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3(금)
 

3∙1 만세운동은 이승만에 의해서 일어 났다.

 

곧 삼일절 103주기입니다. 삼일절 하면 떠오르는 이름이 우리의 영원한 누나 유관순 열사입니다. 


그런데 유관순 열사의 마지막 유언을 기억하십니까?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보통 한국인들은 3.1운동의 배경이 동경 2.8 만세 사건의 영향을 받아 손병희의 천도교와 이승훈을 비롯한 기독교, 그리고 불교 지도자들의 연합으로 이뤄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시대적 상황과 여러 역사적 자료를 검토해보면 이 운동의 배경에는 거목 이승만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말미,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1918년 미국 상∙하원 합동 국회 연두 교서 연설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했습니다. 


이것은 윌슨 대통령이 프린스톤대 총장 재학시절부터 '약소민족 해방론'을 이승만으로부터 들어 왔던 열매로 추정됩니다. 


이 연설을 들은 이승만은 1차대전이 끝나면 대한 독립의 기회가 올 것을 곧 바로 직감하고 본국 내에서 독립 열망에 대한 궐기의 필요성을 자신이 거주하고 있던 하와이에 다녀가는 동지들에게 역설하기 시작했습니다. 

유학을 마치고 귀향길에 찾아온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을 비롯, 오가던 동지들뿐 아니라 친분 있던 선교사들에게도 이 메세지를 조선 반도에 기회 있을 때마다 보냈습니다. 


이 메세지는 귀국길에 일본 한인 유학생들에게도 전해졌습니다. 동양인 최초 프린스톤대 정치학박사 이승만의 이러한 메세지는 동경 한인 YMCA 청년 중심으로 동경 2∙8 유학생 만세운동으로 열매를 맺게 됩니다. 


1918년 11월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 강화회의에서 약소민족 의제가 정해졌다는 소식을 접한 이승만은 '드디어 기회가 왔다'란 밀서와 밀령을 본국과 중국에 급히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라는 책의 증언에 따르면 1918년 12월 어느 날 이승만이 보낸 밀사가 중앙학교 숙직실로 찾아 왔습니다. 


그가 지니고 온 밀서의 내용은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론의 원칙이 정식으로 제출될 이번 강화회의를 이용하여 한민족의 노예 생활을 호소하고 자주권을 회복시켜야 한다. 미국에 있는 동지들도 이 구국운동을 추진하고 있으니 국내에서도 이에 호응해 주기 바란다.” 


당시 이 메세지를 전달받은 사람은 김성수, 송진우, 현상윤 세 사람이었고, 이들 3인은 곧 바로 거국적인 항일독립운동 주도의 목표를 세웁니다. 


이 세 사람은 즉시 천도교 손병희, 기독교 이승훈, 함태영 등과 합세하여 3.1 궐기대회를 기획, 추진합니다. 


이 밀서에 대한 기록은 초대 상공부 장관을 역임한 임영신의 자서전 「나의 40년 투쟁사」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은 1949년 출간된 「우남 이승만 전」 가운데 ‘3∙1운동 전후’장에 나옵니다. 이에 의하면 이승만은 “여러 차례 서면과 밀사, 그리고 전신으로도 보냈다”라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1918년 겨울, 안창호가 이끄는 국민회는 하와이에 있던 이승만을 파리강화회의에 미주 대표로 파송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이에 이승만은 1919년 초에 하와이에서 미 본토로 들어와 서재필과 장택상을 2월 5일 초에 뉴욕에서 만나 여러 회합 끝에 미국의 독립발상지 필라델피아에서 미주 동포들을 중심으로 '한인 대표자 회의'를 갖고 시가행진을 통해 독립궐기 행사를 가질 것을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이에 동의한 서재필과 함께 공동 서명한 전단지를 만들어 미국 동지들에게 발송했습니다. 


이렇게 2월에 이승만 스스로 미국 동지들과 함께 기획한 이 행사는 본국에서 3∙1운동 일어난 다음 달 4월 14-16일, ‘제1차 한인대회’라는 이름으로 진행되고, 회의 도중 상해임시정부 대표로 이승만이 선출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대회 마지막 날 모인 대표자 전원은 회의 장소로부터 필라델피아 독립기념관까지 태극기를 들고 독립 만세 시가행진을 가지고 이승만이 영문으로 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외침으로 행사를 마쳤습니다. 


회의록에 의하면, 임시 의장으로 이 대회 개회를 선언한 서재필은 자신이 미국 시민권자이기 때문에 제1차 한인대회 의장 자격이 없으니 공식 의장을 선출해 줄 것을 요청하자 이승만이 일어나 이것은 우리 모두 양해하는 바니 서재필이 정식 의장직을 맡아줄 것을 동의, 만장일치로 가결하므로서 서재필은 이 대회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습니다. 


