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3(금)
 

문재앙은 2017년 12월 방중 당시 베이징대 강연에서 “한국에는 중국의 영웅을 기리는 기념비와 사당들이 있다”며 정율성을 언급했습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앞서 2014년 7월 방한 기간 중 서울대 강연에서 정율성을 ‘한중 우호의 상징’이라고 언급했습니다. 지난 광복절 직전 “정율성 역사공원이 연말 완공된다”는 KBS 보도가 나왔습니다.정율성은 어떤 사람일까요? 


정율성(郑律成)은 일제 시대 조선에서 출생한 후 삼일 운동 이후 항일독립운동에 참가했으나, 중국 공산당과 북조선 노동당에 입당하고, 해방 후에는 북한,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을 취득해 활동한 공산주의 음악인, 작곡가입니다. 본명은 정부은(鄭富恩)입니다. 


1914년 7월 7일에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현 양림동 79번지)에서 한학자 정해업(鄭海業)과 지방 명문가의 딸인 최영온(崔英溫) 사이의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정율성의 호적 이름은 ‘부은’이었으나 ‘구모(龜模)’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부친 정해업은 한학을 배운 지식인으로 전라도 관찰부 공방 서기직, 대한협회 광주지회 회원, 광주 지역 신간회 간사, 광주 수피아여고 교직에 있었던 기록이 있으며, 모든 자녀를 항일 투쟁을 위해 중국으로 보낼만큼 민족정신이 투철했습니다. 


정율성은 큰 외삼촌인 최흥종 목사의 집에서 축음기를 통해 음악을 듣고 피아노를 치며 놀았고, 그가 활동하던 광주YMCA, 양림 교회, 양림동 선교사촌을 통해 서양음악을 접할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정율성의 작은 외삼촌은 최영욱박사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과 캐나다에서 수학한 후 광주 제중원 원장을 지냈으며, 미군정 하에서 초대 전라남도 지사를 지냈습니다. 최영욱 박사의 아내이자 한국 YWCA 설립자 중 한 명인 김필례(金弼禮)는 수피아 여학교 교사로 일하며 교회를 빌려 때때로 음악회를 여는 등 정율성은 외가의 영향으로 음악에 친숙한 환경 속에서 자랐습니다.


정율성은 1917년 화순군 능주로 이주하여 1922년에 능주 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이듬해 광주로 다시 이주하였다. 그는 1928년 광주 숭일 소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1929년 3월신흥학교에 입학하였고, 합창단에 들어가 ‘내 고향’, ‘쪼각달’, ‘고기잡이’, ‘까투리 타령’ 등의 노래를 지도하였습니다.


1933년에 정율성의 셋째 형 정의은이 중국 난징에 있는 조선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에서 2기 학생을 모집하기 위해 광주에 방문하자, 그는 전주 신흥학교를 중퇴하고 누나 정봉은과 함께 목포에서 평안환(平安丸)을 타고 부산과 일본 나가사키를 경유하여 5월 13일 상하이 푸동 항에 도착하였습니다. 정율성은 조선혁명 간부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중 의열단에 가입했습니다.


그는 의열단이 부여한 비밀 업무로 난징(南京)의 고루(鼓樓) 전화국에서 일본군의 정보를 수집하는 활동을 했으며, 신분 은폐를 겸하여 상하이를 오가며 소련 레닌그라드 음악원 출신 여교수 크리노와(Krenowa)에게 성악, 작곡, 피아노, 바이올린 등을 배웠습니다. 정율성이 정식으로 음악을 배운 시기는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며, 이 시기에 어릴 적 이름인 ‘부은(富恩)’ 대신에 ‘선율(旋律)로써 성공(成功)하겠다’는 의미에서 ‘율성(律成)’으로 개명했습니다.


1936년 5월에 중국의 좌파 청년들이 참여하던 ‘오월문예사(五月文藝社)’ 창립 대회에서 정율성은 추취도(鄒趣濤)의 시를 바탕으로 작곡한 그의 처녀작 《오월의 노래》(五月之歌)를 만돌린을 연주하며 직접 발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뒤로는 1937년 10월 옌안(延安)으로 이주하여 중국 공산당의 루쉰  예술학원(魯迅藝術學院), 중국인민 항일 군사 정치대학(中国人民抗日军事政治大学) 등에서 학습을 나갔습니다. 


