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9(목)
 

이것이 제주 4∙3사태의 진실이다


조선이 대원군 집정 이후 쇄국정책을 고수했습니다. 1876년(고종 3) 일본의 강압적인 외교에 눌러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어 개항을 하게 되었으며, 제국주의 열강에 의한 군사∙경제∙정치적 압력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1894년 청일 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로 대한제국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 당하고, 5년 후에 결국 멸망하여 일본의 통치를 받게 되었습니다.


1910년 조선의 3대 통감으로 온 데라우치 육군 대신은 종래에 지니고 있던 사법∙경찰권 외에 일반경찰권까지 완전 장악하였습니다.  


통감은 8월 16일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합병조약안을 제시하고, 수락할 것을 독촉했으며, 22일 조약이 조인되면서 이 땅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한일합병조약 제1조는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넘겨 준다’ 였습니다. 이때부터 일제는 통감부를 폐지하고 총독부를 세워 식민지 통치를 시작했습니다.


한일합병은 일제의 침략으로 한일합병 조약에 따라 국권을 상실했으며, ‘경술국치’라고도 합니다. 


일제의 침략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민족적 저항은 의병 전쟁이었으며,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항일 무장독립투쟁의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잃어버린 나라의 국권을 되찾기 위해 항일운동의 독립군들이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이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으며, 1946년 8월 6일 미국은 사상 최초로 원자폭탄을 일본의 히로시마와 두 번째 원폭을 3일 후에 나가사키에 투하하자 8월 10일 일본 천황은 연합군 측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여 이 땅은 일본의 식민 통치에서 해방되었습니다.


1945년 해방 당시 한반도는 북쪽엔 조선공산당 조직이 활동하고 있었으며, 남쪽에는 인민공화국 조직이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이미 공산주의에 의해서 거의 장악된 상태였습니다.


1945년 11월 미군정이 시작되었으나 소련의 공작과 북쪽 김일성의 지령과 남쪽의 남로당 조직의 적화 공작으로 미국은 제대로 남쪽을 통치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유민주주의자이고 철저한 반공주의자인 이승만은 전국 방방곡곡을 순회하며 자유민주주의로 건국을 해야 하고, 공산주의는 결국 백성이 굶어 죽는 체제임을 역설하는 국민계몽을 해나갔습니다.


1946년 2월에 이미 북쪽에는 사실상의 정부인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들어 섰습니다. 그리고 공산주의 혁명의 일환으로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유산계급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실시했습니다. 그와같은 혁명적인 변혁은 정부 아니면 추진할 수 없는 사업이었습니다. 


그처럼 북쪽에 사실상의 정부를 세우고도 소련군은 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한다고 미∙소 공동위원회에 참가하는 이중성을 보였던 것입니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의 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하기로 하였으나, 이미 북쪽만의 괴뢰정부를 만든 김일성은 반대했습니다.


1948년 5∙10일 남한만이라도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건국을 위하여 총선거를 실시하였습니다.


결국 북쪽에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정권이 만들어졌고, 남쪽에는 이승만 대통령에 의하여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 건국되었습니다. 유엔은 대한민국을 유일한 합법적이고 공식적인 국가로 인정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공산당들은 남쪽의 대한민국 건국을 막으려고 9월 총파업, 대구 폭동, 제주 4∙3 폭동, 여순 반란 등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파업과 폭동과 테러를 일으켰습니다.


1921년 제주 일본 공산당에서 활동하던 김영식이 제주도 공산당을 만들었습니다. 제주도는 지역의 고립된 특성으로 80% 이상이 공산주의에 현혹되었으며, 남로당 조직이 광범위하게 완성되어 공산주의 활동을 했습니다.


1947년 3∙1 제주도, 경찰기마대의 말의 눈을 누군가 건드리고 말이 근처에 있던 어린아이에게 부상을 입혔다고 했습니다. 경찰의 사과 후에도 일련의 군중들이 의도적으로 경찰서로 몰려가고 경찰의 발포로 6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제주도 남로당은 5∙10 선거 반대, 대한민국 건국 반대, 스탈린∙김일성∙박헌영 만세를 주장하며 파업과 시위와 테러를 했습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4시 사이에 제주 남로당 무장유격대가 경찰서 12곳을 습격하여 경찰과 경찰 가족, 선거관계자 및 인근 주민 27명을 무참히 살해했습니다. 또 많은 경찰 가족을 산으로 납치했습니다.


