되었습니다. 두 영화를 꼭 보십시오. ‘건국 전쟁’은 전체적인 그림을 그립니다. ‘기적의 시작’은 섬세하게 그 안을 들여다 봅니다. 성경으로 비유하면 ‘건국 전쟁’은 마가복음에 비유한다면 ‘기적의 시작’은 요한복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둘 중에 한 영화만 선택하지 마십시오. 두 영화 모두 보시는 것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요, 애국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건국 전쟁은 제법 관람객들이 있었는데, 기적의 시작은 관객면에서 많이 부족해 보입니다. 이점이 안타깝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기적의 시작’이 훨씬 더 애정이 갑니다 우리교회 성도님들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가슴에 더 와닿는다고 했습니다. 건국 전쟁을 보신 분들은 반드시 기적의 시작도 함께 보십시오. 다른 감동을 느낄 것입니다. ‘기적의 시작’을 먼저 보셨습니까? ‘건국 전쟁’도 보세요. 두 영화가 결합할 때 우리는 이승만 대통령과 대한민국을 좀 더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총선 전에 두 영화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할 일은 두 영화가 흥행해서 대한민국 국민들의 역사인식이 바뀌도록 열심히 홍보하는 일입니다. 아직 보지 못하셨다면 먼저 극장으로 가십시오. 교회 단체관람을 강력히 추천합니다.”라고 동료 시민 ‘은종’은 말했습니다. 김덕영 감독의 ‘건국 전쟁’이 개봉 27일만에 100만을 돌파하며, 다큐로는 드문 흥행 기록을 세우며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권순도 감독의 ‘기적의 시작’, 그리고 ‘건국 대통령 이념 보급회’의 김효선 사무총장의 ‘이승만의 독립 외교 33년’ 등 다른 기록 영화들도 ‘건국 전쟁’과 거의 동시에 선을 보였습니다. 이장호 감독의 이승만 관련 영화 ‘하우보만의 약속’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동안 영상 매체는 “대한민국은 태어나서는 안될 나라”라는 주장을 하며 반공 애국 진영, 특히 이승만 건국 대통령을 비방하고 폄훼하는 반역 세력의 전유물처럼 이용되어 왔습니다. 그런 영상 매체가 이제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밝히려는 일에 효율적으로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승만이 ‘독재자’ 또는 ‘친일파’로 낙인 찍히며 국민의 뇌리에서 아예 지워버려야 할 추악한 인물로 악마화 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가 독립운동과 반공 투쟁에서 승리해서 대한민국의 건국 대통령이 되었고, 공산군의 6.25 남침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내고 부흥시키는데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이승만만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쉽게 공산화되어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김일성의 지배를 받는 위성국가로 편입되었을 것을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세계적인 위인이자 천재였습니다. 그는 이 나라의 국부였고, 애국자요, 선지자요, 예언자요, 세계가 공산당을 열광할 때 “공산당은 망한다”고 외쳤습니다. ‘전시 중립론’이라는 논문을 쓴 국제 정치가였고, 훌륭한 선교사였고, ‘재팬 인사이드 아웃’의 저자인 작가였고, 민족 복음화를 소망한 하나님의 종이었고, 철저한 반공주의자였으며, 그는 하나님 중심의 철저한 자유 민주주의 투사였습니다. 그는 당시 최고의 학력 소유자였습니다. 죠지 워싱톤대 학사였던 클린턴 대통령과 동문이었으며, 하바드대 석사였던 오바마 대통령과 케네디 대통령과 동문이었으며, 프린스턴대 박사였던 윌슨 대통령과 동문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도 이만한 학력 소유자를 찾기 힘들었습니다. 대한민국에 자유의 등불을 달아준 불세출의 위대한 정치가였습니다. 탁월한 외교가였으며, 토지개혁을 단행했고, 양반과 상놈을 구분하는 ‘반상 철패’를 했으며, 의무 교육을 실시했고, 여성들을 투표에 참여케 했습니다. 의회 정치를 실시 했습니다. 그의 애국정신과 업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한 시대의 등불이었습니다. 전교조에 의해 역사 왜곡이 극에 달한 이 나라는 이승만을 바로 알아야 대한민국이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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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석종 칼럼
    2024-03-08
  • 이승만 영화 ‘기적의 시작’이 만들어진 배경 이야기
    권순도 감독의 ‘[기적의 시작]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기적입니다.’라는 글을 소개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영화 '기적의 시작'을 만들고, 전국 개봉을 하기까지 모두 기적의 순간입니다. ■ 영화의 시작 ■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저의 아버지께서 '이승만 대통령 영화를 만들어 보라'는 권유를 하셨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유명하지 않은 제가 그 당시 더 기반이 없었던 시절, 그런 권유를 받으니 너무 막연하고 막막하게 다가 왔습니다. 저는 대학 졸업 후에는 부모님 댁에서 같이 사는 것 외에는 따로 '부모님으로부터 금전적인 도움은 받지 말자'고 했고, 또 그것을 실천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신 어머니는 우리나라 영화계와 아무런 인맥도, 기반도, 심지어 카메라 한 대 조차 없던 아들이 이리저리 일감을 찾아다니는 모습에 안쓰러워 ‘카메라 한 대 얼마 하니? 카메라 한 대 사줄게. 그것 가지고 시작해 보라’고 하셨지만 저는 그것마저 거절했습니다. 많은 예술인들이 그렇겠지만, 저 역시 이 분야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돈벌이가 시원치 않았고, 포기하고 다른 일을 해 볼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었습니다. 친구들이 만나자고 하면 누가 밥값을 내야 하는지 신경이 곤두섰고, 스스로를 단련시키기 위해 버스나 지하철 다섯 정거장 정도는 교통비를 안 쓰고 걸어 다녔습니다. 물론 저의 집안이 그 정도 돈 못 쓸 정도로 여유가 없지는 않았으나, 저는 속으로 '이 나이에 돈벌이도 못하면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다니는 것은 사치다'라고 생각하며 가급적 걸어 다녔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 온 저의 영화 인생은 그렇게 밑바닥부터 시작되었고, 많은 분들이 도와주셔서 비록 독립영화이지만 조금씩 규모를 키워가며 제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처음에는 순회 상영을 다니며, DVD를 찍어 판매하는 수준에서 점차 작품을 작은 영화관에서부터 상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작품이 하나 둘 씩 영화관에 걸려 작품을 찾는 관객들이 늘었고, 이번엔 멀티플렉스 상영관 전국 개봉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랜 기간을 지내면서 아버지의 권유를 당장 실행해 옮겨 작품을 완성할 수는 없었으나, 덕분에 이승만 대통령과 같이 일하거나 생활했던 분들을 만나 뵈면 꼭 이 대통령에 대해 질문하고 이를 기록해 두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백선엽 장군님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뵌 분들은 그 당시에도 꽤 계셨으나, 백 장군님처럼 이승만 대통령과 같이 큰일을 하며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셨던 분은 없었습니다. 백 장군님은 이승만 대통령과의 일화와 본인이 참여했던 전투에 대해 매우 실감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전후방 전투 현장을 직접 보여주시며 설명하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런 귀한 증언들은 매번 카메라로 기록해 두었습니다. 그렇게 기록하는 데는 많은 비용이 들지 않아 저는 그 당시에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했습니다. 요즘과 달리 20년 전에는 6mm 테잎을 썼는데, 당시의 기록이 멀쩡하게 보존된 것도 작은 기적입니다. 한편 해를 거듭하며 시간이 지나도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왜곡과 비난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아니, 멈추기는커녕 점점 심각해져만 갔습니다. 또 많은 젊은이들이 그런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모습에 국부 더 나아가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를 두고만 볼 수 없어 '22년 12월부터는 아예 작정하고, 그동안 모았던 자료들과 추가 인터뷰를 통해 '기적의 시작'을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 국민 대배우의 합류 ■ 제작 과정에서 국민배우 임동진 님도 합류하시게 되었습니다. 원래 그런 대배우분께 극영화도 아닌 다큐멘터리에 넣을 재연장면에 출연해 주시라고 요청하는 것은 큰 결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임 배우님께서는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으셔서, 속으로 많이 놀랐고, 겸손한 모습에 크게 감동했습니다. 임동진 배우님과 같은 영화계 거물이 합류하셨음에도 제작환경은 딱히 나아지지는 않았습니다. 제작진은 그 분 이름을 내세워 따로 모금하지 않았고, 제 성격상 여기저기 제작비 모금하러 다니기도 쑥스러워 그러지 못해서 프로듀서 김재동 목사님이 모금해 오신 제작비 내에서 해결했습니다. 그런 형편 속에 많은 분들의 우려와 달리 제작은 무사히 마쳤습니다. ■ 아들 이인수 박사의 생전 마지막 고백 기록 ■ 이번 작업에서 또 기억에 남는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로 이 대통령의 쓸쓸한 말년을 제일 가까이 곁에서 지켜보셨던 이인수 박사님과의 인터뷰입니다. '23년 11월 별세하신 이인수 박사님의 인터뷰는 결코 쉽게 성사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작품을 위해 그분의 증언을 꼭 담고 싶었으나, 그분의 체력에 한계가 많으셨던 때라 인터뷰 약속을 잡고 갔다가도 두 세 번 실패하여 헛걸음을 하고 돌아 왔습니다. 인터뷰가 어렵게 되자 이인수 박사님과의 인터뷰는 포기했습니다. 사모님이신 조혜자 여사께서 마치 곁에서 대신 말씀을 전하시듯 하고, 이인수 박사님은 옆에만 앉아 계십사 하는 게 저의 새로운 바람이자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무 약속도 없이 임동진 배우님과 이화장을 둘러 보러 갔다가 이인수 박사님 컨디션이 최상인 것을 발견! 당장 카메라를 켜고 마이크를 연결해 인터뷰를 진행하였습니다. 그때 마침 장비를 가져간 것도 다행이었고, 그게 이인수 박사님의 생전 마지막 인터뷰가 되었습니다. 다시 봐도 당시 이 박사님은 혼신의 힘을 다해 인터뷰에 응해주셨던 모습이 역력합니다. 이 모든 것이 관객들에게 감동을 전해주는 것 같습니다. ■ 신앙인 이승만 재조명 ■ 이승만 대통령이 젊은 시절 선교사들이 전해 준 예수님을 한성 감옥에서 복역 하며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영접한 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난제 앞에서 하나님께 매달렸고, 우리나라 첫 국회를 기도로 시작했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작품에서 비기독교인들을 의식해서인지, 기독교 색채를 빼고 있습니다. 종교를 떠나 그런 이승만의 모습은 인간 이승만을 이끄는 원천적인 힘이었기 때문에 저는 제 작품에서 그런 부분을 다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마지막 기도는 임동진 배우님의 뛰어난 연기력과 맞물려 관객들에게 많은 감동을 선사해 줍니다. ■ 전국 극장 개봉 ■ 드디어 ‘24년 2월 22일! 기적의 시작은 전국 개봉됩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어렵지만, 영화를 만드는 것도 어렵고, 영화를 한 개 극장에라도 걸기도 어렵고, 극장에 걸었다 해도 관객들을 사로잡기에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그 모든 과정에 전문 인력이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저예산 독립영화에서는 이 모든 과정이 한 두 사람의 몫입니다. 전국 극장에서 개봉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전국 극장 개봉을 위해서 제작사들은 적게는 수 천 만 원, 많게는 수 억 원의 홍보비를 씁니다. 저희는 '기적의 시작' 홍보를 위해 쓸 수 있는 금액이 거의 없었습니다. 금액을 밝히기에 민망해 그럴 수는 없지만, 그 금액조차 제작 과정에서 다 소진했기 때문입니다. 홍보를 위해 쓴 금액은 전단지 인쇄에 30만원 가량, 작품을 소개해 주시는 유튜브 분들께 음료수를 사 드리거나 식사 대접을 한 게 전부입니다. 주말에는 감독인 제가 손수 전단지를 챙겨 광화문이나 시청 같은 곳에 가서 전단지를 돌렸습니다. 젊은이들 중에는 전단지에 이승만 대통령 얼굴이 있는 것을 보고 바로 접어버리며 불쾌감을 표현한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수모를 당하면서도 전단지를 나눠 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것이 많은 홍보비 없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원초적인 홍보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SNS 홍보도 했으나 제가 인플루언서가 아니다 보니 효과는 미미했던 것 같습니다. 넉넉잡고 홍보비로 100만 원 정도 썼던 것 같은데, 그런 상황에서 전국 개봉까지 이어진 것은 '기적'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습니다. 어렵게 잡은 서울 두 개의 극장(필름포럼과 허리우드). 시사회 이후 5개월간 상영을 통해 관객 수 천명이 관람하고, 입소문을 듣고 오는 관객 수가 줄지 않자 멀티플렉스에서 이를 눈여겨보고, 일단 전국 10개 극장에서 상영을 시작해 보자고 제안을 준 것 같습니다. 수 많은 난관을 뚫고 드디어 전국에 소개되는 ‘기적의 시작’. 여태까지는 저와 조력자 분들의 힘으로 끌고 왔으나 이제부터는 여러분의 관심과 성원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렇게 극장에 걸게 되었는데 보러 와 주시지 않으면 허무하게 극장에서 내려지게 됩니다. 극장에 와서 봐 주시는 것은 작은 애국입니다. 교회에서 단체관람 와 주시면 좋겠습니다. 조만간 CGV에 예매가 열립니다. 예매를 많이 해 주시면 더 많은 상영관을 확보하여 더 많은 관객 분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독 권순도 올림
    • 주요뉴스
    2024-03-07
  • 이제는 ‘기적의 시작’이다!