정율성은 1939년 1월에 중국 공산당의 당원이 되어 공산주의 혁명 문예 공작에 참여하였으며, 《팔로군행진곡》을 포함하여 8곡으로 구성된 ‘팔로군 대합창(八路軍大合唱)’을 작곡하였습니다. ‘팔로군행진곡’은 당시 팔로군에서 널리 애창되었으며, 훗날 ‘중국인민해방군 군가’가 되었습니다. 


정율성은 옌안에서 중국 공산당에 소속되어 활동하며, 앞서 1937년에 중국 공산당에 가입한 정설송(丁雪松)을 만나 1941년 팔로군이 주둔하던 동굴에서 결혼하였습니다. 정설송은 중국 공산당당원으로 중공 외사판공실 비서장 등을 거쳐 덩샤오핑 정권에서는 1979년과 1982년 네덜란드와 덴마크 주재 대사를 맡기도 했습니다. 


정율성은 1942년에는 옌안을 떠나 조선 혁명군정학교에서 음악장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그는 ‘유격전가’, ‘처녀 두었녀성’, ‘조선 의용군 행진곡’, ‘연안송’ 등 공산주의 혁명 색깔이 짙은 노래를 작곡하였습니다.


정율성은 194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팔일오 광복으로 해방을 이룩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쪽으로 귀국해 조선인민군 구락부 부장, 조선인민군 협주단 단장, 조선음악대학 작곡부 부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북조선 노동당  당원으로 입당하였으며, 《조선인민군 행진곡》, 《조선해방 행진곡》, 《두만강》, 《동해 어부》등을 작곡하였습니다.


1950년에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을 취득한 정율성은 한국 전쟁이 벌어진 뒤에는 침략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의 부탁으로 중국 공산당의 마오쩌둥, 저우언라이가 중공의 중국 인민지원군 일원으로 그를 그해 12월 한국 전쟁의 전장으로 직접 파견해서 혁명 활동을 하게 하였습니다. 


한국 전쟁에서 대한민국 국군이 북녘의 국토를 끝내 수복하지 못한 뒤로 정율성은 중화인민공화국에 남아서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정권의 공산주의 혁명 음악 분야에서 계속 활동하였습니다. 


1976년 12월 7일에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에서 고혈압 등으로 사망하였으며, 중국 공산당이 안배한 바바오산의 혁명 투사 공동묘지에 시신이 묻혀 있습니다.

이런 그를 기리기 위해 광주시의 역사공원 조성 계획이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상황이다.


지난 14일 광주시의 발표에 따르면, 동구 불로동 일대의 878㎡에 48억원을 투입하여 ‘정율성 역사공원’을 연말까지 조성할 예정입니다. 이 공원은 정율성의 삶과 음악 세계를 기리는 광장, 정자, 교양 및 관리 시설 등으로 구성됩니다.

시는 이미 2020년 3월에 공원 지정을 시작한 뒤, 동년 5월에 공원 조성계획을 마무리하였으며, 소유권 이전과 같은 토지 보상 문제도 해결했습니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 온라인에서는 격한 비판 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누리꾼들은 “6·25전쟁 때 중공군에 참전한 인물을 왜 기리는 건가?”, “이 결정이 정당한 것인지 의문스럽다”, “광주시의 결정은 어디까지 타당한가?”, “과거 친일파의 행동은 왜 묵인되는가?” 등의 의견을 제시하며 논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6∙25때 중공군으로 참전한 역적을 기념하는 공원 조성이 말이 됩니까? 전남 광주시는 역적 도시입니까? 이러니 수많은 국민들이 전라도를 손가락질 하며, 욕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라도여! 전라도여! 그러니 ‘전라인민공화국’이라고 하죠! 대한민국을 건국한 전라도여!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자유대한민국이 정상화되려면 전라도와 더불당 및 반국가세력이 참회해야 합니다. 종북을 민주화로 위장하고, 반국가를 ‘우리민족끼리’라는 민족으로 포장하며, 가짜 위장 평화로 선동하는 집단을 척결해야만 자유와 정의와 지성과 국가경쟁력 회복이 가능합니다.


김대중의 노벨평화상과 20개의 기념관이 바로 나라를 망치는 괴물입니다.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을 학습하고 토론하고 존경해야만 도덕성도 미래도 존재합니다.

강석종 뉴스워크 칼럼니스트 기자 newswalk@naver.com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전체댓글 0

  • 05099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6.25남침때,‘中·北 군가 작곡자 정율성’역사공원 광주에 들어선다!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