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2(월)
 

홍준표 대구시장이 육군사관학교의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추진에 대해 “항일 독립전쟁 영웅까지 공산주의 망령을 뒤집어씌워 퇴출시키려는 것은 오버해도 너무 오버”라고 비판을 했습니다.


홍준표 시장은 지난 27일 페이스북에서 “굴곡진 역사의 희생양이셨던 독립투사 분이었고 박정희 대통령 이래 김영삼 대통령까지 보수 정권 내내 훈장도 추사하고 수십년간 노력으로 유헤를 봉환해 대전 현충원에 안장까지 한 봉오동 전투의 영웅을 당시로서는 불가피했던 소련 공산당 경력을 구실삼아 그분의 흉상을 육사에서 철거한다고 연일 시끄럽다”며 이같이 밝혔습니다.


그는 “6∙25전쟁을 일으켰던 북한군 출신도 아니고 그 전쟁에 가담했던 중공군 출신도 아닌데 왜 그런 문제가 이제 와서 논란이 되나?”라며 “참 할 일도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역사논쟁, 이념 논쟁을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그건 반역사”라며 “그렇게 하면 매카시즘으로 오해를 받는다. 그만들 하라. 그건 아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매카시즘이란 반공주의 성향이 강한 집단에서 정치적 반대자나 집단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려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도 지난 25일 페이스북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홍 장군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했다는 점을 거론하며 “국가가 수여한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운동가를 누가 어떤 잣대로 평가해서 개별적인 망신을 줄 수 있다는 말이냐?”라고 비판했는데, 두 사람은 역사의 팩트를 모르고 한 말들입니다.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인 이종찬 광복회장은 27일 육군사관학교 내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독립군 광복군 영웅 5인의 흉상 이전 논의에 대해 “반역사적 결정”이라며 이종섭 국방부장관의 퇴진을 공개적으로 요구했으나 신원식 국민의힘 의원은 “대한민국 정체성을 저버린 광복회장이야말로 판단하실 능력이 없으면 즉각 사퇴하라”고 맞받았습니다.


홍범도는 19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해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아 1963년에 서훈되었지만 당시에는 ‘홍범도에 대한 관련 논란’이 우리나라에 알려지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2018년 문재앙 정권에 의해 건국훈장 1등급인 대통령장에 다시 추서되었을 때는 우리나라에 ‘홍범도 관련 논란’이 알려져 있었습니다.


문재앙 정부 때인 2018년 3∙1절 99주년을 맞아 육군사관학교 사관생도 교육의 상징 건물인 충무관 중앙 현관 앞에 홍범도 장군을 포함하여 지청천 장군, 이회영 선생, 이범석 장군, 김좌진 장군 등 독립전쟁 영웅 5인의 흉상을 세웠습니다.


김좌진 장군은 청산리 대첩의 주인공으로 공산당원의 손에 암살당했습니다. 지청천 장군은 광복군 총사령관으로서 공산주의자 김원봉과 끝까지 대립한 사람입니다. 이범석 장군은 신흥무관학교 연성대장, 광복군 지대장 출신으로 이승만 정부에서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을 지냈습니다. 


이회영 선생은 무정부주의자였으나 독실한 기독교(감리교) 신자로서 이념적으로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3천명의 독립군을 길러낸 신흥무관학교 설립자입니다. 이씨 6형제(건영,석영, 철영, 회영, 시영, 호영)가 현 시세로 수백억 원에 달하는 가산을 정리하여 그 돈으로 세운 장교 양성학교가 신흥무관학교입니다. 육사의 설립 취지에 부합하는 인물입니다. 


독립 영웅 5인 중에서 홍범도 장군의 흉상은 ‘공산주의 국가인 북한 침략을 대비하고 자유민주주의 수호 정체성을 교육하는 육사생도의 교육정신에 위배된다’며 철거해 이전한다고 국방부가 밝혀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지난 문재앙 대통령 시절 2021년 8월 15일경 78년 만에 갑자기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돌아 온다고 하길래, 독립군 장군의 귀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홍범도가 누구인지 살펴 봤습니다. 


홍범도는 어떤 사람일까요?

문재앙은 홍범도(1868~1943) 장군의 무장항일투쟁을 소개하면서 “1920년 일본군 정규부대에 맞서 독립 전쟁 첫 대승리인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끌며 독립 전쟁사 최고의 전과를 일궜다”라며 “장군은 일본군조차 ‘하늘을 나는 장군’이라 부르며 경외했을 정도로 용맹했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리고 문재앙은 그의 유해가 고국의 품으로 돌아 오는 날 공항까지 나가 거수경례까지 하면서 예를 다해 맞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홍범도 장군의 팩트는 이렇습니다.