    스카이데일리 임명신 기자의 “[기획] 이승만 다큐 ‘건국 전쟁’ ‘기적의 시작’… ‘길 위에 김대중’ 압도”라는 글을 소개합니다. 권순도 감독이 20년 구상 끝에 작년 10월 내놓은 ‘기적의 시작’은 독립영화 특유의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건국 전쟁’ 흥행 속에 역주행 중입니다. 같은 주제의 두 다큐는 상보적이며 상호 심화학습을 가능하게 한다. 필히 두 편 모두 볼 필요가 있습니다. ‘건국 전쟁’과 ‘기적의 시작’은 같은 목표, 다른 매력 건국 대통령 우남 이승만(1875~1965)을 다룬 두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조용한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 2월 1일 개봉한 김덕영 감독의 작품 ‘건국 전쟁’이 주목받으며 4개월 전 나온 권순도 감독의 작품 ‘기적의 시작’도 역주행에 가속도가 붙었다. 두 작품 다 철저히 사료와 증언을 바탕으로 구성된 다큐지만 흐느끼는 관객이 속출할 만큼 뜨거운 반응이다. 두 편의 이승만 다큐가 또 다른 역사 인물 다큐를 압도한 것도 눈길을 끈다. 훨씬 유리한 여건 속에 제작된 김대중 탄생 100주년 기념작 ‘길 위에 김대중’이 개봉 4주 후 12만 관객을 동원한 반면 ‘건국 전쟁’은 개봉 열흘 만에 누적 관객 수 18만 명을 돌파했다. 누적 관객 수 3위, 개봉관 수도 개봉 당초보다 3.3배 늘어난 상태에서 11일 누적 관객 수 24만 명을 넘어섰다. 다큐로선 이례적인 성적이 어디까지 갈지 관심을 모은다. ‘기념관 하나 없는 이승만’이 ‘기념시설 최다의 김대중’을 이겼다는 말까지 나온다. 한편 ‘기적의 시작’은 작년 10월 하순 서울 시내 단 두 곳(종로3가 낙원상가 헐리우드 극장·신촌 필름포럼)에서 개봉된 가운데 주로 각종 애국단체∙교회 등의 상영회를 통해 관람객을 늘려 갔다(현재까지 5000명 정도). ‘건국 전쟁’이 2월 1일 전국 CGV에 걸리고 화제를 부르자‘기적의 시작’ 역시 개봉 약 4개월 만인 22일 CGV 재개봉이 결정됐다. ‘기적의 시작’ ‘건국 전쟁’은 대한민국이 어떻게 세워졌고, 멸망의 위기를 넘어 훗날 선진국으로 도약할 기틀을 구축했는지 조목조목 짚는다. 농지개혁, 문맹퇴치(교육개혁), 안보·경제발전을 담보한 한미 동맹, 자원 빈국의 산업화에 절실한 원자력발전의 토대 마련 등 다가올 산업화가 이승만 대통령 시대에 어떻게 준비됐는지를 두 편의 다큐 영화 는서로 다른 톤으로 설명해 준다. 각각의 장점이 있으며 지루하지 않을 반복 학습 효과가 기대된다. ‘기적의 시작’은 이승만을 다룬 최초의 본격 다큐 영화라는 의미 외에 애국지사로서의 역정과 기독교 신앙의 상관성을 조명한 점도 돋보인다. 창군 및 구국의 영웅 백선엽 장군(1920~2020)과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1931~2023) 박사의 생전 마지막 인터뷰, 원로배우 임동진 목사의 이승만 연기 역시 독보적인 부분이다. 두 다큐는 1천 수백 년에 걸친 왕조 시대와 근대 식민지 시대를 겪은 중세적 공동체에서 자유 민주공화국 헌정 질서 마련이 얼마나 천지개벽할 일이었는지를 묵직하게 일깨운다. 공통된 주제지만 두 감독이 친분이 있거나 사전 협의한 것도 아닌데 내용상 겹치지 않는다. 상보적이며 상호 심화 학습판이므로 둘 다 관람할 가치가 충분하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공산화가 신생국들의 대세였던 시절, 이승만은 현대 국가(자유민주공화국)의 본질과 시스템을 이해한 유일한 한반도인으로 볼 만하다. 두 다큐의 시의성도 각별하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위협받는 오늘날, 정통성 논란은 결국 ‘이승만의 나라’ ‘김일성의 나라’ 양자택일의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한국 현대사를 넘어 세계사적 인물 이승만… 우선 다큐부터 ‘건국 전쟁’ 출연자의 한 사람인 류석춘 전 연세대 교수(전 이승만연구원장)는 연구원이 보관 중인 이승만 1차 자료 100박스에 대해 예산 부족으로 손을 못 대고 있다며 아쉬움을 수차례 토로한 바 있다. 그 자료들은 대부분 40년 망명 생활 중 세계정세를 전하거나 논한 신문·잡지 스크랩과 친필 메모들이라고 한다. 한국 현대사를 넘어‘세계사적 차원에서 연구돼야 할 인물 이승만’이라는 시각에 힘이 실린다. 이승만의 생애는 드라마틱하고 불가사의한 요소로 충만하다. 영화∙드라마 등 대중 서사 장르를 통해 그려질 날이 와야겠지만 일단 다큐가 절실했다. 관련 사실들이 극단적으로 왜곡되거나 묻혀 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교과서에서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고 교과서 밖에선 악마화∙희화화됐을 뿐이다. 해석의 문제 이전에 팩트 자체가 엉터리인 경우도 많다. ‘이승만 죽이기 60여 년’… 가짜 뉴스·역사∙왜곡의 결정판 명저 ‘슬픈 중국’의 저자이자 ‘건국 전쟁’ 첫머리에 등장한 송재윤 캐나다 맥마스터대 교수는 조선일보 칼럼 ‘이승만 죽이기 60여 년, 팩트를 지어 내는 역사가들’에서 “김덕영 감독의 작가 정신과 예술혼이 거짓 뉴스와 허위 정보를 마구 엮어 일방적으로 이승만 악인전(惡人傳)을 집필해 온 역사학계의 고루한 시대착오와 부족 주의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고 평가했다. ‘이승만 죽이기’ 최근 사례로 송 교수는 “(역사학자인)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박태균)”가 TV 교양 프로에서 이승만의 1952년 대선 승리에 대해 기호 1번을 독점해 대다수 문맹 유권자 몰표를 유도한 결과라는 취지로 설명한 점을 들었다. 이어 간단한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그게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는 것과 김 감독이 당시의 선거 포스터를 꼼꼼히 뒤져 이를 입증해 냈음을 짚었다. 이승만은 기호 1번이었던 적이 없다. 이승만에 얽힌 대표적 오해인 6·25전쟁 발발 직후 라디오방송 틀어 놓고 도망갔다는 미확인 소문이 오늘날까지 조롱과 저주 담긴 별명 ‘런Run승만’으로 살아 있다. 김 감독의 ‘건국 전쟁’에서 ‘한강 다리 폭파’ ‘3.15 부정선거’ ‘하와이 도피설’ 등을 바로 잡을 증거들이 제시됐다. 또 한4·19 이후 이승만의 행보야말로 ‘독재자’ 낙인이 왜 부당한지에 대한 결정적 증거다. 자신과 무관한 부통령 선거에 대해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난 무일푼의 독재자? 그런 인물이 과연 독재자일 수 있는지 ‘건국 전쟁’과 ‘기적의 시작’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묻고 있다. 한국인이 처음 만난 이승만… ‘건국 전쟁’ 감동 후기 이어져 조지워싱턴대(학사)∙하버드대(석사)∙프린스턴대(박사) 출신의 이승만이 얼마든 취득 가능했을 미국 시민권을 마다한 채 40년간 무국적자의 불편함을 견딘 사실에 김 감독은 주목했다. 아울러 미국 내 이승만의 족적이 그간 어떻게 왜 지워졌는지 현지 교민들 증언으로 전해진다. 1953년 정전협정 1년 후 미국 방문 당시 자유의 투사로 칭송받으며 뉴욕 시가를 대대적으로 퍼레이드한 영상은 ‘건국전쟁’을 통해 처음 세상에 공개됐다. 이승만이 공산주의에 맞설 냉전 구도의 불가피성과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미국 등 서방세계 조야에 열렬히 설명∙설득한 점도 부각된다. 그것이 대한민국 탄생 비밀의 한 측면이다. 공산주의의 본질·실상에 대부분 무지하던 시절이었다. 개봉 초기 ‘건국전쟁’ 포스터 사진만 네이버 영화면에 누락돼 있어 “좌편향 문화계의 이승만 지우기”라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관람객 평점은 10점 만점에 육박했다. “덕분에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어 감사하다” “공산화 저지의 공로만큼은 이승만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취지의 감상 후기가 가장 많다. 조선일보가 김 감독을 자세히 인터뷰한 것 또한 눈길을 끈다. 여기서 김 감독은“(이승만) 공부를 시작한 뒤 큰 반성을 하게 됐고 그를 비롯한 건국 세대에 대한 죄송함을 영화에 담았다”고 밝혔다. 2012년 유튜브에 유포된 악의적 이승만론(論) ‘백년 전쟁’이 오히려 일부 네티즌이 진실 찾기를 시작한 계기가 되었던 것과 흡사한 경우라 할 것이다. 북한은 왜 그렇게 ‘이승만 타도’에 집착했을까… 586세대 김 감독의 각성 김 감독은 1950년대 동유럽 국가들로 보내진 북한 전쟁고아들을 조명한 다큐‘김일성의 아이들’(2020)로 유명하다. 1만명 가량 동유럽에 분산 위탁돼 자라다 스탈린 사후 격변 속에 집단귀국 당한 후 김일성 유일 체제를 위해 잊혀진 존재들이다. 김 감독은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북한에 관심을 가지다가 1990년대 중반까지 평양에 ‘이승만 괴뢰도당 타도’구호가 있었음을 알게 됐으며 그들이 왜 그렇게까지 이승만 타도에 집착했는지 궁금해졌다. 김 감독이 작품 구상 및 제작 과정에서 깨닫게 된 것은 이승만을 향한 집요한 폄훼가 “오랜 세월 좌파들의 선동에 의한 부당한 평가”와 “북한의 공작” 탓이 컸다는 사실이다. 김 감독 자신이 북한에 호감 내지 환상을 가진 586세대 일반의 감성과 역사관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에 그 폐해 또한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거짓의 선글라스를 벗으면 평생 대한민국만을 위해 살았고 애국애족의 마음을 행동으로 실천했던 한 노인의 모습이 보일 것”이라며 울먹였다. 한 네티즌의 댓글 “대한민국이 버린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위대함은 대한민국 국민만 모른다. 참담한 현실에 부끄럽고 한없이 죄송하다”는 심정과 고스란히 겹친다. ‘건국’ ‘산업화’ 없이 ‘민주화’는 불가능… 그러나 뒤틀린 역사교육 김 감독의 말대로 이승만은 “(파고들수록) 100년 앞을 내다보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한 한국사의 유일한 인물”이다. 작품 속에서 그렉 브레진스키 미 조지워싱턴대 교수가 “미래 비전과 안정된 보장 시스템이 존재해야 건국이라 할 수 있다”고 강조했듯이 “바로 그걸 이승만이 해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이란 결코 일본의 패망으로 당연히 얻어진 게 아니었다. 김 감독은 “이승만이 깔아 놓은 레일 위에 박정희의 경제 개발이란 기관차가 달린 것”으로 두 지도자의 시대를 요약한다. 핵심적인 통찰이다. 산업화를 통한 중산층의 성장 없이 이뤄지는 ‘민주’란 ‘인민 민주주의’에 불과하다.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중국(중화인민공화국)도 모두‘민주’를 전면에 내세운다.문재인 정부 시절 현행 헌법에서‘자유’를 삭제하고자 시도한 행위의 의미와 그 궁극적 지향점이 무엇인지 많은 사람이 알아차리게 됐다. ‘독재자’라는 꼬리표가 3대 세습체제 속에 신격화된 북한 권력자들에게 붙는 대신 변명없이 자진 하야한 이승만에게 당연한 듯 붙는 게 온당한지 이제라도 저마다 자문해야 할 시점이다. ‘이승만=살인마’의 관점을 일반화시키면서 제주 4.3의 비극이 대한민국 수립 및 그것을 위한 한반도 유사 이래 최초의 보통 선거(5.10총선) 저지를 위한 남로당의 무장 폭거에서 출발한 것임은 도외시한다. 이것이 지난 30년 우리나라 제도권 안팎의 역사교육 현실이다. 놓칠 수 없는 ‘기적의 시작’ 권 감독의 20년 구상 끝에 태어난 ‘기적의 시작’은 공산주의가 유라시아 대륙을 뒤덮었던 시절 그 끝자락 한반도에서 어떻게 자유 민주공화국이 수립·유지될 수 있었는지, 이승만 덕분에 가능했던 대한민국탄생의 기적과 그것이 어떻게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토대가 됐는지에 초점을 맞췄다. 독실한 크리스천의 면모도 조명했으며 원로배우 임동진의 이승만 재연으로 다큐 이상의 감동을 더했다. 백선엽 장군 인터뷰와 ‘기적의 시작’ 개봉 며칠 후 별세한 이승만의 양자인 이인수(전 명지대 법정대 학장) 박사의 영상은 진귀한 역사적 자료가 됐다. 본인들의 생전 마지막 공식 기록이다. 대통령 하야 후 전주 이씨 문중의 주선으로 이승만 슬하에 30세때 입적한 이 박사와 그 가족은 지난 60여 년간 이승만 죽이기의 실질적 희생자였다. 권 감독에 따르면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한 이 박사가 기적처럼 촬영에 임했다고 한다. 한 마디 한 마디 온 힘을 다하듯 간신히 해독 가능한 발음으로 건국 대통령의 애국 열정과 말년의 부자(父子)인연을 증언한 모습이‘기적의 시작’에 실려 있다. 특히 망명 생활의 근거지였던 하와이에서 몇 개월 휴식한 이승만 내외가 귀국하려던 당일 한국 정부로부터 하와이 잔류를 종용당한 장면, 이후 우울 속 건강 악화로 현지에서 임종을 맞게 된 과정이 생생하게 회고됐다. ‘건국전쟁’에서 하와이 망명설이라는 거짓 뉴스 유포의 전후 맥락을 짚었다면 ‘기적의 시작’은 당사자들의 내면을 전하고 있다. 영화 ‘서울의 봄’으로 현대사 공부? 화제의 이승만 다큐 두 편은 1300만 관객을 동원한 ‘서울의 봄’에 맞선 체제 정당성 대결의 최전선에 있다. 총선을 약 2개월 앞둔 시점에서 또 하나의 선거전이 될 수 있다. ‘서울의 봄’은 대다수 관객에게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허구의 틀을 빌어 사실상 실존 인물과 역사를 거꾸로 해석한 상업영화다. ‘서울의 봄’이 대한민국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 ‘기회주의자가 득세한 적폐의 나라’라는 인식을 강화하도록 유도하는 반면 ‘건국 전쟁’과 ‘기적의 시작’은 대한민국 헌정사의 절체절명 위기와 우여곡절 속에서 이승만이라는 한 애국자가 지향한 가치를 되새긴다. 이승만이 깔아 놓은 레일(자유민주 헌법) 위에 박정희의 산업화(근대화)가 가능했다는 관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1979년 10.26으로 중단될 뻔한 산업화를 완결짓고 민주화 시대를 예비한 게 전두환의 신군부, 즉 제5공화국이다. 그렇다면 영화 ‘서울의 봄’이 기도한 신군부 악마화는 대한민국 헌정사의 부정 아닌가. 이원석 검찰총장이 몇몇 동료들과 ‘서울의 봄’을 관람한 인증 샷과 소감을 남겼다. 기존 민주화운동 세력의 신군부 서사에 충실한 발언이었다. 건국의 역사를 제쳐둔 채 민주화를 말할 수 있을까. ‘건국 전쟁’ ‘기적의 시작’ 관람 권유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 등 정부 요인과 ‘73년생 한동훈’ 등 여당 인사들의 관람 필요성이 역설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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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6
  • 3.1 독립운동 정신으로 4.10 총선 승리하자!
    ‘한국 NGO연합’ 및 ‘자유정의시민연합’의 글을 소개합니다. 오늘은 3.1독립운동 105주년 기념일이다. 이번 4.10 총선에서 3.1 독립운동의 정신으로 좌파와의 싸움에서 반드시 승리하자. 4.10 총선은 대한민국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중차대한 선거다. 선거라기보다 제2의 6.25와 같은 선거전쟁이다. 4.10 전쟁에 나서는 국민들은 죽을 각오로 선거에 임해야 한다. 나 하나쯤의 자만은 바로 죽음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경각에 달린 나라를 구해야 한다. 자유대한민국이 지속적인 성장과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4.10 총선에서 반드시 자유 우파세력이 국회 다수석이 되어야 하는 것은 진정 역사적 대업이고 사명이다. 문재인의 5년과 더불당이 다수당으로 국회를 농단한 8년 동안 우파들은 충분히 경험했다. 다시는 무도한 반 대한민국 세력이 정부와 국회를 장악하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국민적 합의는 이미 충분히 이루어졌다. 그러나 만에 하나 아직도 안일하고, 나약한 국가 정체성으로 대한민국 이념과 사상에 대해서 혼란스러운 사람들이 있다면 차제에 분명하고 확고한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갖도록 분발해야 할 것이다. 영화 ‘건국전쟁’을 봤다면 자유의 가치를 정말 귀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유의 소중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슬프고 안타깝다. 이번 4.10 총선에서 야당은 좌파시만단체와 협약을 맺어 그들에게 최소 10석의 비례대표 자리를 주기로 합의한 모양이다. 그들 대부분은 친북, 종북단체 출신들이며, 이념 측면에서 북한과 궤를 같이 하는 세력들이다. 따라서 이번 4.10 총선에서 야당을 많이 지지하게 되면, 극단적으로 친북, 간첩세력들이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다. 이는 정말 있어서는 안되는 대한민국 최악의 시나리오다. 1975년 4월 30일 월남은 공산화되었다. 당시 미군 철수 후 미군이 남기고 간 많은 최신 무기와 보급품, 병력에서도 월맹군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던 월남이 왜 공산화 되었을까? 당시 월남은 월맹에 비해 정신력에서 이미 패했다. 그리고 정부, 군, 정치판에 월맹의 간첩들이 요소요소에 포진해 있었다. 그것도 고위직에 자리했다고 하니 월남은 월맹의 손바닥 위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대한민국은 어떨까? 아마 지금의 대한민국도 그 당시의 월남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미 대한민국에도 북한 간첩이 35만이 침투해 있다는 소리가 탈북한 북한 고위인사들을 통해 공공연히 흘러나오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의 국민들은 사상이나 이념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침묵은 동조와 마찬가지다. 간첩들의 생각에 동조하는 이 나라의 미래는 어떠할까? 오늘은 3.1 독립운동 105주년 기념일이다. 그러나 독립운동 기념일행사를 할 정도로 나라의 상황이 여유롭지 않다. 해서 오늘 우리는 주사파와 친북세력들을 척결하기 위한 제2의 독립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여 4.10 총선에서 좌파세력들을 패퇴시킬 것을 천명한다. 여기에는 한 치의 머뭇거림도 있어서는 안 된다. 유관순 열사와 안중근 의사 등 위대한 선배들의 뒤를 이어 좌파세력을 척결하고, 자유우파세력 모두가 한 마음으로 4.10 총선 승리를 위해 진군하기를 간절히 촉구한다. 2024년 3월 1일 한국NGO연합/자유정의시민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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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2

실시간 강석종 칼럼 기사

  • 강석종 칼럼,"전 외교부장관 강경화의 시아버지 ‘이기을 교수’의 독립 유공자를 취소하라!"
