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9(목)
 

오늘은 6∙25전쟁에 유엔군이 참전한 날이며, 정전협정 체결일로부터 70년 되는 특별한 기념일입니다. 이를 기리기 위한 기념식이 오후 7시 40분 부산 영화의 전당에서 개최했습니다. 


부산영화의 전당 자리는 과거 유엔군으로 참전했던 미 스미스 대대가 최초로 도착했던 곳이며, 이전에 수영비행장입니다. 1953년 정전협정 체결일로부터 70년이 되는 올해 22개 참전국 대표들이 함께 참여해 그 의미를 더했습니다.


행사에는 뉴질랜드 총독 데임 신디 키로 등 25개국 170여명의 참전대표단과 유엔 참전용사 및 후손, 6.25 참전유공자, 정부 및 군 관계자 등 4,000여명이 참석했습니다. 


기념식은 참전 국기 입장, 유엔 참전용사 입장, 여는 공연, 국민의례, 주제 영상, 참전국 대표 인사말, 정부포상, 기념사, 감사 영상, 기념공연, 엔딩 퍼포먼스 순으로 60분간 진행되었습니다.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이번 정부 기념식을 통해 참전용사분들이 자부심과 명예를 느낄 수 있도록 최고로 예우하고 정부 차원의 감사를 표명하겠다”며 “참전국과 참전용사의 헌신으로 이룬 대한민국 70년간의 번영과 자유의 가치가 동맹과 공유돼 더욱 확고한 연대로 미래 70년을 함께 만들어 나가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박선영 교수의 2년 전에 작성했던 「7월 27일. 이 날이 무슨 날인지 기억들 하시는가?」라는 글을 소개합니다.


“7월 27일은 정전 협정일이기도 하지만 UN 창설 이후 처음, UN의 이름으로 자유수호를 위해 UN군을 파병한 날이기도 하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날 포고문을 내고 ‘한미 양국의 우정이 자랑스럽다’고 발표했다.

정으니는 이 날 새벽 0시 6·25 전사자 묘지인 조국해방전쟁참전열사묘를 찾았다.

남쪽 나라 최고 통치자는 침묵했고, 남조선의 모든 언론도 입을 닫았다. 

우리는 오늘을 잊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모른다.

오늘이 정전협정기념일이자, UN군이 대한민국에 첫 발을 디딘 UN군 참전기념일이라고 말하면 ‘당신은 극우!’라고 몰아 버리지만 역사는 바로 알고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Never again, 비극이 반복되지 않는다.

73년 전 6월 27일, UN안전보장이사회는 만장일치로 ‘북괴군의 침략은 평화파괴행위’라며, UN 결의 제83호 결의를 했다. 동시에 UN군을 결성해 코리아에 신속히 파병하기로 했다.

그 후 7월 7일 통과된 제84호 UN 결의는 보다 구체적인 UN군의 통합사령부 구성과 임무, UN기 사용승인 등을 결정했고, 7월 27일 UN군이 이 땅에 들어 왔다.

지금 봐도 초스피드로 결정된 UN군 참전과 사령부 구성이다. 이 신속한 모든 과정은 외교감각이 뛰어났던 이승만 대통령의 역할이 주효했다.

좌파들이 이승만 대통령과 미국을 철천지 원수 보듯 하는 까닭이다. 조국 해방 전쟁을 훼방한 용서할 수 없는 존재들이니까

그때부터 지금까지 UN이 UN군을 파견할 때는 한국전, 6·25때 거쳤던 의사과정과 똑같은 절차를 거쳐 결정한다. 선례구속의 원칙(stare decisis)이다.

그때 세계는 대한민국 KOREA가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 어떤 나라인지도 몰랐다. 

다만 공산당이 자유민주국가를 침범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평화를 지켜 주기 위해 참전했고, 이 땅에 첫 발을 내디딘 날이 바로 1950년 7월 27일이다. 우리 물망초가 6·25 전쟁을 ‘자유수호전쟁’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그리고 그 16개국 UN군 가운데 15만명 이상이 죽거나 다쳤고, 실종되거나 포로가 되었다.