1. 자유시(현재 스보보드니) 참변 사건을 알고 있습니까? 

홍범도는 1921년 6월 28일에 있었던 한국 독립군을 몰살시킨 러시아령 아무르 주 자유시(현재 스보보드니) 참변 사건에 가담한 인물입니다. 

머슴살이를 한 포수 출신 홍범도는 함경도에서 활약한 의병대장이었으나 임시정부를 공산화하려던 이동휘의 계략에 협조해서 무장 독립군들을 스보보드니로 집결시키게 한 후 간도와 만주로부터 당도한 우리 독립군들은 처절하게 몰살 당했습니다.


1921년 6월 28일 장갑차 2대에 기관총 30여문으로 중무장한 소련의 적군(赤軍) 29연대와 코사크 기변 600여명이 대한의용군 등의 주둔지를 무차별 공격했습니다. 독립군은 1시간여만에 전사자 277명, 익사자 31명, 1800여명이 실종되거나 포로가 되었습니다. 살아 남은 비공산주의 계열 인사들은 소련에 의해 죄수부대로 편성된 다음 강제로 시베리아 벌목 작업에 투입되어 고생하다가 사망했으며, 장교급은 사형당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상해 임시정부 등 독립운동 세력은 철저히 좌우로 분열했으며, 해방 후에도 한국 역사에서 ‘자유시 트라우마’는 사라지지 않았으며, 좌우갈등과 민족 분단을 가져온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자유시 참변으로 1920년까지 약 4,000여명이었던 항일무장운동(독립군)은 사실상 끝나게 되었고, 300명 정도의 소규모 부대로 잔존하게 되었습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갈 무렵 독자 세력으로 국내 진공 작전을 펼치지 못하여 우리 민족 자체적으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것이 자유시 참변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겨우 연명하던 독립군들을 속여서 적지로 유인해 몰살시킨 홍범도는 어찌하여 민족의 영웅이 되는 것입니까? 홍범도를 찬양하기 전에 자유시 참변부터 가르쳐야 합니다.

2. 자유시 대참변 사건의 공로로 홍범도는 자유시 참변 다음 해 54살때였던 1922년 모스크바에서 레닌으로부터 소련 혁명정권에 협조한 댓가로 금화 100루블과 군복 한 벌 그리고 ‘홍범도’의 이름이 새겨진 권총을 선물 받았습니다. 자신의 휘하 병력 300여명을 소련 적군에 편입시키고 본인도 소련군 제5군단 민족여단 대위로 임명되었습니다. 

3. 홍범도는 청산리 대첩 이후 59살 때 1927년에 소련 공산당에 정식 입당하여 공산당원이 되었으며, 소련 국적도 취득했습니다. 

4. 홍범도가 대장격으로 있던 고려 혁명군은 프롤레타리아 혁명 정신의 함양, 즉 공산화를 위한 볼세비키 혁명 교육에 앞장 섰습니다.

5. 소련군에 가담한 홍범도는 결국 소련에 이용만 당하고 1937년 9월 초, 스탈린의 명에 의해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로 강제 추방되었고, 그곳에서 영화관 관리원(매표원)으로 있다가 1943년에 사망했습니다.

6. 홍범도를 옹호하는 자들은 이동휘에게 속아서 부역했다고 떠들지만, 저것이 단순히 속아서 만들 수 있는 업적인가요? 나아가 저 정도면 속은 것도 죄입니다.

7. 공산 정권에 부역하다 죽은 인물을 8·15 이벤트로 써먹는 문재앙 정권의 악독함은 설명이 어려울 정도입니다.

한마디로 홍범도는 공산주의자로 자유시 참변에 소련군과 공모하여 어제까지 동지였던 독립군 우익세력을 학살하였습니다. 자유시 참변은 독립군 내 공산세력들이 소련군과 모의하여 우익 성향의 독립군을 무장 해제시켜 학살한 사건입니다.

홍범도는 봉오동 전투로 잘 알려 졌으나, 청산리 대첩 후 소련 공산당에 가입하여, 독립군 중에서도 독립군을 가장 많이 죽인 자이며, 항일무장 독립운동의 맥을 사실상 끊어버린 사람입니다. 

스탈린 공산주의 정권에 부역하다 죽은 인물을 8·15 이벤트로 써먹는 문재앙은 그 자체로 역사 왜곡 세력입니다.