    지난 7월 2일 국가보훈부가 '독립유공자 서훈 공적심사위원회 운영 규정'을 대폭 개정해 친북 논란 등에 대한 기준을 명확히 하고 가짜 독립유공자에게 주어졌던 서훈을 박탈하고 동시에 그간 공적을 인정 받지 못하고 소외됐던 이들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하는 국민 눈높이에 맞추는 '새판짜기' 작업에 착수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첫째는, 독립유공자 심사 운영의 변경입니다. 보훈부는 친일 행적 등이 있으면서도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사람을 가려내기 위해 2019년부터 독립유공자 공적 전수조사 사업을 진행해 왔습니다.애초 2019년 7월까지 초기 서훈자 1,500여 명에 대한 1차 조사를 마무리할 예정이었으나, 전수조사에 대한 객관성과 공정성 시비가 불거지면서 일정이 크게 지연됐습니다. 독립 유공자의 희생과 공헌을 온전하게 존중하도록 관련 운영 규정을 포함한 심사기준을 대폭 변경할 예정입니다. 그동안 보훈부는 예비심사 격인 제1공적심사위원회와 제2공적심사위원회가 2심 체제로 심사하여 운영해 왔는데, 운영 규정 개정에 따라 심층 논의가 필요한 사안만 확대하여 다루는 특별분과위를 신설해 쟁점 안건을 기존 2심제에서 사실상 3심제로 가면서 예비심사 단계의 과중한 업무량도 덜어낼 예정입니다. 여기에는 역사 전공자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법률 등 다양한 전문가 위원들도 위촉하여 보다 더 명확한 근거를 토대로 유공자를 선정하게 됩니다.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이들 가운데 친북 논란 등 사회적 갈등을 일으킨 부분에 대해 기준을 명확히 하기로 했습니다. 친일 관련 논란도 함께 고려될 전망입니다. 박 장관은 이날 오전 페이스북에서 “건국에 공로가 뚜렷하거나, 국가의 기초를 공고히 한 공적이 있는 사람에게 건국 훈∙포장을 주는 것”이라며 “항일 운동 했다고 무조건 OK가 아니다.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건설이 아니라 북한 김일성 정권 만드는데 또는 공산주의 혁명에 혈안이었거나 기여한 사람을 독립 유공자로 받아 드릴 대한민국 국민이 누가 있겠냐? 이는 진보 보수에 따라 좌우될 것이 아니라 자유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고 강조했습니다. 둘째로, 어떤 사람이 공적 재검토 대상일까요? 보훈부 관계자에 따르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이 재검증 대상인지는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공적 재검토 대상에는 손혜원 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의 부친 故 손용우(1923∼1999년)씨가 포함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손씨는 과거 보훈 심사에서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한 이력으로 인해 6차례 탈락했습니다. 하지만 2018년 변경된 심사 기준을 적용받아 7번째 신청 만에 독립유공자로 선정됐습니다. 정부 관계자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회주의 운동을 판단하는 기준이 달라지거나 규정이 모호해졌다”며 “독립운동이 오늘날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한 것이었는지, 공산주의 국가 건립을 위한 것이었는지 기준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보훈부 관계자는 “독립 유공자에게 주어지는 서훈은 건국훈장인데 정반대로 대한민국 건국과 대한민국의 기초를 닦는 일을 방해한 이에게 이 훈장이 주어진 것이 옳은 일인지 따져보겠다는 취지”라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허위 논란’이 제기된 유공자도 들여다 봅니다. 1970년대 이전에는 보훈처가 아닌 문교부와 총무처 등에서 중복 포상이나 부실한 심사로 ‘부적격자’가 서훈을 받은 사례가 많았습니다. 故 김원웅 전 광복회장의 부모 김근수(1912~1992)씨, 전월순(1923 ~ 2009)씨의 공적도 재검토됩니다. 두 사람의 공적 조서에 나온 출신지, 활동 시기 등이 달라 과거 허술한 행정을 악용한 '가짜 광복군'이 아니냐는 논란이 제기되었기 때문입니다. 김 전 회장의 부친 김근수 씨는 1963년 대통령 포창을 받은 데 이어 1977년에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습니다. 모친인 전 씨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공적조서에 나온 출신지, 이름, 활동 시기 등이 달라 공훈 기록이 허위일 수 있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습니다. 문재앙 정부때 2021년 1월 국가보훈처(현 보훈부)는 이들을 조사한다고 했다가 “착오였다. 서훈 자격에 문제가 없다”고 번복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정권 때 어느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억울하고 분하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일제시대때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상해 임시정부까지 재산을 털어서 독립운동을 했는데, 독립운동을 했다는 증거는 있지만 해방전 3년 행적이 명확하지가 않아서 친일이라고 하더랍니다. 폐렴으로 피를 토해서 상해에서 빨리 데려가라고 기별이 와서 데려온 지 4년 만에 사망을 했답니다. 그래서 친일자 명단 및 모든 서류를 준비하여 친일이 아니라는 입증과 함께 그 당시 4년 동안 폐렴으로 고생하다 사망한 증거를 접수해도 서훈을 주지 안고 손혜원 아버지에게 서훈을 주더랍니다. 그 당시 상해에서 독립운동가들과 찍은 사진과 돈을 몰래 배달했던 사람 등이 증거와 증인으로 있는데, 그분은 서훈을 못 받고 공산당 청년 당원이었던 손혜원 아버지가 받았답니다. 이것이 말이 됩니까? 진짜 독립운동가는 서훈을 못 받고 독립운동한 증거도 뭣도 없는 김원웅의 아버지는 셀프 유공자 지정을 받았다는 의혹이 있습니다. 유공자 서훈 박탈로 될 일은 아니죠. 광복회장이라는 직책을 이용한 직권남용은 아닌지를 검토해야 합니다. 보훈부는 “대국민 공개검증 절차에 국민 참여를 보장할 것”이라며 “중복·허위 공적 등 공적 이상자에 대해 서훈 취소 절차를 조속히 진행해 가짜 독립 유공자 논란을 종식할 계획”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공개검증 결과 공적이 거짓으로 밝혀지면 관련 법에 따라 공적 심사위 및 국무회의 심의 및 의결을 거쳐 서훈이 취소됩니다. 셋째로, 그동안 공적을 인정받지 못한 대상자는 누가 있을까요? 보훈부는 “공과(功過)가 함께 있는 독립 운동가에 대해서도 정책 연구와 토론회 등을 거쳐 재평가 방안이 있는지 찾아볼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독립운동의 공이 뚜렷함에도 친일 논란으로 심사에서 여러 차례 보류된 인물들도 재검토됩니다.그 중에서 대한민국 초대 농림부 장관이자 좌익 계열 독립운동가였던 죽산 조봉암(1898∼1959)과, 구한말 문신이자 임시정부 고문을 지낸 독립운동가 동농 김가진(1846 ∼1922)과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1864 ~ 1921)에 대해 서훈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조봉암 선생의 유족들은 그를 독립 유공자로 인정해 달라며 보훈부에 세 차례 요청했지만, 보훈처는 친일 흔적이 있다는 이유로 유족의 요청을 반려해 왔습니다.김가진 선생의 장례는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장으로 치러졌으나 100년이 지나도록 유해는 돌아오지 못했고 서훈도 시행되지 않고 있습니다.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최근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역사적인 인물에게 그림자가 있더라도 빛이 훨씬 크면 후손들이 존중하고 교훈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며 “그런 측면에서 누구든지 예외 없이 접근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아울러 보훈부는 선교사·의사·교사 신분으로 독립운동에 기여한 외국인과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돼 옥중 순국한 이들에 대한 심사 기준을 새롭게 마련할 방침입니다. 독립운동 자금 지원 활동에 기여한 이들도 독립유공자로 포상하는 방안을 적극 추진하기로 했습니다.박민식 장관은 “그동안 논란이 된 독립유공자 포상의 적절성 및 부실 심사 등이 해소될 것으로 기대한다”며 “독립유공자의 공적이 온전하게 평가받고 서훈의 영예성이 담보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전 외교부장관 강경화의 시아버지 ‘이기을 교수’의 독립 유공자를 취소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2020년 7월 1일 친중 친북 문정권의 행보는 구국 영웅들을 홀대하면서 강경화 외교부장관의 시아버지 이기을 교수가 독립 유공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그 어디에서도 말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동안 강경화 외교부장관의 시아버지 이기을 교수는 이미 일본군 학병 이력으로 독립유공자 심사에서 탈락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 학병으로 독립군들을 토벌한 자를 문재앙 정부에서 독립 유공자가 된 것은 특혜가 아닙니까? 이것이 공정입니까? 이것이 정의입니까? 이것이 나라입니까? 이것이 저들이 말한 한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나라였습니까? 이기을 교수의 국가 유공자 등록을 취소하며, 전 국가보훈처장 박삼득은 조사하시기 바랍니다. 독립유공자가 되면 어떤 혜택이 있을까요? 독립유공자가 되면 그 유족은 매월 74만원의 보훈 급여를 받고, 임대주택을 우선적으로 공급 받고, 국립 묘지에 안장되는 혜택을 받습니다. 독립 유공자와 국가 유공자는 어떻게 다를까요? 독립유공자(獨立有功者)는 일본제국의 조선보호국화-일제강점기에 민족의 국권 수복을 위하여 여러 민족운동을 전문적으로 하던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며,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라고 합니다. 국가유공자(國家有功者)는 대한민국의 제도상 국가를 위하여 희생하거나 공헌한 사람으로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등에서 그 적용 대상자로서 규정한 자를 말합니다. 대한민국 헌법은 국가유공자를 상이군경, 전몰군경과는 별개로 열거하고 있습니다. 시일이 걸리더라도 이번에는 분명히 해야 합니다. 단 한 명이라도 가짜와 친북 유공자를 둔 채로는 대한민국이 바로 설 수 없습니다. 가짜 독립유공자를 가려내는 것이 역사·바로잡기라면 이른바 ‘민주유공자’ 면면과 그들의 공적 확인은 현대사의 재평가·재정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공적 확인도 안 되는 판에 민주당의 4·19와 5·18민주화운동 외의 민주화운동과 관련 민주유공자 예우 법안이 발의된 것은 우려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노동, 반(反)외세, 종북 통일 운동 등으로 정부 보상을 받은 829명을 국가유공자로 대접하자는 게 법안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행적 기록에 대한 보훈부의 열람 요구조차 ‘개인 정보’라는 이유로 거부당하고 명단도, 공적도 깜깜이인 채로 유공자 대우는 말이 안 됩니다. 가짜 독립유공자 가려내기 못지않게 민주유공자에 대한 바른 대처도 중요합니다. 정부가 가짜 논란 및 친북 이력이 있는 독립유공자 공적을 재검증하기로 하는 것은 ‘허위 조작자’와 ‘북조선 정권 수립 적극 기여자’를 가려 내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나라가 제대로 돌아 가는 듯 합니다. 5∙18 가짜 유공자들도 빠른 시일 내에 솎아 내어서 재정비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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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07
  • [뉴스워크]7월5일(수)“한국자유총연맹 윤석열대통령 발언, ‘반국가 세력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지난 6월 28일, 1954년 6∙25전쟁 직후 결성된 320만 회원을 가진 한국자유총연맹 창립 제69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한 윤석열 대통령이 축사에서 “⋯조직적으로 지속적으로 허위 선동과 조작 그리고 가짜뉴스와 괴담으로 자유 대한민국을 흔들고 위협하며 국가 정체성을 부정하는 세력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또 돈과 출세 때문에 이들과 한편이 되어 반국가적 작태를 일삼는 사람들도 너무나 많습니다.이를 위해 우리는 올바른 역사관, 책임 있는 국가관 그리고 명확한 안보관을 가져야 합니다. 왜곡된 역사의식, 무책임한 국가관을 가진 반국가 세력들은 핵 무장을 고도화하는 북한 공산집단에 대하여 유엔안보리 제재를 풀어달라고 읍소하고, 유엔사를 해체하는 종전선언을 노래 부르고 다녔습니다. 북한이 다시 침략해 오면 유엔사와 그 전력이 자동적으로 작동되는 것을 막기 위한 종전선언 합창이었으며, 우리를 침략하려는 적의 선의를 믿어야 한다는 허황된 가짜평화 주장이었습니다. ⋯ 자유 대한민국의 국가안보가 치명적으로 흔들린 상황이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현직 대통령이 자유총연맹 창립행사에 참석한 것은 1999년 김대중 대통령 이후 24년만이며, 김대중은 당시 레드 콤플렉스 때문에 참석한 것입니다. 그 뒤로 대통령들은 관변단체 성격의 자유총연맹 행사에 공개적으로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문재앙 등을 겨냥해 ‘반국가 세력’, ‘허황된 가짜 평화 주장’이라고 직격했습니다. 강경 보수 진영에서 문재앙을 공격하던 용어가 현직 대통령의 입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때문에 윤석열 대통령이 자유총연맹 창립 행사에 참석해 “반국가 세력”이라는 발언을 한 것은 분명한 정치적 의도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 29일 문재앙의 청와대 출신 더불당 소속 국회의원 21명은 기자회견을 열고 ‘반국가 세력’ 발언을 한 윤석열 대통령을 향해 “본인 생각이라면 국민 앞에 사과해야 한다”며 반발했습니다. 지난 29일 홍준표 대구시장은 윤석열 대통령이 문재인 정부의 대북 기조를 거론하면서 '반국가 세력' 발언에 대해 “우리는 안보를 무장해제 해버리는 동안 북한은 강화했으니 국가 안보를 강화하자는 취지에서 (대통령이) 하신 말씀을 꼬투리 잡으면 안된다. 자신들이 반성을 해야 한다”며 비판을 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중국을 찾아가 중국이 요구하는 3불 정책을 내고, 군사주권을 포기했으면 그게 반국가 세력이 아니냐? 국가안보가 최우선인데 국가안보에 위해를 끼쳤다고 하면 그건 반국가 세력이 맞다. 문재인 정부 5년동안 남북 군사합의로 얼마나 많은 무장해제를 했느냐? 전방 GP를 파괴하고, 매설된 지뢰를 다 제거해주고, 경기도 곳곳에 도로 놔서 대전차 내려오면 막는 장애물을 다 제거해주고, 그것이 반국가 행동한 것 아니냐?”고 일침을 가했습니다. 대통령실도 30일 윤석열 대통령이 자유총연맹 행사에서 발언한 ‘반국가 세력’에 대해 더불당이 ‘극우’라고 공격하자 “윤 대통령 발언 중 무엇이 사실과 다른지, 자신들은 어떤 세력들인지 먼저 설명해 보라”며 반박했습니다. 유엔사가 종전선언을 통해 해체되면 북조선이 남침했을 때 유엔의 자동 개입이 무산되고, 오히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중국이나 러시아가 북조선을 지원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비핵화 종전선언 주장은 우리의 안보 레버리지를 엄청나게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반국가세력 언급에 좌파들이 난리법석입니다. 이것은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밀리면 죽는다는 각오로 총체적 비난을 퍼붓고 있습니다. 그만큼 좌파들의 폐부를 찌르는 발언이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이 밀리면 안됩니다. 조금이라도 양보하거나 사과하는 틈을 보이면 대패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국민통합이란 좌파나 간첩과 같은 반국가 세력들과 통합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문재인을 향해 ‘반국가 세력’이라고 직격한 것은 문재앙을 이대로 두면 ‘국민의 절반 대통령’도 아닌 ‘30-40% 대통령’으로 계속 남게 되는 것이며, 현재의 국정 운영이나 내년 총선이 순조롭지 않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문재앙과의 정면 대결 및 심판, 다시 말해 사법적으로 손보겠다는 신호탄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윤석열 대통령이 언급한 반국가 세력은 어떤 자들일까요? 첫째는, 친중, 종북 주사파, 문죄인 정권이라 생각합니다. 그들은 남북한 6.25 종전선언을 하자면서 마치 노래 부르듯 미국과 유엔 등에 가서 주장한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종전선언을 하지 않아서 남북한 군사적 대결 국면이 있다는 오해를 유발할 기만적 행위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종전선언하면 마치 금방이라도 평화가 찿아 올 것처럼 얘기하는 그들이었습니다. 남북한 평화가 종전선언이란 종이 한 장에 이뤄지고 성사될 일입니까? 국가의 안보와 평화는 전쟁을 억제하는 군사적 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지, 종전선언 한다고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직설적으로 문재앙은 간첩이었고, 문정권이 해왔던 모든 통치 행위는 반국가적 통치 행위였다는 것을 명확하게 정리하고 나가야 합니다. 앞으로도 반국가 세력들에게는 응징하겠다는 의지를 보여 줄 필요가 있습니다. 문재앙과 그 일당들이 한 행동들이 북조선이나 중공이었다면 이는 간첩이나 반역자로 총살형에 처해졌을 것입니다. 둘째는, 민노총 세력입니다. 노조 간부들이 주동이 된 창원 간첩단 세력에서 보듯 노조 활동을 빙자하여 북조선와 교신하고 만남을 통하여, 북조선의 대남투쟁 전략을 지령받은 악질 간첩 세력입니다. 윤석열 정부를 전복시키고 친중, 종북 정권을 세우고자 하는 북조선의 전략에 포섭된 민노총 간부의 조직적인 간첩 활동입니다. 사태가 이러하니 그들도 완전한 반국가세력입니다. 문재앙 주사파 정권의 5년간 국가기관과 사회에 주사파 공산세력이 너무나 퍼져있는 현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셋째는, 전교조와 좌파성향의 시민단체와 환경단체도 반국가 세력입니다. 그들은 건전한 사회의 풍속을 해치고 4대강 개발 성과를 부인하며 탈원전에 편승하여 나라의 발전과 성장을 저해한 세력입니다. 최근에는 일본의 후쿠시마 오염수가 인체에 무해하다는 원자력협회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광우병 사태처럼 거짓 소문과 가짜뉴스를 남발하는 반국가 세력입니다. 우리나라의 환경단체는 괴담 제조기입니다. 괴담을 지령한 곳이 부조선 통전부입니다. 시민단체와 민노총 등이 북조선의 지령을 받아 그대로 퍼뜨리고 있습니다. 괴담에 동조하고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자들을 경찰은 조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괴담을 퍼뜨리는 시민단체의 지원을 중단하시기 바랍니다. 넷째는, 합법적인 국민의 선택에 의한 윤석열 정부를 부인하는 자들이 반정부세력이고 반 자유 민주세력들입니다. 윤석열 정부를 부정하고 특히 북조선 김정은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세력이 있다면 그 세력이 바로 반국가 세력임이 틀림없습니다. 주로 좌파성향이 짙은 토착 세력으로서 자유 민주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불만 세력들입니다. 윤석열 정권의 탄핵과 퇴진과 전복을 주장한다면 이론의 여지없이 반국가 세력이 틀림없습니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언론의 자유가 있다고 하지만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파괴시키려고 하고, 그들의 사상이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 사상이라면 반국가세력으로 처벌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문정권과 민주당 그리고 민노총, 전교조 등 그 추종세력들은 모두 반국가세력으로 판단, 구체적이고 후속적인 조치가 병행되어야 합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반국가 세력’이라고 한 것은, 도둑을 ‘밤손님’이라고 하듯이, 또는 양상군자(梁上君子)로 칭하는 것과 같은 예(禮)의 표현입니다. 반국가 세력들을 예로써 받들거나 상대할 무리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나라와 민족에 대한 반역자들입니다. 불효불충불인부덕(不孝不忠不仁不德)한 자들을 어찌 예로써 대하는 것입니까? 이들이 그동안 진보라는 이름을 내세우며, 대한민국을 노리고 있습니다. 이들은 북조선과 중공에 머리를 조아리며, 대한민국을 노예국가로 만들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자신의 정체를 숨기며 살아 왔습니다. 이들은 반국가 세력이 아니라 ‘간첩’들이며, ‘빨갱이’들입니다. 이들이 지금 더불당과 진보당 안에 모여 있는 것입니다. 미국이나 북조선 그리고 중국의 경우에 이런 정도의 반국가적 행위를 한 경우에는 대부분이 사형입니다. 우리나라도 반국가 세력들과 이들의 행위에 대하여 엄정한 잣대로 처벌해야 할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국기를 흔드는 반국가 세력에 대한 윤석열 정부의 강력한 응징을 촉구합니다. 윤석열 정부는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5년이 짧습니다. 국가와 민족의 바른 정기(情氣)를 세워 나라를 발전시키고 세계만방에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드러내어 후손들에게 자긍심을 물려줘야 합니다. 자유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지키고 확고한 안보관과 국가관으로 G2 국가로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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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05
  • 강석종 칼럼,“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5대 오해와 진실”