그러나 회의 도중 이승만이 상해 임시정부 대표자로 선출된 것을 알게 되자 서재필은 이승만을 민족 독립운동의 지도자로 앞세우고 그를 돕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이승만은 본국에는 3∙1운동의 불꽃을 당겼고, 미국에서는 직접 독립궐기대회를 주관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로 미루어보면 3∙1운동은 본국에서 스스로 일어난 운동이 아니라 미국 동포는 아니지만 미국에 살던 독립운동가 이승만의 혜안과 선각자의 역활로 시작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공산당으로부터 우리 민족을 지켜 자유민주공화국을 세웠던 건국 대통령 이승만은 일제 압제로 고통받고 있던 우리 민족을 독립운동을 통해 민족정신을 깨우친 위대한 선구자요 독립투사입니다. 


특별히 미국에 살고 있는 동포들은 이러한 위인이 미국 동포 아닌 참 미국 동포였다는 사실에 자긍심을 갖고 우리 후손들을 이승만에 버금가는 위대한 지도자들로 양성하는 일에 비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참고 : 이승만은 근 40년간 미국 거주자이면서 미국시민권 취득이 얼마든지 가능했었으나 본인이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타국의 시민권을 가질 수 없다 하여 우정 시민권을 획득하지 않았다.)이승만은 29세에 한성 감옥에서 「독립정신」 책을 저술한 사상가이며, 5년 반 만에 죠지 워싱톤 대학 학사, 하바드 대학 석사, 프린스톤 대학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은 천재였습니다.40여년간 조국이 해방될 때까지 끊임없이 투쟁했던 독립운동가였으며, 70% 이상이 사회∙공산주의 사상을 갖고 있던 반토막 남한에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운 건국 대통령입니다.6∙25 남침으로 적화위기에 몰린 나라를 유엔군을 통해 나라를 구하고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로 경제 대국 발전의 기틀을 세운 지도자입니다.4∙19 데모로 부정선거 책임을 자신이 걸머지고 ‘백성이 원한다면⋯’ 스스로 하야하여 물러선 진정한 민주주의 투사입니다.5∙16 군사정권이 귀국길을 막는다고 낙심하면서도 ‘조국을 지켜 달라’고 하나님께 맡기며 간절히 기도하며 하와이에서 외롭게 운명하신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입니다.바로 그 분이 올 해 103주년을 맞이하는 3.1절 뒤에서 우리를 내려다 보고 계십니다.우리들 모두 독립선언서, 33인 민족대표, 유관순 등은 잘 알면서도 정작 알아야 할 3∙1 독립운동의 거대한 불화산의 단초가 되었던 이승만은 오늘도 역사의 뒤안길에 희미한 자국을 남기고 있지만, 역사적 사실(Fact)과 진실은 영원히 감춰지지 않는다는 역사의 진리를 결코 간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이승만, 한성 감옥에서 자신을 만나주셨던 구원자 예수, “썩은 고목 나무에서 새싹이 나오려면⋯” 새 종교, 기독교로 사람이 교화되는 길만이 영국과 미국 같은 선진 문명국이 될 수 있다고 믿고 평생을 기독교 교육자로 헌신하여 YMCA, 하와이 한인 학교, 하와이 한인교회를 설립하여 민족을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경천애인” 가르침으로 이끌었던 이승만! 


당신은 한국의 죤 낙스요,당신은 한국의 그룬트비 목사요,당신은 한국의 죠지 워싱톤이요,당신은 진정한 '민족 목회자' 이셨습니다.


위 내용의 많은 부분을 인보길의 「이승만 현대사, 위대한 3년 1952-1954」 서론에서 발췌한 이승만 건국 대통령 기념사업회 필라델피아 지회장 황준석 목사의 글을 소개한 것입니다.


1904년에 ‘이승만’이라는 청년이 미국에 공부하러 갔습니다. 전 세계에서 제일 잘 사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하고 살펴보니까 기독교 나라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우리나라 기독교 인구가 5만명 밖에 되지 않았으며, 어떤 기록에는 3천명 밖에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이승만은 기독교 입국론을 세웠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매일 1시간씩 “주님! 이 땅에 100만명의 성도를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하관식을 할 때에, 그의 관이 땅속으로 내려갈 때 기독교 인구가 108만명을 돌파했습니다. 그리고 70년만에 1,200만명의 성도가 된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기도를 했지만 오늘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은,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요, 둘째는 이승만의 은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세우지 않았다면 우리는 북조선의 김일성 수령님을 모시고 살아야 했습니다. 대한민국에 태어난 5천만 국민들은 이승만의 혜택으로 지금까지 살아 온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이승만 대통령이 1948년 8월 15일 세운 나라입니다. 전 세계 그 어떤 나라에도 없는 건국 설계도를 그렸습니다. 첫째는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 둘째는 경제적으로는 자유시장 경제, 셋째는 군사 안보적으로는 한미동맹, 넷째는 종교적으로는 기독교 입국론이었습니다. 이것을 ‘대한민국의 4대 기둥’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이승만의 설계도대로 박정희 대통령이 집을 지은 나라입니다. 이 두 분의 계획은 적중했고, 그 결과 우리는 세계 10대 나라에 우뚝 서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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