결국 남로당의 공격과 방해로 5∙10 선거에서 제주도 3개 투표소 중 2개가 무효투표가 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5∙10 총선거 이후 1948년 5월 31일 첫 제헌국회가 열려 의장에 이승만, 부의장에 신익희와 김동원이 선출되었습니다. 7월 17일에는 제헌 헌법이 제정∙공포되었으며, 7월 20일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취임했습니다. 드디어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되었으나 전국적인 공산주의 세력의 파업과 시위와 테러는 계속되었습니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이 3가지 중 1가지를 선택하라고 선언했습니다.


첫째, 자유대한으로 전향하라둘째, 아니면 재산을 정리해서 북한으로 가라셋째, 그렇치 않으면 소탕하겠다


이때 9만명이 재산을 정리해서 북으로 갔으며, 서울대 교수 50%가 역시 북으로 갔습니다. 전향하지 않은 이들은 지리산∙태백산∙소백산∙월악산 등으로 숨어 들어가서 빨치산이 되었습니다.


제주도에는 1948년 11월 21일 계엄이 선포되어, 남로당 무장유격대 소탕 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제주 남로당 유격대는 산 위에 있고, 산 중간에는 민간인이 거주했습니다. 남로당이 산 중간에서 보급을 받고 활동함으로 소탕에 어려움이 있었으며, 남로당이 산 중간에서 민간인으로 숨어서 위장 활동했습니다.


이후 산 중간의 민간인 분산 작전이 실시되어 해안가 5km 이내로 이주하도록 조치하고 남아있는 민간인은 남로당 폭도로 간주하여 소탕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 희생이 발생했으며, 당시 제주도 내 인구의 80% 정도가 남로당의 영향을 받고 있던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제주도를 그냥 두었으면 공산주의 남로당이 장악한 섬이 되었을 것이며, 대한민국의 제주도가 아니라 북한 김일성 집단의 제주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되었다면 6∙25 한국전쟁 때 제주도에는 더 큰 비극이 발생했을 것입니다.


1949년 6월 제주 남로당 총사령관 이덕구가 잡혔으며, 체포된 남로당 폭도들의 증언에 의하면 몇 개월 내에 인민공화국을 건설한다고 들었다고 했습니다.


1949년 10월 미군이 철수하자, 1950년 6.25에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1948년 남쪽에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건국된 것은 한마디로 기적이었습니다.


만약 그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 의한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국이 실패했다면, 현재 우리는 조선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이 되어서 자유와 인권과 희망을 빼앗기고, 아마도 거대한 정신병원같은 체제에서 거짓 역사를 외우고 믿으며 살고 있을 것입니다. 김일성 수령을 아바이로 섬기며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때문에 이승만∙박정희 대통령 건국 공로를 폄훼하고 매도하는 역사공작이 끊임없이 진행 중에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북한과 달리 피해자에 대해 이유 불문 민주화 유공자로 보상하고 국가적으로 예우하였으나.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남로당의 부활적 영구 집권과 공산적화의 수단으로 삼고 있습니다.


1948년 4월 3일 자정을 기해 한라산 중턱의 수산봉∙고내봉∙파군봉 등 오름에서 봉화가 올랐습니다. 제주 4∙3사건 피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사령관에는 김달삼이었습니다.


이들은 인민유격대를 조직하여 제주 24개 지서 중 12개 지서를 골라 320명을 배치하였습니다. 또한 제주 시내 우익단체 대표들을 공격하기 위해 죽창부대 200여명을 조직하였습니다.


새벽 2시 이들은 일제히 행동개시에 들어 갔습니다. 신엄 지서 송원화 순경이 칼과 죽창으로 8군데나 찔렸으나 구사일생으로 구출 되었고, 그 부친은 폭도들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남원지서에서 경찰을 돕던 방성화는 현장에서 즉사하였고, 김덕훈은 도끼에 팔이 잘리고, 고일수 순경은 칼에 목이 잘렸으며, 폭도들은 무기고에서 총과 실탄을 탈취하였습니다.