    이승만은 조선 왕조 태조 이성계의 18대손이자 태종의 장남이며, 세종의 형인 양녕대군의 다섯째 아들 장평정 이흔의 15대손이었습니다. 양녕대군이 동생인 세종에게 왕의 자리를 넘겨 주지 않았다면, 이승만은 그 당시 고종(1852 ~ 1919년)의 위치에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73년 전인 1948년 8월 15일, 제헌 헌법(7월 17일)과 함께 출항을 시작한 대한민국호의 첫번째 선장은 바로 우남 이승만 대통령입니다. 그는 애국심과 민주주의 정신을 가진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으며, 그의 삶에 잘못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대한제국이 아닌 대한민국의 탄생에 앞장섰고, 일평생 기독교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을 원수로 여기는 북조선의 공산 집단과 이들을 추종하는 대한민국의 친북 좌파, 종북 주사파 추종자들은 이승만은 독재자였고, 부정선거로 당선되었으며, 남한만 단독으로 정부를 수립해서 분단의 원흉이라고 주장하며, 사실을 왜곡시키고 그의 업적을 폄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5대 왜곡에 대해서 살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이승만은 친일파다’라는 말이 사실일까? 왜곡일까? 이승만은 30살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1907년에 조지워싱턴 대학(George Washington University)에서 학사를 취득하고, 하버드대학(Harvard University)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후 1910년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미국 유학 5년만에 이룬 쾌거였습니다. ⓵이승만은 수십년동안 미국의 정치인, 외교관, 언론인, 군인들에게 강연한 내용을 책으로 출판했는데, 일본의 속내를 폭로한 것입니다. 그 책의 제목은 〈JAPAN INSIDE OUT〉 이었으며, 내용의 핵심은 “일본이 조선반도를 집어 삼켰으니, 그 다음은 만주를 먹고, 중국을 침략하고, 여러 나라를 침략한 다음에는 태평양을 건너 미국을 쳐들어 올 것이다. 미국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일본과 한판 승부를 벌여야 할 것이다. 일본의 팽창을 막고, 일본을 다시 일본 본토로 돌아 가게 하려면 조선을 독립 시켜라!”는 것이었습니다. ⓶6∙25 전쟁 당시에 일본이 참전한다고 하자 “일본이 개입하면 공산당을 향한 총구가 일본으로 향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⓷1965년 7월 21일 밤 10시 30분, 이승만 대통령의 영결식이 끝나자 이승만의 유해를 실은 비행기가 대한민국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하와이를 벗어나자 “이 비행기는 고인의 뜻을 기려 직선 항로 대신 웨이크 아일랜드를 경유하는 우회 항로로 비행할 예정입니다. 승객 여러분들의 이해를 바랍니다.”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습니다. 왜 가까운 거리를 놔두고 먼 곳을 돌아서 가려고 했던 것일까?이 사실은 1965년 7월 21일 하와이에서 발간된 스타 블리튼 신문에도 실렸습니다. 그 이유는 영혼이 빠져나간 그의 마지막 육신조차도 일본을 거치지 않겠다는 “죽어도 일본 땅 위로는 날지 않겠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마지막 정신이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을 보내는 미국의 예우였습니다. 평생 군국주의 일본과 맞서 싸웠던 이승만 대통령이었습니다. 그 싸움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는 마지막 숨이 다한 순간까지도 일본의 하늘을 날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죽어서도 나라의 독립을 위한 영혼이 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강한 반일 감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 하라는 미국의 압력에 지속적으로 저항했습니다. 프랑스는 4년동안 나치 점령을 받았는데, 프랑스의 영웅 드골도 1945년 구성한 임시정부에 ‘나치 괴뢰정권’이라는 평가를 받은 비시 정부 가담자들을 포함시켰습니다. 그 이유가 나치 협력자들을 전부 축출할 경우 나라를 운영하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미군정에서 ‘친일 인사’들을 많이 기용했으며, 오히려 북조선이 거의 다 친일 인사들로 채웠으며, 대한민국은 독립운동가 중심으로 구성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이런 사람이 과연 친일파입니까? 둘째로, ‘이승만은 미국의 꼭두각시다’는 말이 사실일까? 왜곡일까? ⓵해방 후 미군정은 이승만과 김구 때문에 소련과의 정책 협조가 방해받는다고 생각하여 이 두 명을 퇴출시키고 김규식, 여운형 같은 중도적 인물을 키우려고 했습니다. ⓶존 하지는 이승만을 축출하려고도 했습니다. 당시 수도 경찰청장이었던 장택상의 증언에 의하면, 존 하지가 자신을 찾아와 김규식을 대통령으로 세우고 이승만을 정계에서 물러나게 하면 안 되겠냐고 요구했으나 자신이 사표를 내밀자 화를 내며 방을 나갔다고 합니다. ⓷1952년 8월 2일 진해 앞바다에서 배에서 낚시를 하던 이승만에게 미 CIA가 11발의 총을 쏜 사건까지 있었습니다. ⓸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사건으로 한미관계에 갈등이 지속되자 1953년 5월에는 미국은 필요할 시 이승만을 제거하려는 ‘에버-레디’ 계획까지 세웠습니다. 이승만은 미국이 원하는대로 순순히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 입장에서 이승만은 눈엣가시였고 그를 제거하고 대체할 인물을 찾고 있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을 향해 미국의 국가 이익을 추종하면서 조국은 내팽개쳤다는 이른바 ‘미국의 꼭두각시’ 주장은 북조선과 중공 당국이 만든 문서 외에는 없으며, 오히려 이승만 대통령은 한반도 통일 등 목적을 위해 미국의 입안자(manipulate)들을 휘둘렀습니다. 6∙25전쟁 당시 미국 정책 입안자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비타협성’을 이유로 제거하려고도 했습니다. 무슨 앞잡이가 말도 잘 안 듣고 오히려 미국을 협박까지 합니까? 미국 앞잡이를 왜 미국이 죽이려 합니까? 과연 이런 사람이 미국의 꼭두각시입니까? 셋째로, ‘이승만은 6∙25전쟁때 국민을 버리고 도망 갔다’는 말이 사실일까? 왜곡일까? 북조선의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내려 와서 3일만에 서울을 점령했습니다. 그 기세대로 계속 진격을 했다면 3일만에 조치원을, 5일만에 대전을 점령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북조선 인민군은 3일동안 진격을 멈추고 서울에 있었습니다. 한강 철도가 끊겼다고는 하지만 나룻배도 몇 군데 다닐 수 있었는데 왜 북조선의 인민군이 계속 남하를 하지 않고 서울에서 3일을 머물렀을까요? 그 이유를 알고 있습니까? 나라를 빼앗으려면 대통령, 국회의원들과 내각을 체포해야지 합법적으로 명목상 나라를 빼앗게 되는 것입니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동의에 따라 나라의 모든 국정이 움직이는 것이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입니다. 그래서 북조선의 김일성은 서울을 점령하고 국회의원과 내각을 모두 체포하라는 명령을 합니다. 후일 귀순한 북한 장성의 증언에 따르면 헝가리, 체코식으로 국회의원들을 붙잡아 강제로 국회를 열게 하여 명목상 합법적으로 남한을 북한의 통치하에 두려고 계획을 하고 남침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들은 미리 사전 정보대로 국회의원 집과 사무실을 기습 체포 작전에 돌입했는데 2명밖에 체포를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 줄 알고 있습니까? 국회의원과 내각을 체포할 거라고 예상을 했던 이승만 대통령께서 미리 국회의원과 내각을 피난 및 피신을 시켰던 것입니다. 서울 점령 당시에 나라를 통째로 빼앗길 위기를 면하고 다시 재정비하여 승리를 거둔 천재적인 정치인이 이승만 대통령입니다. 당시 미국 측은 ‘일본으로 대피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는 “절대 안된다. 죽어도 한반도에서 죽겠다”고 했는데, 이것을 ‘도망’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서울에 남아 있었다면 생포되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소설가 조셉 굴던(Joseph C.Go ulden)이 쓴 ‘한국전 비사(祕史; Korea: The Untold Story of the War)’에 의하면, 6·25 전쟁시 남한 전체가 점령당할 낙동강의 위기에 처했을 때 미국은 극비리에 한국인 60만을 남태평양에 있는 미국령 ‘사모아 제도’ 섬으로 이주시킬 계획도 세웠습니다. 옛날 전쟁을 보면, 임금이나 군대의 대장을 사로 잡거나 죽이면 전쟁이 끝났습니다. 전쟁이 터졌을 때 지휘부를 후방으로 옮기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오히려 피난이 너무 늦었습니다. 이것이 이승만 대통령이 6∙25전쟁때 국민을 버리고 도망 간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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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30
  • “한 위대한 한국인을 눈물로 추모하며⋯”
    “한 위대한 한국인을 눈물로 추모하며⋯” 수원 헤브론 교회 조정환 목사의 글 “한 위대한 한국인을 눈물로 추모합니다.”를 소개합니다. 지금부터 58년 전인 1965년 7월 19일 오전 0시 35분. 하와이의 한 노인 요양원에서 나이 아흔의 한국인 환자가 유명을 달리하였습니다. 서거하시기 한 달 전부터 피를 토했습니다. 그가 숨을 거두기 하루 전인 7월 18일엔 너무 많은 피를 토하셨습니다. 그의 생애 마지막 임종을 지켜보는 이는 평생동안 곁에서 돕고 수발하던 부인과 대라도 잇겠다며 들인 양자와 교민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마지막 호흡을 크게 한번 들이 쉬더니 이내 영면의 눈을 감았습니다. 파란만장한 길을 함께 걸어오며 어떤 어려움에도 우는 법이 없었던 아내가 오열했습니다. 작가 이동욱 씨는 국부 이승만의 영결식의 한 장면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한 미국인 친구가 울부짖었다. ‘내가 너를 알아! 내가 너를 알아! 네가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였는지! 그것 때문에 네가 얼마나 수많은 고통을 겪어 왔는지! 바로 잃어버린 조국, 빼앗긴 국토를 되찾으려는 그 애국심 때문에 네가 그토록 온갖 조소와 비난 받으며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 온 것을 내가 알아.’” 그 미국인은 장의사였습니다. 그는 1920년에 미국에서 일하다 죽은 중국인 노동자들의 유해를 중국으로 보내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승만이라는 중년의 조선인이 찾아와 중국인 유해를 안치할 그 관에 숨어 상하이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한국 독립운동을 하는데 일본이 자신을 현상수배 중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바로 조선인 이승만이었습니다. 이 이승만이 실제 관에 들어가 상하이 입국 밀항에 성공하였습니다. “너의 그 애국심 때문에 네가 얼마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또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비난을 받아 왔는지 나는 안다.”는 피를 토하듯한 절규! 이 절규는 그냥 넋두리로 푸념이 아니라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온 통한의 절규였습니다. 2019년 7월 15일 아침 서울 국립현충원. 이승만 초대 대통령 묘소를 찾았습니다. 나흘 뒤면 그의 50주기입니다. 필자 역시 이 대통령에 대해 부정적 얘기만 듣고 자랐습니다. 그의 생애 전체를 보고 머리를 숙이게 된 것은 쉰이 넘어서였습니다. 이날 아침 이 위대한 대통령 묘 앞에서 나는 “만약 우리 건국 대통령이 미국과 국제정치의 변동을 미리 내다보는 혜안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 자체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였기에 그만이 할 수 있는 건국이었기에 이 역사의 물음 앞에 나는 머리를 가로저으며 흐느끼고 말았습니다. 그 없이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그 없이 우리가 자유민주 진영에 서고, 그 없이 전쟁에서 나라를 지키고, 그 없이 한미동맹의 대전략이 가능했겠느냐?는 질문에 누가 “그렇다”고 답할 수 있을까요? 추모비에 적힌 지주 철폐, 교육 진흥, 제도 신설 등 지금 우리가 디디고 서 있는 바탕이 그의 혜안에서 나왔습니다. 원자력 발전조차 그에 의해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그는 무지몽매한 나라에 태어났으나 그렇게 살기를 거부했습니다. 열아홉에 배재학당에 들어가 외국인들의 눈을 통해 나라밖 신세계를 처음으로 접했습니다. 썩은 조정을 언론으로 개혁해보려다 사형선고까지 받았습니다. 그러한 상황의 감옥에서 낮에는 심문을 당하고, 밤에는 영어사전을 만들었습니다. 이 대통령은 독립하는 길은 미국을 통하는 길밖에 없다고 믿었기에 1905년나이 서른에 조지워싱턴 대학에 입학하고, 하바드를 거쳐 프린스턴대에서 국제정치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41년, 미국에서 ‘JAPAN INSIDE OUT(일본의 가면을 벗긴다)’을 펴냈습니다. 그 책에서 그는 “일본이 반드시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고 역설했습니다. 책이 나온 지 넉 달 뒤 일본이 추측이 아닌 실제로 진주만을 폭격했습니다. 미국 정치인들은 한국인 이승만을 놀란 눈으로 새롭게 보았습니다. 이 대통령은 1954년 이 책의 한국어판 서문을 이렇게 썼습니다. “일본인은 옛 버릇대로 밖으로는 웃고, 내심으로는 악의를 품어서 교활한 외교로 세계를 속이는 그러면서도 조금도 후회하거나 사죄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을 뿐더러 … 미국인들은 지금도 이를 알지 못하고 일인들의 아첨을 좋아하며 뇌물에 속아 일본의 재무장과 재확장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데도 … 심지어는 우리에게 일본과 친선을 권고하고 있으니 …” 이 대통령은 한국어판 서문에서 “우리는 미국이 어찌하든지 간에 우리 백성이 다 죽어 없어질지언정 노예만은 되지 않겠다는 각오로 합심하여 국토를 지키면 하늘이 우리를 도울 것이다.”라고 머릿말을 맺었습니다. 뱁새가 봉황의 높은 뜻을 어찌 알리요마는 관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반일로 살아온 그를 친일이라고 하고, 평생 용미한 것을 친미라고 하는 것은 사실을 너무 모르거나 알면서도 매도하는 것입니다.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는 “어지러운 구한말 모두 중·일·러만 쳐다보고 있을 때 청년 이승만은 수평선 너머의 미국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를 19세기 한국의 콜럼버스라고 부른다. 우리 수천년 역사에 오늘날 번영은 오로지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 박사의 공로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국민은 이 위대한 지도자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했습니다. 거인이 이룬 공은 외면하고 왜곡하며, 과만 파헤치는 일들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건국 대통령의 50주기를 쓸쓸히 보내며, 그에게 감사할 줄 모르는 우리의 자해와 업을 생각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리에서 미 하와이로 물러난 후 한 겨울에 난방할 땔감도 없었습니다. 하와이에선 교포가 내준 30평짜리 낡은 집에서 궁핍하게 살았습니다.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친정에서 옷가지를 보내줄 때 포장한 종이박스를 옷장으로 썼습니다. 교포들이 조금씩 보내준 돈으로 연명하며 고국행 여비를 모은다고 5달러 이발비를 아꼈습니다. 늙은 부부는 손바닥만한 식탁에 마주 앉아 한국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5년이 흘렀습니다. 이 대통령이 우리 음식을 그리워하자 부인이 서툰 우리말로 노래를 만들어 불러줬다고 합니다. 이 대통령도 따라 불렀던 그 노래를 이동욱 작가가 전합니다. "날마다 날마다 김치찌게 김칫국 날마다 날마다 콩나물국 콩나물 날마다 날마다 두부찌게 두부국 날마다 날마다 된장찌게 된장국" 아무도 없이 적막한 그의 묘 앞에 서서 이 노래를 생각하니 목이 메인다. 이 나라는 반만년 역사 동안 적게는 900회, 많게는 1300여회 크고 작은 외침을 받았습니다. 1910년에는 민족 국가로서 조선이 세계 지도에서 사라졌습니다. 세계 2차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의 도움으로 36년만에 일제에서 해방되었으나, 남북으로 분단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남쪽에는 대한민국이 건국되었습니다. 그후 중공의 모택동과 구 소련의 스탈린의 지원 아래 북조선의 김일성이 일으킨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을 통해 온 나라가 황폐해졌으며, 세계에서 두 번째로 못 사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한미동맹으로 지금까지 단 한번도 전쟁이 없었습니다. 2차세계대전 이후 탄생한 100여개 신생 독립국 중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했습니다. 한강의 기적을 통하여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으로 우뚝 올라 설 수 있었습니다. 지금 이 나라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 나라를 세우지 않았다면 우리는 북조선의 돼지 3부자를 ‘어버이 수령님’으로 부르며, 개돼지처럼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국부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혜안을 지닌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이런 그를 누가 친일파로 매도하며, 친미주의자로 선전선동하는 것입니까? 이승만 대통령을 향해 친일파 또는 친미주의자라고 하는 자들을 어떻게 불러야 하겠습니까?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한미동맹, 기독교 입국론’이라는 4대 건국 이념으로 건국하신 선지자요, 국부이신 이승만 대통령께 감사드립니다. 수원 헤브론 교회 조정환 목사의 글 “한 위대한 한국인을 눈물로 추모합니다.”를 소개합니다. 지금부터 58년 전인 1965년 7월 19일 오전 0시 35분. 하와이의 한 노인 요양원에서 나이 아흔의 한국인 환자가 유명을 달리하였습니다. 서거하시기 한 달 전부터 피를 토했습니다. 그가 숨을 거두기 하루 전인 7월 18일엔 너무 많은 피를 토하셨습니다. 그의 생애 마지막 임종을 지켜보는 이는 평생동안 곁에서 돕고 수발하던 부인과 대라도 잇겠다며 들인 양자와 교민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마지막 호흡을 크게 한번 들이 쉬더니 이내 영면의 눈을 감았습니다. 파란만장한 길을 함께 걸어오며 어떤 어려움에도 우는 법이 없었던 아내가 오열했습니다. 작가 이동욱 씨는 국부 이승만의 영결식의 한 장면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한 미국인 친구가 울부짖었다. ‘내가 너를 알아! 내가 너를 알아! 네가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였는지! 그것 때문에 네가 얼마나 수많은 고통을 겪어 왔는지! 바로 잃어버린 조국, 빼앗긴 국토를 되찾으려는 그 애국심 때문에 네가 그토록 온갖 조소와 비난 받으며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 온 것을 내가 알아.’” 그 미국인은 장의사였습니다. 그는 1920년에 미국에서 일하다 죽은 중국인 노동자들의 유해를 중국으로 보내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승만이라는 중년의 조선인이 찾아와 중국인 유해를 안치할 그 관에 숨어 상하이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한국 독립운동을 하는데 일본이 자신을 현상수배 중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바로 조선인 이승만이었습니다. 이 이승만이 실제 관에 들어가 상하이 입국 밀항에 성공하였습니다. “너의 그 애국심 때문에 네가 얼마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또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비난을 받아 왔는지 나는 안다.”는 피를 토하듯한 절규! 이 절규는 그냥 넋두리로 푸념이 아니라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온 통한의 절규였습니다. 2019년 7월 15일 아침 서울 국립현충원. 이승만 초대 대통령 묘소를 찾았습니다. 나흘 뒤면 그의 50주기입니다. 필자 역시 이 대통령에 대해 부정적 얘기만 듣고 자랐습니다. 그의 생애 전체를 보고 머리를 숙이게 된 것은 쉰이 넘어서였습니다. 이날 아침 이 위대한 대통령 묘 앞에서 나는 “만약 우리 건국 대통령이 미국과 국제정치의 변동을 미리 내다보는 혜안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 자체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였기에 그만이 할 수 있는 건국이었기에 이 역사의 물음 앞에 나는 머리를 가로저으며 흐느끼고 말았습니다. 그 없이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그 없이 우리가 자유민주 진영에 서고, 그 없이 전쟁에서 나라를 지키고, 그 없이 한미동맹의 대전략이 가능했겠느냐?는 질문에 누가 “그렇다”고 답할 수 있을까요? 추모비에 적힌 지주 철폐, 교육 진흥, 제도 신설 등 지금 우리가 디디고 서 있는 바탕이 그의 혜안에서 나왔습니다. 원자력 발전조차 그에 의해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그는 무지몽매한 나라에 태어났으나 그렇게 살기를 거부했습니다. 열아홉에 배재학당에 들어가 외국인들의 눈을 통해 나라밖 신세계를 처음으로 접했습니다. 썩은 조정을 언론으로 개혁해보려다 사형선고까지 받았습니다. 그러한 상황의 감옥에서 낮에는 심문을 당하고, 밤에는 영어사전을 만들었습니다. 이 대통령은 독립하는 길은 미국을 통하는 길밖에 없다고 믿었기에 1905년나이 서른에 조지워싱턴 대학에 입학하고, 하바드를 거쳐 프린스턴대에서 국제정치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41년, 미국에서 ‘JAPAN INSIDE OUT(일본의 가면을 벗긴다)’을 펴냈습니다. 그 책에서 그는 “일본이 반드시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고 역설했습니다. 책이 나온 지 넉 달 뒤 일본이 추측이 아닌 실제로 진주만을 폭격했습니다. 미국 정치인들은 한국인 이승만을 놀란 눈으로 새롭게 보았습니다. 이 대통령은 1954년 이 책의 한국어판 서문을 이렇게 썼습니다. “일본인은 옛 버릇대로 밖으로는 웃고, 내심으로는 악의를 품어서 교활한 외교로 세계를 속이는 그러면서도 조금도 후회하거나 사죄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을 뿐더러 … 미국인들은 지금도 이를 알지 못하고 일인들의 아첨을 좋아하며 뇌물에 속아 일본의 재무장과 재확장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데도 … 심지어는 우리에게 일본과 친선을 권고하고 있으니 …” 이 대통령은 한국어판 서문에서 “우리는 미국이 어찌하든지 간에 우리 백성이 다 죽어 없어질지언정 노예만은 되지 않겠다는 각오로 합심하여 국토를 지키면 하늘이 우리를 도울 것이다.”라고 머릿말을 맺었습니다. 뱁새가 봉황의 높은 뜻을 어찌 알리요마는 관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반일로 살아온 그를 친일이라고 하고, 평생 용미한 것을 친미라고 하는 것은 사실을 너무 모르거나 알면서도 매도하는 것입니다.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는 “어지러운 구한말 모두 중·일·러만 쳐다보고 있을 때 청년 이승만은 수평선 너머의 미국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를 19세기 한국의 콜럼버스라고 부른다. 우리 수천년 역사에 오늘날 번영은 오로지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 박사의 공로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국민은 이 위대한 지도자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했습니다. 거인이 이룬 공은 외면하고 왜곡하며, 과만 파헤치는 일들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건국 대통령의 50주기를 쓸쓸히 보내며, 그에게 감사할 줄 모르는 우리의 자해와 업을 생각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리에서 미 하와이로 물러난 후 한 겨울에 난방할 땔감도 없었습니다. 하와이에선 교포가 내준 30평짜리 낡은 집에서 궁핍하게 살았습니다.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친정에서 옷가지를 보내줄 때 포장한 종이박스를 옷장으로 썼습니다. 교포들이 조금씩 보내준 돈으로 연명하며 고국행 여비를 모은다고 5달러 이발비를 아꼈습니다. 늙은 부부는 손바닥만한 식탁에 마주 앉아 한국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5년이 흘렀습니다. 이 대통령이 우리 음식을 그리워하자 부인이 서툰 우리말로 노래를 만들어 불러줬다고 합니다. 이 대통령도 따라 불렀던 그 노래를 이동욱 작가가 전합니다. "날마다 날마다 김치찌게 김칫국 날마다 날마다 콩나물국 콩나물 날마다 날마다 두부찌게 두부국 날마다 날마다 된장찌게 된장국" 아무도 없이 적막한 그의 묘 앞에 서서 이 노래를 생각하니 목이 메인다. 이 나라는 반만년 역사 동안 적게는 900회, 많게는 1300여회 크고 작은 외침을 받았습니다. 1910년에는 민족 국가로서 조선이 세계 지도에서 사라졌습니다. 세계 2차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의 도움으로 36년만에 일제에서 해방되었으나, 남북으로 분단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남쪽에는 대한민국이 건국되었습니다. 그후 중공의 모택동과 구 소련의 스탈린의 지원 아래 북조선의 김일성이 일으킨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을 통해 온 나라가 황폐해졌으며, 세계에서 두 번째로 못 사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한미동맹으로 지금까지 단 한번도 전쟁이 없었습니다. 2차세계대전 이후 탄생한 100여개 신생 독립국 중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했습니다. 한강의 기적을 통하여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으로 우뚝 올라 설 수 있었습니다. 지금 이 나라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 나라를 세우지 않았다면 우리는 북조선의 돼지 3부자를 ‘어버이 수령님’으로 부르며, 개돼지처럼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국부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혜안을 지닌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이런 그를 누가 친일파로 매도하며, 친미주의자로 선전선동하는 것입니까? 이승만 대통령을 향해 친일파 또는 친미주의자라고 하는 자들을 어떻게 불러야 하겠습니까?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한미동맹, 기독교 입국론’이라는 4대 건국 이념으로 건국하신 선지자요, 국부이신 이승만 대통령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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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29
  • [뉴스워크] 6월27일(화) “이승만은 선지자였을까? 날강도였을까?”