문재앙은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에게 건국 훈장 최고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서하며, 그의 유해는 국립 대전 현충원에 안장시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2020년 친여 단체인 민족연구소 대전 지부에서는 백선엽 장군의 국립대전현충원 안장을 금지해 달라는 취지의 가처분 신청서를 내기도 했습니다. 백선엽 장군의 묘소 안내판을 철거하기도 했으며, 묘소 앞에서 ‘반민족 행위자 백선엽 국립 묘지에서 이장하라’, ‘국립묘지법 개장하라’고 적힌 대형 현수막을 흔들며 이장 촉구 시위를 했었습니다. 

문재앙 정부에서 백선엽 장군 폄훼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지난 2020년 7월 백 장군이 현충원에 안장된 후 더불당과 친문∙좌파 일부는 백선엽 장군 파묘를 주장했습니다. 민주당은 백장군 안장 1개월 뒤부터 ‘친일 파묘법’을 본격 추진했습니다. ‘친일 파묘법’ 법안은 누가 발의했는 줄 알고 있습니까? 일본 이름의 ‘도요타 다이쥬’(김대중)의 아들인 김홍걸 의원이 발의했습니다.

또한 보훈처는 홈페이지의 백장군 정보란에 ‘친일 반민족 행위자’라는 문구를 명시했습니다. 이것은 문재앙 정부가 백선엽 장군을 ‘친일파’로 공개 낙인 찍은 것입니다. 이에 앞서 육사는 6·25 당시 백 장군의 활약을 그린 웹툰을 홈페이지에서 삭제하기도 했습니다.


6·25전쟁 당시 낙동강 최후 방어선 다부동 전투에서 나라를 구한 백선엽 장군은 ‘파묘 하자’고 난리를 치면서, 공산주의자를 현충원에 안장하며, 건국 훈장 최고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서한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이것이 과연 공정한 나라입니까? 이것이 과연 정의로운 나라입니까?

홍범도를 미화하는 자! 시체를 이용하여 공산당을 선전하는 빨갱이 주사파 정권을 반드시 심판해야 합니다.


홍범도 장군은 대한민국 육사가 기념할 인물이 아닙니다. 홍범도가 생애 초반에 항일무장독립투쟁을 한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지만 자유시 참변 당시 희생당한 독립군의 반대편에 선택했습니다. 소련공산당의 지시와 지원을 따르는 ‘고려혁명군’이 소련과 함께 하길 거부하는 ‘대한의용군’을 강제로 통합하려는 과정에서 발생했습니다. 이때 홍범도 부대는 고려혁명군을 선택했으며, 대한의용군은 소련군과 고려혁명군에 의해 진압되고 학살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려의용군 등의 잔병(殘兵)을 처리하는 재판에 위원으로 참여했습니다.


자유시 참변 이후 홍범도는 독립군으로서의 활동도 없었으며, 연해주에서 협동농장을 운영했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1937년 스탈린에 의해 한인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자유시 참변 이후 홍범도의 삶은 소련 공산당원이자 소련인으로서 살았으며, 광복군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광복군(光復軍)은 1940년 9월 17일 중화민국 중경(重慶)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휘를 받는 군사조직입니다. 1939년 1월 창립된 한국독립당 당군(黨軍)과 기타 독립군 및 지청천, 이범석 등이 이끌고 온 만주 독립군과 연합하여 1940년 9월 17일 성립식을 갖고 결성되었습니다. 


광복군의 실질적 통솔인은 지청천과 그의 참모장인 이범석이었습니다. 결성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통수권을 인수하였습니다. 이후 미국 CIA의 전신인 OSS와 함께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으며, 1946년 5월 말에 해산하였습니다.


이것은 광복군은 공산주의와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념적으로도 조직적으로도 전혀 관계가 없었습니다. 소련의 카자흐스탄에 거주하던 소련 공산당원이자 소련 사람인 홍범도와 광복군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고려공산당의 이동휘가 광복군과 관련이 없는 이유와 같은 것입니다. 또한 동북항일연군의 김일성이 광복군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홍범도가 선택한 나라인 소련은 6∙25전쟁때 김일성을 앞세워 대한민국을 침공한 배후의 주동세력이었습니다. 


홍범도는 한 사람의 잘못된 역사 인식은 국가와 국민을 구렁텅이로 몰아 넣었습니다. 우리의 육사가 기념할 인물은 아닙니다. 우리의 육군 장교를 육성하는 군 교육기관인 육군사관학교에서 홍범도와 같은 인물을 추앙하는 흉상을 세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소련 공산당원 홍범도는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육사의 정체성에 위배되는 사람입니다. 

강석종 뉴스워크 칼럼니스트 기자 newswalk@naver.com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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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는 소련군과 야합하여 무장독립군을 집단 학살시킨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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