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3(금)
 

독립 투사 「이규채 연보」의 ‘감정가 0원’


예전에 ‘KBS TV 진품명품’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세월 속에 묻혀 있던 진품을 발굴해 전문 감정위원의 시선으로 감정가를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때로는 창고 안에 방치되어 굴러 다니던 족자가 대단한 보물로 밝혀지기도 하고, 집안 대대로 내려온 도자기가 가치가 없는 것으로 밝혀져 출품자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지난 2019년 8월 11일 방송에는 1944년 전후에 작성된 회고록 한 점이 출품되었습니다.


독립운동가 이규채(1890~1947)가 일제 말기 자필로 적은 일명 「이규채 연보(회고록)」가 소개되었습니다. 


이규채 선생은 일제 강점기 만주지역 항일 투쟁의 핵심 인물로 꼽히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장원 의원과 한국독립군 참모장 등을 지냈습니다.


회고록 작성 당시 상황이 열악했는지 제대로 원고지가 아니라 세금계산서 같은 용지에 당시 상황이 생생하게 일기처럼 적혀 있었습니다. 얼핏 초라해 보이는 이 회고록을 출품한 사람은 회고록 주인의 증손자였습니다. 그는 희망 감정가로 10만 815원을 적어서 감정을 의뢰하였습니다.


감정가는 엄청난 속도로 전광판 숫자 최대한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전문가들의 감정가를 보는 순간, 많은 시청자들은 그 감정가에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결국 ‘0원’으로 결정되었습니다.


'0원'이라니⋯


전광판에 나온 '0'이라는 글씨는 "회고록이 한 푼의 가치도 없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모두 그 감정가를 보고 당황했습니다. 그때 김영복 서예∙고서 감정위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기록이 한 사람의 개인적인 기록이지만 나라를 잃은 많은 애국자가 자신의 목숨을 바쳐 독립운동을 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분들의 행적을 감히 돈으로 평가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전문가들은 감정가를 추산할 수 없었습니다. 이 기록물을 통해 불꽃처럼 살아갔던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알려주는 역할을 우리가 해야 하기에 0원으로 책정했습니다.”


이 회고록은 일제 시대 만주 지역 항일 무장투쟁의 핵심 인물로 꼽히는 이규채 선생님이 자필로 적은 일명 「이규채 연보」였습니다.


이규채 선생님의 증손자인 출품자 이상옥 씨가 회고록의 감정가를 100, 815원을 적어낸 이유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100과 광복절을 의미하는 8.15를 뜻하는 숫자로 조합한 것입니다.


이 회고록은 독립운동가들의 생애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동안 공개됐던 내용 중 가장 정확하다”는 평가할 정도로 높은 가치가 있어 보이며,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보다 독립운동에 대해 더 상세하게 적혀 있다고 했습니다.


1932년 9월 만주에서 활약하던 한국 독립군과 중국군의 합동 작전으로 항일의용군의 '쌍성보 전투'를 회고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만주를 침략한 일제에 양국이 공동으로 맞서 승리한 전투로 유명합니다.


“임신년 1932년 하오에 드디어 쌍성의 성 아래에 도달하였는데 날이 이미 완전히 어두웠으며 달빛이 은은하게 비쳤다. 독립군들은 서쪽 문으로부터 돌격해 들어가 성을 격파하였다.” 하오. 12시부터 24시

“새벽녘이 되어서야 왼쪽 손에 총을 맞아 부상을 당하였다는 것을 알았다. 곁에 있던 사람이 먼저 보고서는 깜짝 놀랐다”


1932년 9월 만주에서 일본군 만주군과 맞서 싸운 ‘쌍성보 전투’를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그의 재판기록도 기술되어 있습니다. 