    이승만은 30살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5년만에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승만은 수십년동안 미국의 정치인, 외교관, 언론인, 군인들을 만나 한결같은 주장을 늘어 놓았습니다. 그 내용으로 강연회에서 연설하고, 그 내용으로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의 제목은 〈JAPAN INSIDE OUT〉 이었으며, 일본의 속내를 폭로한 것입니다. 내용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일본이 조선반도를 집어 삼켰으니, 그 다음은 만주를 먹고, 중국을 침략하고, 여러 나라를 침략하고나서 그리고는 태평양을 건너 미국을 쳐들어 올 것이다. 미국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일본과 한판 승부를 벌여야 할 것이다. 일본의 팽창을 막고, 일본을 다시 일본 본토로 돌아 가게 하려면 조선을 독립 시켜라!” 그러자 미국 학자들과 정치인들은 아무도 귀기울여 주지 않았습니다. 당시 일본과 미국은 좋은 관계였고, 그 넓은 태평양을 넘어 일본이 공격하리라고는 꿈도 꿀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JAPAN INSIDE OUT〉이 출간된 지 반년이 못 되어서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공습이 터졌습니다. 이승만의 책 〈JAPAN INSIDE OUT〉은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미국의 학자들은 ‘수십년에 걸쳐 일본의 침략을 예언한 인물을 못 알아 보았구나…’라며 스스로를 부끄러워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승만을 하나님이 그 시대에 세운 선지자로 알고 존경했습니다. 그후 태평양전쟁에서 이승만의 절친 더글라스 맥아더가 지휘하는 미군은 일본을 몰아 냈고, 일본은 패망했으며, 우리나라는 크게 피흘리는 전쟁 없이 독립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승만은 건국 대통령이 되었으나 1950년 6월 25일, 중국 조선족 부대를 앞세운 북한 인민군의 남침으로 발발한 민족의 비극 6·25가 발생했습니다. 3년간의 혈전 끝에 휴전협정이 맺어지려 할 때 이승만은 휴전을 반대했고 북진 통일을 외쳤습니다. 미군도 소모전에 지쳐 갔고, 미국 내 여론도 휴전 쪽으로 방향이 정해졌을 때 유독 이승만은 휴전을 반대했습니다. 결국 이승만이 내놓은 휴전의 조건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이었습니다. 1953년 10월 1일 조인되었으며, 1954년 11월 18일 발효되었습니다. 미국 앞에 이승만은 거의 날강도였습니다. 거제도 반공포로를 석방시킨 사건을 듣고 맥아더는 친구 이승만을 “오 ~ 나의 십자가”라고 불렀습니다. 이승만이 내놓은 휴전 조건을 볼 것 같으면, “미국아 ~ 6·25전쟁 휴전을 할려면…, 첫째로, ‘경제 지원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당시 한국의 1년 수출액의 34배나 되는 돈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전쟁 후 잿더미 위에서 굶어 죽지 않고 다시 나라를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둘째로, “in and around Korea에 미군을 주둔시킨다고 약속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까지 미군이 이 나라 지켜 주고 있습니다. 한반도에 미군 주둔은 북한 인민군 복무 기간이 10년에 비해, 내 아들 군 복무 기간 1년 6개월! 이를 가능케 했고, 한국 경제발전의 기본 바탕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승만은 고약한 코미디언이었습니다. 셋째로, “너희 미국이 침략을 받으면 그때는 우리가 가서 싸워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당시 태평양 건너 갈 배 한 척도 없는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도와 준다는 것입니까? 태평양을 헤엄쳐 건너 가서? ㅎㅎㅎ 이렇게 미국과 한국 사이에 “상호방위 조약을 맺자. 상호 조약이니까 평등한 조약 맞지? 여기 싸인 하셔”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의 핵심입니다. 미국이 외국에게 당한 최초이자 마지막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이 약속을 해주면 휴전할 때 내가 큰 인심 써서 입 다물고 있을게!” 우리나라 건국 대통령 이승만은 그렇게도 못된 사람이었습니다. 평생의 친구 맥아더 뒤통수 치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참전해서 3만 6천명이 죽은 미군! 그 미국에게 더 내놓으라고 말하는 뻔뻔스런 이 나라의 건국의 아버지였습니다! 당시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후에 말하기를 “이승만 그 날강도에 또 당했어! 도대체 한국이 무슨 힘이 있다고 미국에 전쟁 나면 한국이 도와줄 테니 한반도에 전쟁 나면 한국 병력의 9배 이상을 의무적으로 보내야 하는 거야? 또 인계철선은 뭐야? 우리 청년들을 북한이 내려 오는 길목에 박아 놓고 공격 받으면 미국이 자동 참전해야 된다니! 그리고 한국이 제자리 잡을 때까지 한국 국방비를 미국이 전액 대라는데 아무리 스탈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무슨 이런 조약에 사인을 하고 온 거야?” ㅎㅎㅎ 이쯤되면 이승만은 날강도였습니다. 인정! 이 나라는 반만년 역사 동안 적게는 900회, 많게는 1300여회 크고 작은 외침을 받았습니다. 1910년에는 민족 국가로서 조선이 세계 지도에서 사라졌습니다. 세계 2차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의 도움으로 36년만에 일제에서 해방되었으나, 남북으로 분단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남쪽에는 대한민국이 건국되었습니다. 그후 중공의 모택동과 구 소련의 스탈린의 지원 아래 북조선의 김일성이 일으킨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을 통해 온 나라가 피폐해졌으며, 세계에서 두 번째로 못 사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한미동맹으로 지금까지 단 한번도 전쟁이 없었습니다. 2차세계대전 이후 탄생한 100여개 신생 독립국 중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했습니다. 한강의 기적을 통하여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으로 우뚝 올라 설 수 있었습니다. 국부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게는 날강도였는지 모르겠지만, 대한민국으로서는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혜안을 지닌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이런 이승만 대통령을 향해 친일파 또는 친미주의자라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지금 이 나라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 나라를 세우지 않았다면 우리는 북조선의 돼지 3부자를 ‘어버이 수령님’으로 부르며, 개돼지처럼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한미동맹, 기독교 입국론’이라는 4대 건국 이념으로 건국하신 선지자요, 국부이신 이승만 대통령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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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28
  • [뉴스워크] 6월26일(월) “이승만! 그는 누구인가?”
    지금으로부터 약 73년 전인 1948년 8월 15일, 제헌 헌법(7월 17일)과 함께 출항을 시작한 대한민국호의 첫번째 선장은 바로 우남 이승만 대통령입니다. 그는 애국심과 민주주의 정신을 가진 독실한 기독교인이라고 표현할 수 있으며, 그의 삶에 잘못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대한제국이 아닌 대한민국의 탄생에 앞장섰고, 일평생 기독교인으로 살았습니다. 첫째로, 출생과 성장 배경에 대해 살펴 보겠습니다. 그는 1875년 3월 26일(음력 2월 19일)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에서 아버지 이경선(1839~1913년)과 어머니 김해 김씨 김말란(1833~1896년)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손 위의 두 형이 그의 출생 전에 사망했으며, 사실상 6대 독자였습니다. 아버지 이경선은 조선왕조의 후예인 전주 이씨 가문으로 태종의 장남이며, 세종의 형인 양녕대군의 다섯째 아들 장평정 이흔의 15대손입니다. 즉 태조 이성계의 18대손입니다. 양녕대군은 세자 책봉을 받았지만 왕의 자리를 동생인 세종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선조가 동생에게 상속권을 넘겨 주지 않았다면, 양녕대군의 16대손이었던 이승만은 그때 고종(1852 ~ 1919년)의 위치에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5대조부터 벼슬길이 끊겨 이미 몰락한 집안이었습니다. 부친 이경선은 과거에 낙방해 특별한 직업 없이 살아갔으며, 왕족의 후예로 이승만을 유교 정신에 충실한 선비로 키우고자 했습니다. 모친은 독실한 불교 신자였는데 모친이 절에서 제사를 지내고 용꿈을 꾼 이후 이름을 승룡(承龍)이라고 했는데, ‘늦게 왕이 될’ 사주라 하여 그의 부모가 이름을 승만(승晩)으로 개명시켰습니다. 3살 때 1877년에 아들의 교육을 위해 모친의 결정으로 한성부 남대문 밖 우수현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자랐습니다. 이승만의 호 ‘우남’은 ‘우수현의 남쪽’이라는 뜻입니다. 이승만은 어린 시절부터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생일마다 모친과 함께 사찰에 가서 복과 장수를 기원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입신양명을 위한 한학 공부에 몰두했습니다. 양반으로서 몰락한 가문의 위신을 다시 세우는 길은 오직 과거 급제뿐이었습니다. 이에 서당 훈장의 딸이었던 모친은 이승만에게 천자문을 가르쳤고, 모친의 열정적인 교육열로 인해 6살에 천자문을 암기했습니다. 그는 1887년경 과거에 도전할 때까지 몰락한 가문을 살리기 위해 한학 공부에 열중했으나 그의 목표는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1887년부터 시작한 그의 노력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사실상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해오던 한학 공부는 출세의 수단이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하나의 목표를 위해 정진해온 사람에게 목표의 상실이 얼마나 큰 실망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실망은 더 큰 전환을 위한 새로운 기회였습니다. 그로 인해 그가 기독교 학교인 배재학당에 다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갑신정변에 가담하여 사형수로 한성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한학에 천착했던 이승만은 사실 구시대의 사고와 정신에 갇혔던 인물이었으나 서방 정신을 배울 기회가 생겼는데, 바로 서당에서 함께 공부하던 신긍우가 배재학당을 소개해 주었던 것입니다. 배재학당은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선교사가 1886년에 설립했고, 이후 관직의 등용문이 되곤 했습니다. 정부는 배재학당 졸업생과 재학생을 시험 없이 관료로 임명했기 때문에 갑오개혁으로 인해 관직의 길이 막혔던 양반들에게는 막힌 창문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에 이승만도 1895년에 배재학당의 영어과에 입학했습니다. 영어를 배워서 출세의 도구로 활용하려는 심산이었습니다. 그러나 배재학당의 교육에는 서방의 역사를 비롯한 정치제도 등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것은 그의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 매개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그는 배재학당에서 정치적 자유와 평등을 공부하며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조선왕조라는 정치 체제 속에서 개인은 왕조의 절대적 통치의 대상일 뿐이었고, 정치적으로 개인을 보호할 법적 체계는 전혀 없었습니다. 배재학당에서 이승만에게 민주정신을 불어넣어 준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은 바로 서재필이었습니다. 그는 1884년 갑신정변의 중심인물로 미국에 망명한 뒤 미국 국적을 취득하고, 의사가 되었습니다. 이후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개화파가 중심이 되어 갑오개혁이 이루어지자 1895년에 미국인 신분으로 귀국해 조선의 개혁을 위해서 활동했습니다. 이때 그가 활동했던 장소 중 한 곳이 바로 배재학당이었습니다. 서재필은 1896년 5월부터 배재학당에서 1년간 강의를 했습니다. 그는 이때 학생들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쳤는데, 서재필이 가르친 민주주의의 실천 방식인 토론과 다수결의 법칙은 당시 학생들에게는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배재학당 학생들은 서재필이 1896년 7월 2일에 설립한 독립협회와 유사한 협성회를 만들었습니다.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관민공동회가 대중적 토론의 장이었던 것과 같이, 협성회도 회원들이 모여서 민족주의, 민주주의, 사회개혁 등의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하는 모임이었습니다. 이승만은 협성회의 초대 맴버 13인 중 한 사람이었고, 후에 회장으로 활동했습니다. 배재학당을 통한 이승만의 내적 변화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상투를 제거한 것입니다. 1895년 12월 단발령이 시행되었을 때, 이승만은 조선의 오랜 전통으로 자리 잡고 있던 상투를 잘라 버렸습니다. 이런 행위는 그가 조선이라는 구시대에 갇힌 봉건적 인물이 아니라, 근대정신을 가지고 민주정신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인물로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위였습니다. 그의 내면에 분명해진 독립정신과 민주정신을 확산시키기 위한 도구는 신문이었습니다. 1898년 1월, 그를 포함한 배재학당의 협성회 회원들이 <협성회회보>를 창간했습니다. 그는 협성회보의 주필로 활동하며, 주간 신문인 <협성회회보>를 일간 신문으로 확대했습니다. 또 <매일신문>을 창간했으며, <제국신문>의 창간에도 동참했습니다. 이 신문들은 그가 배재학당에서 배운 민주정신과 독립정신을 확산시키는 하나의 도구였습니다. 그는 독립협회에도 참여했습니다. 수구세력과 충돌은 있었지만, 대중의 지지를 받는 이승만 등 독립협회 회원들은 수구세력의 회유 대상이 되었습니다. 1898년 11월 19일, 이승만을 비롯한 독립협회 회원 17명은 중추원 의관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때 이승만은 박영효를 중추원 의장으로 추천합니다. 당시 박영효는 갑신정변을 통해 새로운 내각을 수립할 계획을 세웠는데, 이승만은 여기에 가담했습니다. 그 결과 1899년 1월 5일에 이승만은 중추원 의관에서 해임당했고, 박영효의 쿠테타 음모가 발각되어 그해 1월 9일에 경무청에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이승만은 투옥된 지 20일 후인 1월 30일에 감옥으로 반입된 권총을 가지고 최정식, 서상대와 함께 탈옥했습니다. 그는 감리교 선교부로 도망쳤지만, 곧 다시 체포되었고, 탈옥을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사형수로 한성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는 그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었습니다. 같이 탈옥을 시도했던 최정식과 서상대는 사형을 당했습니다. 10kg의 칼을 목에 쓰고, 고문의 후유증 속에서 사형을 기다리는 이승만에게 일상적 평안은 거리가 멀었습니다. 죽음이 목전에 다가온 사람은 죽음 이후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죽음의 위기가 인간을 종교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승만 역시 삶과 죽음의 실존적 위기 속에서 죽음 이후를 생각했습니다. 그는 한성 감옥에서 선교사를 통해 영어로 된 신약성경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성경은 죽음을 기다리는 그의 유일한 친구이자, 신앙인으로서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으며 배재학당에서 들은 설교를 기억했고, 자연스럽게 설교 때 배운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단순했습니다. 먼저 자신의 영혼 구원을 위해, 그 다음은 나라의 구원을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감옥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찾자 그의 마음에는 기쁨과 평화가 임했습니다. 불교와 유교의 전통에 있던 그가 기독교 신앙체험을 한 것이었습니다. 이승만 역시 죽음의 고통을 느끼던 때 경험했던 신앙체험을 주변 수감자들에게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40명이 넘는 수감자들이 개종했습니다. 여기에는 이상재, 이원긍 등의 양반도 포함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이승만은 감옥에서 의미 있는 삶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감옥에서 학교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깊은 신앙체험을 통해 인간 영혼의 소중함을 깨달은 그는 수감자들을 교화할 필요성을 느꼈고, 영어, 일어, 문법, 산수, 한자, 성경, 기도 등을 가르치는 감옥 학교를 열었습니다. 