화북지서를 불 태웠는데, 이때 협조원 이시성이 불에 타 죽었으며, 김장하 경찰 부부는 폭도들에게 대창에 찔려 죽었습니다. 외도 지서에서는 선우중태 순경이 폭도들의 총에 맞아 즉사했습니다.


1948년 4월 3일 자정 애월면 구엄마을 우익인사 문영백의 집에 폭도 100여명이 들이 닥쳤습니다. 


문영백은 피신을 했으나 큰딸 숙자(14세), 둘째 딸(12세)은 잠옷 상태에서 죽창에 찔려 죽었습니다. 애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 어린 애들이 살려 달라고 애원을 하는데도 잔인하게 현장에서 살해한 것입니다.

새벽 2시 한림면 한림리 한림여관에서 묵고 있던 경찰을 폭도 40여명이 기습하여 김록만 순경이 죽었고, 경찰 2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제주 감찰위원장 현주선(46세)은 폭도들의 칼에 세 군데 찔렸으나 기적적으로 살았고, 그 외 간부들도 공격을 받아 부상을 당했습니다.


그 다음 날 연평리에서는 대한청년단원(이후 대청) 오승조(36세)를 대창으로 찔러 죽였고, 4월 6일 대청 총무 이도연(37), 단원 양남호(32)를 “5.10 선거에서 손을 떼라”며 살해했습니다.


4월 7일 김구원 외 2명이 살해 당했고, 4월 13일부터 18일까지 화북에서 임선길 순경, 선흘리 대청 단원 부동선∙부용하∙고평지, 신촌에서 경찰관 김성호와 그 부친이 칼로 무자비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폭도들은 밤마다 적기가를 부르며 5∙10 선거 반대를 외치며 선거관리위원과 우익인사를 골라 죽였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지난 좌파 정부에서는 민주화 운동한 애국자라고 칭송을 하며, 제주도에 평화공원을 만들어서 중고등학생들은 물론 국민들에게 세뇌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김대중 국민의 정부, 노무현 참여정부, 그리고 문재인 정권에 이르도록 민주화의 가면을 쓰고 세습 독재에 머리 조아리면서도 신성불가침 민주주의로 포장하여 세뇌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헌법개정을 통해 대한민국 정체성을 뿌리채 적화하려고 합니다. 넋 놓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안일함으로 진리를 상실한 북조선 같은 그릇된 인식의 감옥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멈춰야 합니다. 이제 더 이상 한민족 공멸의 오류를 되풀이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제주 4∙3사태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대한민국이 건국되기 직전 건국을 방해한 공산주의자들이 벌인 대학살 사건이였습니다.

대한민국 건국 직전, 좌익 공산주의자들은 1948년 5월 10일 제헌의원을 뽑는 선거를 막기 위해 제주도에서 ‘4∙3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공산 통일이었으며, 남로당은 경찰, 우익인사, 선거위원, 기독교인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을 학살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의 관심 속에서 멀어지고, 시간이 지나면서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은 정당화 되거나 미화되고 있습니다. 


요즘은 사건을 일으킨 남로당의 잘못은 덮어 두려 하고, 사건을 진압한 경찰과 군인이 마치 주범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4∙3은 군인과 경찰에 의한 잘못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사건의 발단이라고 주장하는 1947년 제주도 3∙1 기념 가두 시위는 정말 평화시위였을까요?


우리가 모르는 사이 역사는 왜곡되어 졌고, 남로당에게 희생당한 이들의 유족들은 제 목소리를 못 내고, 마치 죄인처럼 지내는 이상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제주 4∙3 사건을 올바로 알아야 후세를 제대로 교육할 수 있고, 올바른 국가 정체성을 가지고,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습니다.


이제 4∙3희생자들과 함께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 한 가운데로 들어 가서 억울한 희생자들의 목소리를 들어 보고, 공산주의자들이 우리의 부모∙형제∙이웃들에게 어떠한 만행을 저질렀는지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런 사실을 기억하지 않으면, 이런 끔찍한 일이 또다시 반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제주 4∙3사태의 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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