혈맹인 미군은 UN군보다 한 달 먼저인 6월 27일에 부산 땅을 밟아 희생이 더 컸다.

일본에 주둔 중이던 24사단 소속 Smith 중령이 책임자가 되어 도착하자마자 그날부터 싸웠고, 첫날부터 피를 흘리며 죽어 갔다.

앞으로 대한민국이 공격을 받으면 이 16개 나라는 자동적으로 즉각 우리를 도우러 달려 오겠다는 자동참전의 협정도 맺고 있다.

따라서 오늘은 73년 전의 UN군 참전기념일이자 70년 전의 정전협정일만이 아니라 미래에의 우리를 지켜 나가기 위한 기념비적인 날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7월 27일이 무슨 날인지,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모든 언론도 올림픽 기사뿐이다. 신문에 기사 한 줄, 사설 하나 없다.

기억하지 않는 민족에게 내일은, 미래는 없는 법. Remember 7·27이라는 구호가 민망하고, 미안하고, 부끄럽다!”


북조선이 한국을 침공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미국은 곧장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를 소집하여 북조선에게 당장 적대적인 행위를 중단할 것을 요구하지만 북한은 이를 무시하였고, 이에 유엔은 결국 한국을 지원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에 미국 극동군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을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고 또한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맥아더에게 이양하였습니다.


한편 유엔군이 한반도에 도착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기에 먼저 주일미군이 한반도에 투입되었으며 국군은 미군에 합류하여 유엔군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하여 순차적으로 땅을 내주며 치열한 지연전을 펼쳤다고 합니다. 


이후 한미 연합군은 1950년 8월부터 9월까지 낙동강 방어선을 두고 북한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펼치며 이 과정에서 백선엽 장군이 이끄는 국군 제1사단이 제공권을 장악한 미 공군의 지원을 받으며 다부동에서 북한군을 크게 격파하는 전공을 세우기도 합니다.

 

이처럼 한미연합군은 북한군의 총공세를 필사적으로 막아내며 그 결과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실패한 북괴군은 결국 공세 종말점에 도달하게 됩니다.

 

반면 한미연합군은 유엔군 증원부대가 속속 도착하면서 드디어 반격에 나설 준비를 하게 되었고,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261척의 연합함대와 7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북한군의 허를 찌르는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시켰고 곧이어 9월 28일에는 서울을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仁川상륙작전 당시 군번도 계급도 없는 KLO, 8240한국유격군 KLO부대가 팔미도 등대를 탈환하여 수동으로 등대를 작동하여 맥아더 장군이 쌍안경으로 확인 후 261척의 연합함대와 7만명의 병력 총진군명령 하달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하였습니다.

 

또한 낙동강 방어선의 국군과 유엔군도 반격을 시작하며 9월 말까지 북한군을 38선 북쪽으로 몰아내고 전황을 전쟁 이전의 상태로 회복시켰습니다. 하지만 10월 초 유엔군의 38선 돌파를 앞두고 갑자기 중국 측에서 유엔군이 북진하면 전쟁에 개입하겠다는 통첩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유엔은 10월 7일 한반도의 통일과 부흥에 관한 결의안을 통과시켜 유엔군의 북진을 승인하였고, 이에 따라 10월 1일 먼전 38선에 돌파한 국군에 이어 유엔군도 마침내 북진을 개시했습니다.

이후 유엔군은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하였고, 10월 26일에는 압록강 부근에 이르렀으며 11월 말에는 함경북도 청진까지 진격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중공의 한국전쟁에 등장하며 상황은 다시 급변하게 되고 맙니다. 10월 19일 펑더화라는 장군의 지휘 아래 약 30만의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 북한 지역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이들은 10월 25부터 한국군과 유엔 군을 향해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습니다.

 

중공군이 개입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던 국군과 유엔군은 크게 당황하며 엄청난 피해를 입고 결국 후퇴할 수밖에 없었는데, 장진호 전투와 흥남 철수도 바로 이 시기에 일어난 사건들이기도 합니다.