또한, 선교사들이 감옥에 반입해주는 서적들로 옥중 도서관을 만들었는데, 감옥 서장이었던 김영선은 이승만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습니다. 도서관의 책은 주로 기독교 서적이었고, 당시 선교사들이 발행하던 《그리스도신문》, 《신학월보》도 있었습니다. 이승만의 기독교 신앙체험과 개종이 중요한 이유는 그의 정치사상과 기독교가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배재학당을 통해 민주정신을 배웠고, 독립을 위한 자주 의식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면서 인간이 바른 의식을 갖게 하는 것이 기독교이고, 기독교가 바로 나라의 근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성 감옥은 그의 정치관과 신앙관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셋째로, 출소 후 미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총신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정성구 박사님은 칼럼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승만 청년이 한성 감옥에 6년 가까이 있다가 출소하자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30세에 미국 유학을 가게 됩니다. 그때 이승만은 워싱턴DC에 있는 정통 장로교회인 언약교회(Church of Covenant)에 출석하면서 조지워싱턴대학(George Washington University)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그 언약교회의 담임목사는 헴린(Tuenis S. Hamlin)이었고, 그는 하버드대학교(Harvard University)의 이사장이자, 조지워싱턴대학의 이사였습니다. 그래서 헴린 목사는 1900년대 초에 미국 교회의 대지도자로서 이승만을 신앙적으로 알뜰히 보살폈습니다. 이승만은 헴린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그의 신앙적 사상적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후 이승만은 박사학위를 위해서 프린스턴대학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이승만은 처음부터 정치외교학을 공부한 것은 아니고, 1년 동안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 당시 프린스턴신학교의 분위기는 철저한 칼빈주의 신학과 세계관이 지배적이었습니다. 1898년 프린스턴신학교의 교장인 B.B. 워필드(B.B. Warfield) 박사는 화란의 위대한 칼빈주의 신학자요, 대 정치가요, 저널리스트인 아브라함 카이퍼(Abrah a m Kuyper. 1837-1920) 박사를 초청해서 ‘칼빈주의 강연’을 함으로 프린스턴신학교가 칼빈주의 사상이 대세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 이승만은 1년간 신학 공부를 했습니다. 특히 카이퍼의 칼빈주의 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특히 이승만은 워필드의 대를 이은 페톤(Paton) 교장 아래에서 헬라어, 라틴어, 철학을 공부했고, 어드만(Prof, Eerdman) 교수 아래에서 ‘바울 서신연구’를 했고, 그린(Prof. Greene) 교수로부터 기독교 변증학을 배웠습니다. 그 당시 프린스턴 신학교는 위대한 칼빈주의자 월필드(B.B. Warfield) 박사와 칼빈주의 성경신학자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 박사의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승만은 워싱턴의 카버난트 교회의 헴린 목사로부터 정통개혁신앙을 배웠고,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1년간 역사적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이승만의 가슴속에는 장차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독립된다면, 기독교 신앙 위에 즉 성경적 세계관 위에 나라를 세우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경적 세계관이란 바로 카이퍼 박사와 월필드 박사가 말하는 칼빈주의 세계관 그것은 곧 미국의 건국이념과 같습니다. 즉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독립되면 하나님 중심의 나라, 성경 중심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 이승만의 꿈이었습니다. 물론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공부했고, 하와이 감리교회에서 봉사한 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의 멘토였던 헴린 목사와 대 칼빈주의자 B.B 워필드 교수와 페톤 교수로부터 받은 칼빈주의 사상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와 우리 민족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1907년에 조지워싱턴 대학(George Washington University)에서 학사를 취득하고, 하버드대학(Harvard University)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후 1910년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국제적인 인물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유학 5년만에 이룬 쾌거였습니다. 1945년 귀국한 이승만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세우기 위한 기초를 다졌고, 1948년 이승만 대통령은 헌법을 만들고, 선포하기 전 이윤영 의원을 향하여 앞으로 나와 기도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세계역사에 대한민국 같은 나라는 처음입니다. 시편에 있는 대로,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 민족의 위대한 선지자요, 위대한 독립운동가요, 위대한 외교가요, 저널리스트요, 위대한 정치 전략가였습니다. 이러한 위대한 이승만 박사를 대한민국의 국부로 모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었습니다.
    • 주요뉴스
    2023-06-26
  • “38선은 어떻게 해서 그어 졌을까?,새로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올 해는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발생 73주년입니다. 다음 달 7월 27일은 정전 협정 70주년입니다. 김종필 전 총리는 물론, 다수의 국민이 모르는 역사적 사실이 있습니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한 일간지에 연재하고 있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1962년 11월 미국에서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을 만났을 때입니다. 나는 처음에 다소 건방진 태도를 보인 케네디 장관을 향해 “당신네 나라가 우리 한반도를 지구상에서 가장 비참한 분단의 아픔을 안게 한 원인을 만들었소!”라고 따졌습니다. 그가 “그 원인이 무엇이오?”라는 질문에 김종필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38선을 누가 만들었소. 딘 러스크 육군 대령이 긋지 않았소. 왜 아무 죄없는 한국을 반으로 갈라 놓았느냐 말이오. 우리를 분단시켜 싸우게 만든 것이 바로 미국이오.” 로버트의 형 존 케네디(JFK) 대통령 정부에서 국무장관에 오른 러스크는 대령 시절이던 1945년 8월 한반도 지도에 38선을 그어 남쪽은 미군, 북쪽은 소련군이 점령케 하는 초안을 만들었습니다. “장래를 전혀 내다보지 못한 전략적 패착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만일 JP가 케네디 법무장관이 아니라 러스크 국무장관을 그날 만나서 똑같은 소리를 했다면 러스크는 아마도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내가 그때 38선을 긋지 않았더라면 한반도 전체가 공산주의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을 것이오. 그러므로 당신은 나한테 오히려 감사해야 하오.” 일본이 항복한 날 미군 최선봉 부대는 한반도에서 남쪽으로 1,000km나 떨어진 오키나와에 있었기 때문에 미군이 소련보다 먼저 한반도에 들어갈 가능성은 제로였습니다. 그때 소련군은 이미 함경도를 통해 한반도에 들어 오고 있었고, 일주일 정도면 부산까지 밀고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이를 우려한 미국은 소련에게 38도선까지만 내려와 북한 지역에서만 일본군의 항복을 받으라고 제의했던 것입니다. 1990년에 출판된 딘 러스크(Dean Rusk)의 회고록 「As I Saw It(내가 본대로)」 124쪽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넓은 지역에 흩어져 있는 일본군으로부터 언제 어디서 항복을 받아 만주의 주요 지점들이 우리 점령지역에 들어가도록 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육군은 우리 군대가 아주 조금 있거나, 거의 없는 지역들은 아예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했다. 사실은 아시아 대륙에 들어 가는 것 자체를 육군은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아시아 대륙에 상징적으로 군대를 좀 유지한다는 차원에서 한반도에 발판 같은 걸 하나 마련해 두기로 했다. 일본이 항복한 바로 그날인 (미국 동부 시각) 8월 14일 늦은 밤(국방부 작전국 정책과장) 찰스 본스틸 대령과 나는 (국무부, 국방부, 해군이 합동회의를 하고 있던 회의실) 옆방으로 자리를 옮겨 한반도 지도를 자세히 보았다. 급박한 상황에서 우리는 미국이 점령할 지역을 선택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었다. (중략) National Geographic 잡지사가 만든 지도 한 장을 놓고 우리는 서울 바로 북쪽에서 한 편리한 경계선을 찾았으나 지리적으로 자연적인 선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북위 38도선을 건의하기로 결정했다. 국무부, 국방부, 해군 협의회는 우리 건의를 별다른 이의없이 받아 들였고, 놀랍게도 소련 역시 이의없이 동의했다. 당시 미국과 소련 양국 군대가 위치한 지점을 고려한다면 소련이 38도선보다 훨씬 더 남쪽의 선을 요구할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러스크의 이 증언을 보면, 일본과의 4년 간 전쟁에 지친 미국 군부는 아시아 대륙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싫어 했으나, 국무부가 우겨서 한반도에 들어 가기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능한한 한반도 북쪽에 선을 그어 소련의 한반도 전체 점령을 막으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미국 군부의 희망대로 그때 한반도에 미군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소련군은 한반도 전체를 다 점령하고, 소련군 대위 출신 김일성(당시 33세·본명 김성주)을 앞세워 소련의 위성국가로 만들었을 것이 뻔합니다. 실제로 소련은 당시에 나치 독일로부터 해방된 동유럽 여러나라 전부를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때 미국이 38선을 그은 것은 우리 한민족에 엄청난 행운이었습니다. 38선이 그어질 당시의 미국 트루먼이 1955년 출판한 회고록 「Memoirs by Harry S. Truman」 1권 444~445 쪽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내가 듣기로는 번즈 국무장관이 현실적으로 가능한한 멀리 한반도의 북쪽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도록 선을 그으라고 국방부 작전국 정책과에 건의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육군은 한반도로부터의 먼 거리와 병력 부족이라는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물에 직면하고 있었다. 따라서 (먼저 한반도에 진입하는 쪽에서 한반도의 일본군 항복을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소련이 이의를 제기할 경우, 우리가 실제로 병력을 파견하기에는 38도선도 사실은 너무 멀리 잡은 것이었다. 소련이 이의를 제기해서 우리가 실제로 병력을 제 때에 보낼 수 있는 거리에다 선을 그어야 했다면 그 선은 38도선보다도 훨씬 남쪽에 그어졌을 것이다. 북위 38도선을 따라 군부가 선을 그었기 때문에 우리는 조선의 옛 수도 서울에서 일본의 항복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일단 한반도에 들어간 소련군은 곧 38선을 봉쇄하고 그 선 이북의 자기네 점령지역을 소련군 대위 출신 김일성(당시 33세 · 본명 김성주)을 앞세워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독일이 연합국에게 1945년 5월 7일 항복한 뒤, 소련은 전쟁 중 점령한 동부 독일을 비롯하여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동유럽 나라들을 전부 공산국가로 만들어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미국이 1945년 한반도에 38선을 그은 것은 우리에게는 행운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후 미군이 점령한 서부 독일과 일본은 미국식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채택하여 오늘날 경제대국이 되었고, 역시 미군이 점령했던 남한은 오늘날 세계 10대 경제강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소련이 점령했던 동유럽 국가들은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했다가 1989년 소련의 해체와 함께 간신히 자유를 찾았고, 역시 소련군이 점령했던 북한은 아직도 공산 독재에 집착하는 무능한 김씨 세습정권에 의해 지구상 가장 가난하고 자유없는 나라가 되어 있지 않습니까? 38선 형성과정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김종필 전 총리도 잘 모르고 있는 걸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저도 잘 모르고 있다가 10여년 전 러스크와 트루먼 대통령 회고록을 읽어 보고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미국 때문에 한반도가 38도선을 경계로 분단되었으며, 이 때문에 한국전쟁의 비극도 발생하였고, 아직까지 우리 민족이 통일이 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미국은 우리 민족의 '불행의 씨앗'이라고 주장하며, 순진한 학생들에게 반미 감정을 불어 넣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지난 70년간 미국은 우리를 크게 세 번 도와 주었습니다. 첫번째는, 1945년 일본 제국주의를 무너뜨리고 우리 민족을 일제의 35년 압제에서 해방시켜 주었으며, 두 번째는, 38선을 그어 남쪽에서나마 시장경제,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이 탄생하게 해 준 것이고, 세번째는, 김일성이 시작한 6·25전쟁때 즉각 군대를 보내 김일성의 적화 야욕을 분쇄한 것입니다. 중공의 한 지방 방송 아나운서는 ‘김치 논란’과 관련해 “소국이 이웃 대국에 무례하게 굴다가는 나라가 망할 수 있다”는 망언을 했습니다. 얼마 전 싱하이밍 중공 대사가 “한국이 중국에 베팅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어디에 베팅해야 할까요? 2017년 4월 시진핑은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에게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중국의 일부였다”고 말했습니다. 문재앙은 2017년 12월 베이징대 연설에서 “중국은 높은 산봉우리, 대국이라 칭하고, 한국을 작은 나라”라고 말했습니다. 2021년 4월 식품의약품안전처 대변인실 공무원이 기자의 질문에 답하면서 “한국은 속국, 중국은 대국이라고 말했습니다. 식약처 공무원은 대통령의 말을 기억했다가 그대로 따라 했습니다. 2022년 2월 중국을 방문 중인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우리나라를 “작은 나라”라고 했습니다. 중화 사상에 물든 우리는 “중국은 대국이요, 우리나라는 소국이라”고 비하했습니다. 중국은 우리나라를 속국 대하듯 하는 안하무인격 태도는 ‘소국은 대국을 따라야한다’는 중화사상∙대국주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중국에는 베팅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인의 팔자를 고친 역사적 베팅을 알고 있습니까? 세계에서 나라 팔자 가장 사나웠던 우리나라가 자유민주에 베팅하고 2천년 가난과 속국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정말 우리나라가 미국에 베팅하지 않고 중국에 줄을 섰더라면 북조선처럼 지옥 속에 살고 있을 것입니다. 천만다행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1948년 미국에 줄을 선 것을 고마워해야 합니다. 아직도 중국에 줄 서자는 종북 정치인들을 보면 그저 한심할 따름입니다. 미국과 아무런 관련이 없던 우리나라가 한미방위조약으로 70여년간 전쟁이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5천년 역사에 이렇게 잘 살게 되었으며, 온 세계가 부러워 하는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손상윤 뉴스타운 회장은 “대한민국 정부는 왜 북조선과 중공 공산당에 6∙25 1급 전쟁 범죄 전범 처벌을 요구하지 않는가? 천문학적 피해 배상 공론화를 시작하자”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 주요뉴스
    2023-06-23
  • 강석종 칼럼,"5∙18 유공자 정치인 91%가 가짜, 민주당이 압도적!"