“을해년 1935년 재판 중 또 묻기를 ‘자녀가 셋이나 있는데 그들 역시 생각하지 않는가?’라고 하기에 내가 답하기를 나에게 노모가 계시는데도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런데 어찌 자녀를 염두에 두겠는가? 많은 말을 필요 없이 단지 우리 강산만 돌려 주면 그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계유년 1933년 중국에 도착해 남루한 옷을 걸치고 한 발을 끌며 반벙어리 행세를 했다. 돈을 구걸하며 신분을 숨겼다. 등 독립운동을 하면서 겪었던 위기 상황들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또한 독립운동가의 재판기록도 작성된 이 회고록에 그 어떤 전문가라도 가격을 매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특히 이 연보의 마지막에는 독립운동과 투옥으로 헤어져 살아야 했던 가족들에 대한 미안하고 안타까운 심경을 표현한 구절이 있습니다.


“아내가 우리 집안으로 시집온 지는 26년이 되었다. 나와 멀리 헤어져서 두 아들과 한 딸을 거느리고 살았다. 그런데 아내는 몸을 의탁할 친척이 없었고, 밖으로는 생활을 도와줄 만한 친구도 없었다. 초근목피로 굶주림을 면할 수 있는 것은 하루 이틀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런즉 다섯 살 난 아이가 수시로 밥을 달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빈 젖을 물려서 달랠 수 있었지만, 조금은 지각이 있는 여덟 살 난 아이가 배고프다고 울어대는 것은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이 날 의뢰품을 들고 나온 이상옥 씨는 증조 할아버지와 독립운동가의 정신을 되새길 수 있도록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 박물관에 기증할 계획이라고 했습니다.


이 연보는 모두 54쪽으로 가석방된 후 포천의 동네 가게 ‘김수명 상점’에서 갱지와 습자지로 된 계산서를 빌려 적었습니다. ‘1890년 6월 7일 자시에 태어나다’로 시작하며, 가족들이 극심한 생활고에 대한 미안함과 안타까움의 표현으로 끝납니다. 


이규채 선생은 어떤 분이셨을까요? 3∙1운동 당시 창신서화연구회를 창설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한 후 상하이로 망명하였고, 1924년 임시정부 의정원이 되었습니다.


1930년에는 한국독립당 창설에 참여를 하여 참도장으로 활동을 하였으며, 당시 민족주의자였던 이규채 선생은 공산주의자와의 갈등으로 하얼빈 인근 영통산에 생매장을 당했다가 구사일생으로 구출되기도 했습니다.


1932년 만주 쌍성보 전투에 참전했으며, 한국독립당 총무위원장이며, 한국독립군 참모장으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1933년 베이징 한국독립당 회의에서 일제의 회유에 넘어갔다는 의심을 받고 사형 위기에 놓였으나 동료들의 변론으로 사형을 면했으며, 무기한 당권을 정지 당했습니다.


체포된 이후에는 일본 총영사에게 “2천만 민중의 마음을 귀순시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며, 2천만 민중이 한 사람도 남지 않고 죽임을 당하기 전까지는 독립운동은 종식되지 않을 것”이라고 당당히 말하였습니다.


1935년 9월 25일 중국 상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가 되어 징역 10년형을 받고 경성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1940년 가출옥으로 석방이 된 뒤 고향인 경기도 포천에 은거했습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도 반탁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를 하였으며, 1947년 3∙1운동 기념식에 참석한 다음 날 급환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가 되었으며, 경기도 포천시 가삼면 방축리에 행적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독립된 주권을 가진 대한민국에서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것은 그 분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피와 눈물로 싸우다 산화하신 그 분들의 노고를 재평가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0원짜리 보물을 남겨 주신 

모든 독 립투사들에게 경의와 존경과 감사를 바칩니다.


지난 5년간 말도 안되는 종북 주사파 정권의 억지와 참담함 속에서 

애국 운동에 참여했던 분들은 뼈저리게 체험하였습니다. 

투쟁하는 과정에서 받았던 모멸감과 조리돌림을 생각하면 그때 그분들의 희생과 헌신에 우리가 얼마나 감사해야 하는지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집권당의 혼란과 방황을 보면서 윤석열 대통령을 도와 결단코 "자유 대한민국의 가치"를 지켜내야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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