이후로도 국군관 유엔군은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1951년 1월 4일에는 서울까지 포기하며 후퇴하기를 거듭하였고 다시 국군과 전열을 가다듬은 유엔군은 반격에 나서 그해 3월 결국 서울을 재탈환하였습니다. 


또한 국군과 유엔군은 계속 북진하여 전선을 다시 38선 부근으로 올렸으며 이에 질세라 중공군은1951년 4월 22일 수십만의 대군을 투입하여 또다시 대공세에 나섰는데, 하지만 얼마 안 가 유엔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큰 피해를 입으면서 결국 38선 북쪽으로 후퇴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유엔군은 다시 38선을 넘어 북진할 여지가 생겼지만 결국 유엔군은 북진하지 않으며 휴전협정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후 7월 10일 개성에서 양측 대표가 모여 휴전협정을 진행하기 위해 모였지만 포로 송환 문제 등을 두고 난항을 거듭하였고 이와 동시에 양측 군대는 휴전 협상이 끝나기 전까지 조금이라도 더많은 땅을 확보하기 위해 38선 부근에서 치열한 고지전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난항을 거듭하던 휴전 협상은 1953년 소련의 스탈린 사망과 함께 급속도로 진전하기 시작하였고 이 과정에서 그동안 휴전을 격렬히 반대하던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측에 휴전 협정 조인 전에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면 휴전을 지지하겠다고 제안하였지만 미군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이에 이승만은 1953년 6월 18일 미국과 별다른 상의없이 2만 6천 명에 달하는 반공포로를 석방시켜 미국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그 결과 미국으로부터 결국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과 군사 및 경제 원조 등의 약속을 받아내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이후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유엔군과 중공군 그리고 북한군 대표가 휴전 조인문에 서명하면서 회담 개시 2년 만에 드디어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으며 이로써 약 3년간 수많은 인명피해와 이산가족이 발생시키고 온 국토를 폐허로 만들어버린 동족상잔의 비극이자 명백한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벌어진 6.25 한국전쟁은 종전이 아닌 일시적 휴전이 되었고, 이러한 상태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200만명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는 것입니다. 이 나라에 정전협정으로 전쟁의 포성이 멈추었지만 안보 정세는 여전히 불안하고 위태롭습니다. 북조선은 협정을 수십번 위반했습니다. 두 차례의 연평해전과 천안함 폭침은 종전이 아닌 정전의 의미를 일깨워 주었습니다.


최근 북조선은 탄도미사일 도발을 일삼고, 7차 핵실험도 언제든 감행할 태세입니다. 이 와중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이룬 한강의 기적은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오늘 전범인 북조선은 자신들이 이긴 날이라고 대대적인 전승절 기념식을 합니다. 우리는 유엔 참전국들과 참전 노병들의 헌신에 감사하고 있는데, 종북 주사파의 추종자들인 반국가세력들은 마치 북조선의 지령을 받은 거짓 평화선동과 함께 미군 철수를 주장하며 평택 미군기지를 인간 띠 잇기로 포위하겠다고 미군과 미국을 향하여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이에 대항하여 애국 시민단체들도 맞불 집회를 하기로 했습니다.


종북 주사파 세력들, 곧 반대한민국 세력들이 100년간 이 나라를 통치할 것이라고 장담했으나 ‘0.73의 기적’이 우리를 살렸습니다. 멸망의 길이 확실하던 대한민국이 ‘0.73’(윤석열 당선인과 이재명 후보의 득표 차)이라는 기적의 숫자로 인해 그 운명이 180도 전환되는 계기를 맞이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간섭으로 말미암아 0.73%로 윤석열 대통령을 당선시킴으로서 이런 기념일을 개최하게 되었으며, 직접 참석하여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어서 감사할 뿐입니다.



강석종 뉴스워크 칼럼니스트 기자 newswalk@naver.com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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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워크]7월27일(목)“리멤버 7.27! 7월 27일이 무슨 날인지 알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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