    5∙18 유공자 정치인 91%가 가짜, 민주당이 압도적! ‘스카이데일리’의 보도에 의하면, 5·18민주화운동 유공자로 등록된 약 4300명 중 상당수가 5·18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관련 분야 전문가들은 국가기념일로 정해져 있고, 5·18정신의 헌법전문 반영 움직임, 국가 예산으로 보상금 지급과 취업 우대 등 각종 특혜가 주어지는 현실을 감안하면 가짜 5·18 유공자 의혹은 반드시 짚고 넘어 가야 할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스카이데일리’는 지난해 연말께 국민적 관심사인 ‘5·18민주화운동 유공자 명단’을 단독 입수해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관련자와 전문가 자문을 받아 실체적 규명을 진행해 왔습니다. 이에 5·18민주화운동 기념일 43주년을 맞아 등록된 유공자 명단에 대해 개별적인 분석과 검증 결과를 토대로 정계·언론계·문화예술계 순으로 공개해 나갈 예정이라고 합니다. 스카이데일리가 입수한 유공자 명단은 5·18 관련 진실을 찾는 사람들이 광주 5·18 기념탑에 적혀있는 명단과 5·18 관련 단체들의 자료와 관계자 증언·언론 보도 등을 취합해 7년여 데이터 작업을 거친 자료입니다. A3용지 400쪽에 가까운 엑셀 파일 ‘5·18민주화운동 유공자 명단’은 4346명의 ‘위치 001-01’부터 ‘148-02’까지 ‘돌판 명단’에 새겨져 있는 이름·생존 여부·사인·주분류·시기·장소·작성 명단·생년월일·(공적·피해)내용·차수·분류·비고 순으로 나열돼 있습니다. 등록된 유공자들은 5·18 당시 시민군으로 활동했거나 진압군에 의해 사망 혹은 상해를 입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 5·18 당시 군사독재에 대항해 투쟁 활동을 벌이다 옥고를 치르거나 군인들로부터 폭행당한 사례도 있습니다. 하지만 유공자 중에는 5·18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인사들이 상당수 포함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일부 인사는 5·18 당시 광주가 아닌 타 지역에서 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등록돼 있어 유공자 선정 등록 과정에 심각한 오류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5·18 당시 11살이던 A(54) 씨는 1990년 수도권 소재 대학의 총학생회 소속으로 노태우 정부에 저항하는 학생운동을 했다는 명목으로 유공자에 등록되었으며, 경남 마산에 거주하는 B(57) 씨는 한 기업의 노조위원장으로 있던 1988년 무렵 회사를 점거 농성한 이력으로 5·18 유공자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5·18과 아무런 상관이 없음에도 유공자로 선정된 이들은 대부분 ‘민주화 명예’란 이름을 빌어 유공자로 등록되었습니다. 5·18단체의 한 관계자는 “엄격하게 따지면 5·18 당시 사망자나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사람들만 유공자로 선별을 해야 한다”며 “하지만 5·18광주항쟁 현장에 있지도 않았던 인사가 막연히 민주화 운동을 했단 이유만으로 유공자로 선정된 경우가 많은 게 사실”이라고 지적했습니다. 5·18 민주항쟁 허위유공자가 넘쳐나게 된 이면에는 ‘인우보증’ 제도가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기존 5·18 유공자가 보증만 해주면 누구나 별다른 증거가 없어도 유공자가 될 수 있는 법률적 허점을 이용한 측면도 있어 보입니다. 5·18 민중항쟁 구속자회와 5·18 민중항쟁 부상자회 등 관련 단체는 허위로 등록된 유공자들이 1990년부터 2015년까지 보상 차원에서 지급되는 나랏돈을 빼먹기 위해 오랜 기간에 상당한 규모로 세력화돼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최근 이들 단체 대표들은 서울 여의도 국회 앞과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가짜 유공자’들이 넘쳐나고 있다며 이들을 척결해 달라는 촉구 집회를 갖기도 했습니다. 유공자 명단에는 전·현직 언론인과 정치인·문화인·연예인 등도 다수 포함돼 있어 본지의 사실 검증 과정에서 속속 가짜 유공자 실체가 드러날 것입니다. 유공자 명단을 분석한 결과, 정치권에는 가짜 유공자일 개연성이 있는 인사들이 전·현직 국회의원과 도지사를 포함해 310명에 달했습니다. 이는 전체 유공자 중 7.1%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했습니다. 이들 중에는 국내 거물급 정치인뿐 아니라 국회의원 보좌관이나 특보 등을 지낸 이유로 유공자가 된 경우도 다수 있었습니다. 더불당의 한 현직 국회의원은 5·18 당시 광주가 아닌 타 지역에서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지만 유공자 명단에 버젓이 이름이 올라 있었습니다. 심지어 언론계에도 5·18항쟁과는 무관한 기자와 프로듀서(PD) 등 전·현직 인사만 181명으로, 언론사 대표를 지냈거나 편집국장·논설위원 등 고위 임원이나 간부급 출신들입니다. 이들의 공적 내역은 5·18항쟁과 연관 지을 만한 것이 기록돼 있지 않았습니다. 특히 언론노조 활동을 한 인사가 다수 포함돼 있어‘끼리끼리 나눠 먹기 한 것 아니냐’는 세간의 의혹이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일부 연예인도 유공자로 등록돼 있었습니다. 한 중견 가수는 자신이 부른 노래 중 한 곡이 ‘5·18을 연상시킬 수도 있다’는 이유로 유공자가 됐습니다. 이 밖에도 5·18이나 광주에 연고가 없는 남녀 중견 탤런트도 3명이나 유공자로 등록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시인·소설가·평론가 등 문화예술계 인사도 적잖이 눈에 띄었습니다. 1965년생 작가는 5·18을 소재로 시를 썼다는 이유로, 경기도 김포에 거주하는 1964년생 작가는 5·18을 소재로 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유공자가 됐는가 하면, 1963년생 영화평론가는 5·18 관련 평론을 했다는 명목으로 유공자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1955년생 사진작가 최모씨를 비롯한 상당수는 2014년 5·18 기념 순회사진전에 출품한 게 인정돼 유공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사례들은 한 두 건이 아닙니다. 1968년생 조모 씨는 1990년 박종철 3주기 추도식에 참가해 폭력 정권 타도하자는 시위를 하다 집시법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받은 것이, 1975년생 오모 씨는 양심적으로 병역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5‧18 유공자가 됐습니다. 5‧18 당시 전남도청 시민군 상황실장을 맡았던 박남선 5·18 기동타격대 상임고문은 “당초에 5·18 유공자가 되려면 1980년 5월 17일부터 말일까지 항쟁에 참여하거나 피해를 본 사람들로 규정돼 있었지만 민주당이 법을 바꾸는 바람에 관련 없는 인사들이 대거 들어오게 된 것”이라며 “5·18 유공자 관련 법을 다시 개정해 이들을 걸러내는 작업을 거쳐 엄격하게 적용시킬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 가운데 정치인들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 보면, 5·18민주화운동 유공자로 등록된 4346명 중 정치계에서 ‘가짜’로 추정되는 유공자가 가장 많은 것으로 확인됐다. ‘스카이데일리’는 지난해 연말께 국민적 관심사인 ‘5·18민주화운동 유공자 명단’을 단독 입수해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관련자와 전문가 자문을 거쳐 실체적 규명을 진행해 왔습니다. 이에 5·18 민주화운동 43주년을 맞아 등록된 유공자 명단에 대한 개별적인 분석을 토대로 최근 공개한 언론계와 문화예술계에 이어 정치계 인사들에 대한 검증 결과를 추가로 공개합니다. 다만 대법원에서 공인을 제외한 일반 유공자들에 대한 명단 비공개는 정당하다는 원심을 확정함에 따라 공인을 제외한 일반인의 경우, 개인을 특정할 수 있는 실명이나 소속, 공적·피해 내역 등은 신중하게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전·현직 정치인 339명 중 29명만 공적·피해 내역 확인했습니다. 5·18 유공자 1·2차 명단 4346명을 분석한 결과, 전·현직 정치인들이 339명(7. 8%)으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이들 정치계 인사 중 29명은 5·18당시 공적이나 계엄군에게 피해를 본 내역이 확인됐습니다. 이 중 14명은 5·18때 중상이나 경상 등 부상을 입어 유공자로 등록됐습니다. 나머지 12명은 군사법원에 회부된 경우였으며, 3명은 구금이나 체포를 당해5·18 유공자로 선정됐습니다. 1991년 광주지역 구의회 의원을 역임한 김○집(당시 25세)씨는 전남대에 재학 중에 5·18민중항쟁이 터지면서 대학생 조직·홍보팀장으로 활동하다 계엄군에 체포돼 군사법원에 회부됐습니다. 1998년 전남 순천시 기초의원에 당선됐던 심○근(당시34세)씨와 광주지역 정당 지역위원장을 역임한 송○석(당시 21세)씨 또한 계엄군에게 체포돼 고초를 겪었습니다. 2018년 광주시장 예비후보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던 김○수 씨를 비롯해 국민의당 창당발기인 중 한 명인 손○호 씨, 전북지역 시의원 김○오 씨 등은 5·18 당시 부상을 입어 유공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나머지 310명(91.4%)은 5·18과 무관하거나 아무 공적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들 29명을 제외한 나머지 310명(91.4%)의 정치계 인사들은 5·18이 아닌 다른 민주화운동이나 학생운동·노동운동 등을 한 이력으로 5·18 유공자로 등재됐으며, 공적이나 피해 내역 자체가 없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가짜 유공자일 개연성이 높은 정치계 인사 310명 중 86명은 ‘민주화 명예’ 5·18 유공자로 선정됐다. ‘민주화 명예’는 5·18과는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지만 대한민국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유공자로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민주화 명예를 제외한 나머지 224명은 이름과 소속·경력 등만 언급돼 있을 뿐 5·18 당시 공적이나 피해 내역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습니다. 5·18 관련 단체들은 이들이 ‘인우보증’ 방식을 통해 유공자로 편입됐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인우보증은 기존 5·18 유공자가 보증만 해주면 별다른 증거가 없어도 누구나 유공자가 될 수 있는 제도로 가짜 5·18 유공자가 넘쳐난 데 결정적 역할을 했했습니다. ◇가짜 추정 인사 중 정당 관계자가 82명…민주당 출신 정치인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가짜 유공자로 추정되는 정치계 인사들을 직업별로 살펴보면 전·현직 정당 관계자가 82명으로 가장 많았습니다. 또 광역시와 시‧군‧구의회 의원이 79명, 전·현직 국회의원이 49명으로 뒤를 이었습니다. 이밖에도 장·차관이나 청와대 수석·비서관 등 전·현직 고위공무원이 24명, 주요 기관이나 협회 단체장이 22명, 전·현직 광역자치단체장과 군수·구청장 등이 15명, 국내 거물급 정치인의 보좌관·비서관·특보 등이 15명이었습니다. 기타 각종 선거에 낙선했거나 직업 관련 언급이 뚜렷하지 않은 정치계 인사가 24명이었습니다. 특히 가짜로 추정되는 전·현직 국회의원과 시·군·구의회 의원들을 정당별로 분석한 결과 민주당 출신 인사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유공자로 등록된 전·현직 국회의원의 경우 총 49명 중 38명(77.5%)이 민주당 출신이었으며, 나머지 11명은 다른 정당 정치인들이었다. 시·군·구의회 의원 또한 총 79명 중 65명(82.2%)이 민주당 출신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와 관련 5‧18 당시 전남도청 시민군 상황실장을 맡았던 박남선 5·18 기동타격대 상임고문은 “당초에 5‧18 유공자로 인정되는 조건이 1980년 5월 17일부터 같은 달 31일까지 항쟁에 참여하거나 피해를 본 사람들로 규정돼 있었지만, 민주당이 법을 바꾸는 바람에 관련 없는 인사들이 대거 들어오게 된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전 총리부터 전·현직 국회의원, 청와대 수석, 전직 장·차관 등 다양합니다. 5‧18 유공자로 등록된 주요 정치계 인사들 중에는 전·현직 국회의원과 장·차관, 광역자치단체장 등 거물급 정치인으로 추정되는 인사들이 대거 포함돼 있습니다. 이들의 명단은 본지 취재진이 1차로 지난달 28일 광주 5‧18 기념공원 내 지하 추모승화공간 돌판에 새겨진 5‧18 유공자 명단과 대조 작업을 거쳤으며, 실제 본인이 맞는지 인터넷에 게재된 개인 프로필과 유공자 명단의 대조 작업을 추가로 거쳤습니다. 스카이데일리에서 확보한 유공자 명단에는 개인별 성명과 생년월일·소속·과거 정치 이력 등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습니다. 전·현직 국회의원의 경우 김○석·김○현·김○진·김○두·김○우·김○영·박○동·박○주·박○호·설○·유○수·양○조·이○영·정○국·한○갑·허○식 의원 등이 유공자가 되었습니다. 김○두 전 의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 수행비서 당시 1978년 명동 구국선언과 관련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 면회가 거절되자 시위를 하다 1978년 9월 26일 업무방해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아 5‧18 유공자가 됐습니다. 김○우 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1989년 4∼10월간 노태우 정권 퇴진을 위한 청년학도 투쟁연합 발대식 등에 참여해 시위를 벌이다 1989년 12월에 집시법 위반으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아 민주화명예로 5․18 유공자가 되었습니다. 김○영 전 더불당 국회의원은 5‧18 특별법 제정 찬성자 명단에 올랐다는 이유로 민주화명예 유공자가 되었으며, 박○주·박○호·허○식 의원 등은 개인 신상만 기록돼 있을 뿐 5‧18과 관련된 아무런 공적이나 피해 내역이 없었습니다. 공직 출신 중에선 이○찬 전 국무총리도 이름을 올렸습니다. 이 전 총리는 5‧18이 아닌 서울대 재학 당시 민청학련 사건 관련 긴급조치 위반으로 내란 음모죄를 선고받아 명예 유공자가 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비서실 보좌관을 역임한 오○호 씨가 등재돼 있고, 이○영 전 청와대 정무수석과 노무현 전 대통령 비서실 수석과 광역자치단체장을 지낸 박○춘 씨도 이름을 올렸습니다. 전직 대통령 비서실 정책실장을 역임한 김○현 씨와 문재인 정부 시절 청와대 비서관을 역임한 최○욱 씨도 유공자로 등재돼 있지만 공적 내역은 전혀 없었습니다. 전 노무현 대통령 특보와 장관을 역임한 김○경 씨도 5‧18 관련 아무런 공적 없이 유공자가 되었습니다. 시‧군‧구 의원 중 국회의원 보좌관과 광주지역 기초의원을 역임한 이○진 씨는 1986년 4월 대학교 재학 중 교내에서 4‧19기념제 참여 후 “반제·반파쇼 투쟁의 깃발 아래 힘차게 진군하자” 등을 외치는 등 수 차례 집회 및 시위를 주도하다 같은 해 8월 25일 집시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민주화명예로 5‧18유공자가 되었습니다. ◇김경재“가짜 유공자 문제, 민주당서 혁신 과제로 삼아야” 이와 관련, 김대중 전 대통령의 핵심 측근이던 김경재 전 한국자유총연맹 총재는 “민주당이 광주와 호남을 중심으로 정치세력을 마련했기 때문에 5‧18 유공자들을 보호하려 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면서도 “하지만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스스로 삼가고 다른 사람에게 공을 돌려야 했음에도 자신들이 가담했다고 이름 넣고 돈 받고 명예를 얻는 것은 떳떳하지 못한 처사”라고 지적했습니다. 김 전 총재는 또 “더불어민주당의 진정한 혁신은 광주민주화운동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부터가 시작”이라며 “이를 위해선 가짜 5‧18 유공자 문제를 자유주의 진영뿐 아니라 민주당에서도 혁신의 과제로 내세워야 할 것”이라고 일갈했습니다. 5∙18 유공자 정치인 339명 중 91%가 가짜이며, 민주당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뻔뻔스럽고, 창피도 모르고, 자기들의 잘난 맛에 살고 있는 민주당! 양심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우리 세금으로 저런 인간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는 것에 자괴감마저 듭니다. ‘사람이 먼저’라더니 돈이 먼저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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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14
  • 강석종 칼럼,"한국 전쟁 고아의 아버지 참전용사 위트컴 장군을 아십니까? "
    한국 전쟁 고아의 아버지 참전용사 위트컴 장군을 아십니까? 어제 저녁에 텔레비전을 보다가 뉴스에 ‘파란 눈의 의인’, ‘고아의 아버지’,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위트컴 장군’이라는 멘트가 나왔습니다. 누구인지 궁금해서 위트컴 장군(Richard S. Whitcomb)에 대해서 살펴 봤습니다. 부산시 남구 대연동에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유엔이 관리하는 전몰장병 묘지인 ‘세계 유엔 기념공원’이 있습니다. 전쟁과 평화의 기억이 공존한 부산은 6·25 전쟁에서 전투는 없었지만 전쟁의 흔적이 짙게 남아있는 곳입니다.이곳에는 1950년 6.25 전쟁에 참전해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우방국 2,300여 기의 영령과 함께 유일하게 미국 장성인 리차드 위트컴 장군이 잠들어 있는 곳입니다. 리처드 위트컴은 1894년 미국 중부 캔자스주 캔자스시티에서 출생했습니다. 아버지 조지 허버트 위트컴은 캔자스주 대법관을 역임한 저명 법률가였고, 어머니 제시 위트컴 역시 당시 남자대학에서 최초로 강의한 법학 교수였습니다. 전통적인 청교도 가문에서 태어나 엘리트 교육을 받은 리처드 위트컴은 유년 시절 기독교적 정의와 인류애를 터득했습니다. 캔자스주 토피카의 워시본(Washbon) 대학에 진학한 후 미식축구 선수, 토론회 우수 토론자로서 명성을 얻었으며, 같은 시기 학생 자원 선교활동회(SVM· Stu 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s)에서도 활동하며 선교사로서 필리핀에서 사역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미국이 참전을 결정하여 학군사관후보생(ROTC)으로 장교 임관한 위트컴도 전쟁에 참전하여 유럽에서 활약했습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당시 독일 해군의 이동 감시초소인 아이슬란드 케플라비크 기지 건설 참여 후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중 가장 치열한 전투였던 오마하 전투에 참전하여 5만여 명의 연합군 병력, 군수 물자 수송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제임스 밴 플리트(James Alward Van Fleet)와 더불어 프랑스 최고 무공훈장을 받았습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는 17만 명의 대규모 병력이 동원된 필리핀 상륙작전의 수송, 군수 보급 업무를 마치고 준장으로 승진했으며, 1953년 6·25전쟁 휴전협정이 무르익어갈 무렵 부산의 제2군수기지 사령관으로 부임했습니다. 군수기지 사령관으로 재임하던 1953년 11월 27일 오후 8시 30분, 부산역 부근에서 큰 불이 났습니다. 난롯불 부주의로 일어난 불은 강풍을 타고 순식간에 확대되어 대화재가 발생했습니다. 14시간에 걸친 화마는 부산역 인근 번화가의 주요 건물 및 민가 등 약 1,250호를 태우고 다음 날 오전 10시 20분에 완전히 진화되었습니다. 피해는 주택 3,132채가 완전히 소실되었고, 사상자 29명, 6,0 00여 세대 3만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습니다. 판자집도 변변히 없어 노숙자에 가까운 생활을 하던 피난민들은 부산역 건물과 인근에 있는 시장 점포 등이 유일한 잠자리였는데 대화재로 오갈 데가 없게 되었으며, 입을 옷은커녕 먹을 것도 없었습니다. 참상을 목격한 위트컴 장군은 민간에 사용할 수 없는 군수 물자를 직권으로 군수창고를 열어 추위에 갈 곳이 없는 이재민들에게 천막촌을 건립해 주고 군용담요와 군복, 먹을 것 등을 3만 명의 피난민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었습니다. 정부도 할 수 없었던 용단이었으나 군수 물자 무단 전용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연방 의회의 청문회에 불려갔으며,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도 증언해야 했습니다. 의원들의 쏟아지는 질책에 장군은 조용히 말했습니다. “우리 미군은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하지만, 미군이 주둔하는 곳의 사람들한테 위기가 닥쳤을 때 그들을 돕고 구하는 것 또한 우리의 임무입니다. 주둔지의 민심을 얻지 못하면 우리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고, 이기더라도 훗날 그 승리의 의미는 쇠퇴할 것입니다”라고 답했으며,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이다(War is not done with sword nor the rifle. Genuine triumph is for the sake of the people in the country).”라고 말해 오히려 의원들은 일제히 기립하여 오래도록 박수를 받았습니다. 미국 정부는 추가 군수품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군수기지 사령관의 1차 소임은 장기전으로 소모된 유엔군에게 막대한 장비와 탄약을 재보급하여 화력 전투를 보강하고 한국군의 전력을 증강하여 유리한 조건으로 휴전을 성립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긴박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투에 사용할 군수 물자를 무단으로 전용하며 민간의 아픔과 고통을 품는다는 것은 비상식적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위트컴은 한국인들이 겪고 있는 전쟁의 고통과 필연적 후유증을 인간적인 측면에서 가슴 아파했던 것입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 온 뒤 장군은 전쟁이 끝났는데도 돌아가지 않고, 정치권을 설득해 군수기지가 있던 곳을 이승만 대통령한테 돌려주면서 ‘이곳에 반드시 대학을 세워달라’고 청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약 50만 평의 캠퍼스 부지를 제공받았고, 휘하 공병부대를 동원하여 교사(校舍) 건축을 도왔습니다. 그곳이 바로 지금의 부산대학교로써, 부산대학교가 설립된 배경입니다. 그러나 부산대 학생도, 교직원도, 졸업생도 이런 사실을 거의 모를 것입니다. 이 외에도 이재민 주택 건설, 도로 건설, 의료 시설 건립 등을 지원하고 부산대를 비롯한 각급 학교 설립을 도와 한국과 부산의 전후 재건에 힘썼습니다. 부산 대화재를 계기로 위트컴 장군은 한국 정부와 부산시의 총체적인 재건을 위해 당시 테일러 주한 미8군 사령관과 긴밀한 협의를 하면서 미군대한원조(AFAK) 프로젝트를 계획했고 미국 의회 등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미군대한원조 프로젝트는 부산 대화재를 극복하기 위한 묘책으로 위트컴 장군이 제안하고, 미8군 사령관 맥스웰 테일러(Maxwell D. Taylor) 장군이 승인해 탄생했습니다. 또한 장군은 영도구의 피난민촌에서 만삭의 임산부가 보리밭에서 아기를 낳는 장면을 목격하고 조산소를 설치해 주었으며, 부산 중구에 메리놀병원을 증축하는 데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6.25 전쟁 두 달 전인 1950년 4월 15일 메리놀 수녀회에서 설립한 메리놀병원은 시설도 열악하였지만 밀려오는 피난민 환자들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위트컴은 병원기금 마련을 위해 사령관의 체면을 버리고 자신은 파란 눈의 갓에 도포를 걸친 노인으로, 메리놀 수녀회와 부대원들은 한복을 입은 서양인으로 단장하여 거리 가장행렬을 하며 모금 활동을 펼쳤습니다. ‘사람들은 장군이 체신없이 왜 저러느냐?’고 수근 거렸지만 개의치 않고 이 땅에 기부문화를 조성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습니다. 메리놀병원은 위트컴의 노력으로 미군대한원조(AFAK) 기금을 지원받아 1954년 7월 29일 현재의 위치에 지상 3층 160병상을 가진 정식 병원으로 기공식을 하게 되지만 신축 자금은 부족했습니다. 예하 미군 장병에게는 월급의 1%를 기부하게 하여 기금을 충당했습니다. 메리놀병원, 성분도병원 건립 등 전쟁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가난한 병자들을 위한 장군의 발상과 헌신적 노력에 세계가 박수를 보냈습니다. 한복 차림의 벽안(碧眼)의 장군을 두고 ‘라이프(Life)’지는 ‘한국의 양반(Gentle man of Kore a)’이라고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사명은 1950년 겨울 개마고원 장진호 전투에서 몰살한 수천여명의 젊은 미국 병사들이 유해를 찾아 미국으로 송환하는 일이었습니다. 장진호 전투에서 미국 해병대 절반 이상의 희생이 있었기에 중공군의 남하가 2주간 지연되었고, 이렇게 번 시간을 이용해 피란민들 20여만 명이 그 유명한 ‘흥남 철수’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리처드 위트컴 장군은 1954년 퇴역 후에도 한국에 남았습니다. 전쟁 기간 틈틈히 고아들을 도와온 위트컴 장군은 당시 전쟁고아를 위해 함께 활동하던 한묘숙 여사와 결혼했습니다. 한묘숙 여사는 남편과 결별 후 두 자녀를 키우던 ‘고아원 원장’이었고, 선물 상자를 들고 고아원을 방문한 위트컴 장군은 독신의 노신사였습니다. 한묘숙의 보육 활동에 감동한 위트컴은 이듬해 전격적으로 청혼하였고, 두 사람은 33년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퇴역 후 전쟁고아 돕기, 미군 유해 발굴에 남은 삶을 바치면서 ‘전쟁고아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얻었습니다. 1982년 7월 12일 작고한 장군은 “내가 죽으면 한국에 묻어달라.”는 것과, 부인에게 ‘내가 죽더라도 장진호 전투에서 미처 못 데리고 나온 미군의 유해를 마지막 한 구까지 찾아와 달라’고 유언했습니다. 이에 따라 유엔기념공원 내 미국 묘역에서 영면에 들었습니다. 부인 한묘숙 여사는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북조선은 장진호 부근에서 길죽길죽한 유골만 나오면 바로 한묘숙 여사한테로 가져왔고, 한 여사는 유골 한 쪽에 300불씩 꼬박꼬박 지불했습니다. 그 유골 중에는 우리 국군의 유해도 여럿 있었습니다. 하와이를 통해 돌려받은 우리 국군의 유해는 거의 대부분 한 여사가 북조선으로부터 사들인 것들입니다. 한 여사는 한때 간첩누명까지 쓰면서도 굴하지 않고 남편의 유언을 지켰습니다. 장군의 연금과 재산은 모두 이렇게 쓰였고, 장군 부부는 끝내 이 땅에 집 한 채도 소유하지 않은 채 40년 전에 이승을 떠났습니다. UN공원에 묻혀있는 유일한 장군 출신 참전용사가 바로 위트컴 장군입니다. 끝까지 그의 유언을 실현한 부인 한묘숙씨도 장군과 합장되어 있습니다. 국가보훈처는 작년 11월 8일, 민족상잔의 비극 6·25전쟁 이재민을 돕고 한국 재건에 힘쓴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했다.’고 평가받는 고(故) 리처드 위트컴(Richard S. Whitcomb) 미 육군 준장에 대한 국민훈장 1등급인 무궁화장 추서안이 국무회의에서 의결됐다고 밝혔으며, 작년 11월 11일, 부산 유엔기념공원에서 열린 유엔참전용사 국제추모식에서 한덕수 국무총리가 위트컴 장군 자녀인 민태정 위트컴희망재단 이사장에게 훈장을 추서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는 전봉준 동상은 있어도, 전태일 기념관은 있어도, 위트컴 장군에 대한 동상 하나 없습니다. 부산에도, 서울에도 없습니다. 위트컴 장군 조형물 건립은 2018년 한 차례 추진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유엔평화기념관에 조형물 설치를 추진할 예정이었지만 노출 빈도가 떨어진다는 내부 지적 때문에 무산됐습니다. 이후 기약 없이 답보하던 조형물 제작은 작년 11월 국가보훈처가 위트컴 장군에게 국민훈장 1등급 무궁화장을 추서하기로 결정하면서 급물살을 탔습니다. 이러한 리처드 위트컴 장군의 인류애와 한국 사랑 정신을 기리기 위해 장군이 떠난 지 꼭 40년 만에 뜻있는 자들이 모여 위트컴 장군 조형물을 만들기로 결의했습니다. 조형물 건립 시민위원회도 11월 10일 발족했습니다. ‘리차드 위트컴 장군 조형물 건립 시민위원회’ 발족 행사장에는 각계각층 인사 100여 명이 모였습니다. 부산 남구를 지역구로 둔 박수영 국민의힘 국회의원은 시민위원회 발족식 개회사에서 “70년 전 부산역전 대화재로 추위와 배고픔에 떨었던 이재민 3만 명이 위트컴 장군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이제 되돌려줄 차례이다. 시민 3만 명의 성금 모금을 통해 기념조형물을 건립하고 장군의 정신을 되새기자.”고 말했습니다. 위트컴 장군의 딸 민태정 위트컴희망재단 이사장은 “조형물 건립은 아버지의 뜻을 기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라며 청중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습니다. 부산지역 정계, 재계, 언론계, 학계 인사로 구성된 ‘리차드 위트컴 장군 조형물 건립 시민위원회’는 2023년 11월 10일까지 1년간 시민 3만 명이 1만 원씩 내는 방식으로 총 3억 원을 모금해 조형물을 건립하는 캠페인을 벌이기로 했습니다. 사업에는 향토건설업체 협성종합건업 정철원 회장이 몇 년 전 조형물 건립을 위해 3억 원을 희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시민모금운동 방식으로 장군의 조형물을 건립하기로 한 것은 동상 건립 자체보다 장군이 부산시민을 위해 베푼 정신을 공유하고 기리자는 취지에서입니다. 모금 예상 인원 3만 명도 의미가 있습니다. 1953년 11월 27일 부산역 대화재와 관련 있습니다. 이날 화재로 6,000세대 3만 명의 이재민은 추위와 배고픔에 떨어야만 했습니다. 3만 명은 당시 위트컴 장군의 도움에 대한 보은(報恩)의 의미가 담겼습니다. 위트컴 장군의 조형물이 올 해 11월 즈음에는 부산에 세워질 것 같습니다. 늦어도 너무 늦었지만, 국가 예산 말고, 재벌 팔을 비틀지도 말고, 70여년 전 수혜를 입었던 피난민 3만명, 딱 그 수만큼 1인당 1만원씩 해서 일단 3억 원을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민주주의의 생명은 참여입니다. 보은도 십시일반, 참여해야 합니다. 1만원의 기적을 이루어 봅시다. 70년전, 전쟁고아들을 살뜰하게 살피던 위트컴 장군을 생각하면서, 메리놀 병원을 세워 병들고 아픈 이들을 어루만지던 장군의 손길처럼, 대학을 세워 이땅에 지식인을 키우려던 그 철학으로, 부하의 유골 하나라도 끝까지 송환하려고 했던 그 마음을 생각하며 각자 내 호주머니에서 1만 원씩 냅시다. 딱 커피 두 잔 값씩만 냅시다. 1만 원의 기적이 한국병을 고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설마 이 땅에 1만원씩 낼 사람이 3만명도 안 되지는 않겠지요? 1만원의 기적은, 부산은행 101-2073-6988-01 (사)국제평화기념사업회를 통해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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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8
  • 강석종 칼럼,"왜 진보들은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를까?"
    왜 진보들은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를까? ‘진보’라고 불리는 단체들은 국가 행사에서 애국가를 부르지 않고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릅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님을 위한 행진곡’의 노랫 가사는 진보진영 원로이자 상징이었던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을 역임한 백기완 소장의 시 ‘묏비나리’에 곡을 붙인 것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백기완은 어떤 인물일까요? 백기완은 1932년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동부리에서 아버지 백홍렬(白弘烈)과 어머니 홍억재 사이에 4남 2녀 중 넷째로 태어 났습니다. 백기완의 조부인 백태주(白台周)는 3.1운동 당시에도 수천장의 태극기를 제작하여 은율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하는 등 민족운동에 앞장 섰습니다. 백기완은 백범 김구 선생과도 깊은 인연이 있었습니다. 백범 김구는 1898년 치하포 사건으로 인천 감리서에 수감되었다가 탈옥했었는데, 황해도 은율 땅을 몰래 지났을 때 백기완의 조부 백태주가 백범을 자신의 집으로 피신시키고 극진히 돌봐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해방 후 그의 부친 백홍렬이 그를 데리고 서울로 가서 백범을 만나게 되었고, 그때부터 그는 백범을 따르게 됩니다. 백범 또한 그를 좋아해서 그가 즐겨 읊던 한시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를 휘호로 써서 주기도 하고, 중학교까지 학비를 대주리라 약속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백기완은 백범 김구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백기완은 재야운동가로 1960년대 한일협정 반대 투쟁을 계기로 민주화운동에 투신했습니다. 그 후 3선 개헌반대와 유신철폐 등 민주화운동에 많은 활동을 했으며, 1974년 유신헌법 철폐 100만인 선언 운동을 주도하여 긴급조치 1호 위반혐의로 1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75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습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열린 제13대 대통령선거 당시 재야운동권에 독자 후보로 추대돼 선거에 입후보 했지만 야권후보 단일화와 군부독재 종식을 촉구하면서 중도사퇴했습니다. 5년 뒤인 1992년 제14대 대통령선거에서도 재야 운동권의 독자 후보로 추대돼 출마했지만 낙선했습니다. 지난 2020년 1월 폐렴 증상으로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해 투병생활을 이어가다 2021년 2월 15일 오전 향년 88세로 별세했습니다.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는 어떤 뜻일까요? ‘묏비나리’는 1979년 YWCA 위장결혼식 사건의 주모자로 수감된 백기완이 서울 서대문구치소에서 쓴 15장의 장편시입니다. ‘묏비나리’의 ‘묏’는 묘지, 산소(봉분)를 뜻하며, ‘비나리’는 축원, 기도, 굿판을 뜻합니다. 즉 ‘묏비나리’는 ‘죽음의 굿판’이라는 뜻입니다. ‘묏비나리’는 죽음을 미화하고, 선동하고, 군대와 남한 정권을 비하하며, ‘죽음을 불사하고 투쟁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묏비나리’라는 시에 나오는 주요 용어를 살펴 보면, ‘목숨을 걸어라’, ‘죽음을 두려워 마라’, ‘죽음, 들개, 살점, 해골바가지’, ‘죽이려는 자’, ‘모진 채찍’, ‘꿈틀대다.’, ‘치켜뜬 눈’, ‘군바리’, ‘꼬꾸라지고’, ‘분단의 벽’, ‘제국의 불야성’, ‘해방’,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산자여 따르라’, ‘사람을 산채로 키워서 신경과 경락까지 뜯어 먹는 건 바로 이 세상 남은 마지막 짐승 가진 자들의 짓이라⋯’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를 1992년 간첩혐의로 수감되었던 황석영이 개사를 해서 1982년에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작사했습니다. 황석영이가 광주에서 만든 연극단체 ‘광대’는 종북 단체의 선전선동 단체가 되었습니다. 연극단체 ‘광대’에서 활동하던 김종률은 전남대 출신으로 제3회 MBC대학가요제에서 ‘영랑과 강진’을 불려서 은상을 수상한 경력도 있습니다. 그가 1982년에 舊 소련의 T34 탱크부대의 군가를 표절하여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작곡했습니다. 1980년에 사망한 고(故) 윤상원 씨와 1978년에 사망한 故 박기순 씨의 영혼결혼식을 1982년에 했습니다. 이 결혼식에서 ‘윤상원을 기린다’고 하면서 5·18 민주화운동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1970년대 말부터 광주의 극회 광대에서 활동하던 문화 운동 관련자들이 모여 지하방송 ‘자유 광주의 소리’를 창설하기로 하고 첫 작품으로 만든 음악극 「넋풀이 굿(빛의 결혼식)」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넋풀이 굿」은 박기순과 윤상원의 영혼결혼식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임을 위한 행진곡」은 고인이 된 두 남녀가 저승으로 가면서 ‘산 자’에게 남기는 마지막 노래로 배치되어 있으며, 이후 민중가요의 가장 대표적인 양식으로 자리매김 되었습니다. 1980년대 말부터 이 노래는 민주화운동 집회를 시작할 때 민주화운동의 열사들에게 바치는 묵념과 함께 불리는 노래가 될 정도로 한국 민주화운동을 대표하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김대중 정부 이후 5월 18일이 국가 기념일로 지정된 이후 이 노래는 기념식장에서 공식적으로 제창되었으나 2010년과 2013년 국가보훈처가 기념식에서 이 노래를 빼려다 유족들의 반대에 부딪치는 사건이 발생했고, 2013년 6월 국회에서 이 노래를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공식 추모곡으로 지정하자는 결의안이 통과되었으며, 제19대 문재앙때 2017년 5월 12일 37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할 것을 국가보훈처에 지시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님을 위한 행진곡’으로 알려졌으나, 표준어 규정에 따라 최근에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고 부릅니다. 종북 빨치산에서 전사를 양성하는데 광주에 양성된 남민전 전사 3명이 윤한봉, 김상윤, 김남주입니다. 김남주는 공작금으로 광주에 ‘녹두서점’을 개업했는데, 이 서점이 종북단체의 아지트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파리코뮌 강의를 하면서 종북 전사를 양성했습니다. 여기서 양성된 남민전 전사가 윤상원∙이학영∙박석률 등입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처음 만들어질 때 영혼결혼식의 신랑 윤상원은 광주지역에서 활동하던 남민전 전사입니다. 그는 서울에서 다니던 직장을 6개월 만에 퇴사하고 1978년 10월 아세아자동차 바로 옆 공장에 위장 취업을 했으며, 1980년 4월 김대중 지원단체의 사무국장이 되었습니다. 1980년 5월 18일 폭동과 광주시민 선동에 관여하고,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에서 새벽 2시에 칼에 찔려 죽은 뒤 불에 태워졌습니다.(간첩의 소행으로 의심) 영혼 결혼식의 신부 박기순은 역시 종북 남민전의 여전사이고, 1978년 전남대 3학년때 좌빨 활동으로 퇴학당하고, 아세아자동차 옆 한남 플라스틱 공장에 위장 취업했으며, 1978년 12월 26일 오빠 박형선의 집에서 자다가 연탄가스로 사망했습니다. 종북 남민전의 윤한봉이 5.18 재단 설립자인데, 그의 여동생이 박기순의 오빠 박형선의 부인입니다. 윤한봉은 518 재단의 설립자가 되어 518폭동 훨씬 전 1978년 12월 26일에 연탄가스로 죽은 자기 여동생의 시누를 1급 518 유공자로 만들었습니다. 1989년 북조선의 김일성이 황석영과 윤이상을 북조선으로 입북시키고, 5∙18을 이용하여 대남 선전선동에 쓸 영화제작을 하라고 했습니다. 황석영이가 시나리오를 쓰고 윤이상이가 영화음악을 만들어서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를 김일성에게 바쳤습니다. 이 영화의 주제곡이 ‘임을 위한 행진곡’이고, 이 영화에서 ‘님’은 ‘김일성’을 뜻합니다. 그래서 북조선과 종북 단체에게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김일성에 대한 충성의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백기완이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을 향해, 처절하게 절규하며 죽음의 춤판에 앞장서라는 요구는 무엇을 위한 민중 투쟁이며, 누구를 위한 해방이고, 누구를 위한 죽음입니까? 이러한 배경을 가진 노래를 목청껏 합창하는 우파 정치인들은 대가리가 비었거나 우파 행세하는 골수 좌파들입니다. 왜 김대중의 종북 좌파들과 김영삼의 민주팔이 좌파들이 국가 행사에서 애국가를 부르지 않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이유를 아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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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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