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9(목)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실시간뉴스
  • 김형석 연세대 몀예교수 칼럼 "더불어민주당이 국민과 민주정치를 버렸다."
    동아일보의 객원논설위원이신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의 칼럼 ‘더불어민주당이 국민과 민주정치를 버렸다.’를 소개하겠습니다. 며칠 전 TV에서 뉴스를 들었다. 민주당을 대표하는 한 최고위원이 민주당은 김대중 대통령으로 출발해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을 거쳐 지금은 당 대표인 이재명으로 이어져 왔다. 이재명이 민주당과 국가를 대표할 시대정신을 이끌어 가야 할 단계라고 했다. 그것은 이재명의 주장과 신념을 대변한 선언이다. 국민도 그 뜻을 이해는 한다. 문재인 정부에서 현재까지 국정의 중책은 민주당이 맡아 왔고 지금도 절대적 여소야대의 국회이기 때문에 국민의 관심과 기대가 민주당에 집중돼 있을 정도다. 문제는 민주당 안에서는 그런 선언이 가능할지 모르나, 국민의 민주당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은 초창기보다 더 증대하고 있다. 국가와 민주주의를 위한 우려와 걱정은 한계선까지 도달한 상태다.국민은 김대중 대통령의 동족 간의 평화통일을 위한 열성과 노력을 부정하지 않는다. 남북 간의 경제적 격차가 심하므로 경제적 원조를 베풀면 15년쯤 후에는 통일이 가능할 것 같다는 견해를 믿고 싶었다. 그런데 국민이 알고 있는 것보다도 너무 많은 원조를 했다. 그 결과는 핵무기 개발과 공산정권 굳히기에 도움을 주었다. 지금의 김정은 정권을 키워주는 결과가 되었다.노무현 정권은 어떠했는가? 우리 국민이 이런 상태로는 살 수가 없고 불안하여서 이민이라도 가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할 정도의 무질서와 혼란 상태가 되었다. 국민에게 물어 보라. ‘노무현 정부가 남겨 준 업적이 무엇인가?’라고. 그 주역을 담당한 세력인 86세대 운동권의 등단과 확장기였다. 대통령 자신이 자기모순을 극복하지 못했다. ‘나같이 불행한 대통령’은 다시 태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을 몸소 남겨 주었다.그 뒤를 계승한 문재인 정부도 마찬가지다. 민주당과 운동권은 물론 문 대통령 스스로가 공은 내세웠으나 과(過)는 인정하지 않았다. 퇴임 후에도 자신의 임기 5년 동안에 쌓아 올린 정치적 업적을 윤석열 정부가 계승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국민은 문 정부와 같이 가지 않는다고 추방한 윤석열을 왜 대통령으로 선출했는가? 중요한 것은 문재인 정권이 남겨 준 업적이 무엇이며, 윤 정부가 계승해야 할 과업이 있다면 무엇인가를 묻게 한다. 정치 기반인 경제 분야는 어떠했는가? 이명박 정부를 계승했다면 경제성장은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외교는 어떻게 했으며,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는 민주국가의 위상을 지켜 왔는가? 북한 동포를 뒤로하고 김일성 정권 세습화에 동조했다면 그것은 실정 중의 실정이다. 김대중 정신에 위배되는 결과가 되었다. 대한민국으로 귀순해 온 동포와 중국에서 우리 품으로 오려는 북한 동포들에 대한 처신은 앞으로도 역사의 평가를 받아야 할 과제다. 친북 정책은 북한 동포를 위한 절대적 의무와 권리이다. 김정은 정권을 위한 종북이 아니다.현재에도 민주당은 국정운영 방향과 방법은 물론 절차까지 관여하는 국회의 주도권을 행사한다. 국가를 위해서보다는 윤 정권을 타도하고 임기 내라도 재집권하겠다는 자세다. ‘그것도 애국심인가? 국민을 위한 정치인의 양심인가?’라고 국민은 묻는다. 누가 보든지 민주당은 국가보다는 정권을 위했고, 지금은 당 대표인 이재명의 사당이 되었음을 의심치 않는다. 민주정치는 실종되었고 싸워서 이기면 그것이 정의가 된다는 개인과 집단의 투쟁이 필수적이라는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 초창기부터 실정에 앞장서 왔던 임종석 전 실장,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송영길 전 당 대표, 각 분야에 자리 잡고 있던 운동권 출신의 잔여 세력이 이재명 대표를 앞세워 정권 재장악에 동참하려는 기세다. 민주당 안과 주변에 있던 친북좌파까지도 예외는 아니다. 민주국가에서는 선한 공존의 질서가 유지되어야 한다. 지금은 국가적 방향과 국민의 진실과 정의, 자유와 휴머니즘 정신이 보장, 구현되는 나라 선택에 직면하고 있다. 우리는 자기 잘못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 지도자를 원하지 않는다. 진실과 정직 없는 ‘내로남불’의 정의관, 인격을 갖추지 못한 개인이나 이기적 집단세력에 정권을 위임해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을 위하고 국민을 섬기려는 지도자를 선출해야 한다. 여야를 가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국민의 선택이다.
    • 주요뉴스
    2024-04-01
  •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가 그립다
    '의대 정원 확대’에 대한 반발로 전문의 파업이 대형 병원 중심으로 사직서를 제출하고 근무를 중단했다. 이에 따라 의료 현장의 혼란이 가시화되고 의료 공백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안타깝기가 이를 데 없다. 이 안타까운 현실을 보면서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리는 장기려 박사가 문뜩 생각나고 그리워진다. 장기려 박사님의 꿈은 어린 시절부터 의사였다. 그래서 경성 의학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평양 의과 대학과 김일성 종합 대학 교수를 지냈다. 한국 전쟁이 일어난 1950년, 장기려 박사님은 철수하는 군인들의 손에 이끌려 아내와 5남매를 북에 둔 채 둘째 아들만 데리고 월남하였다. 그리고 부산에서 천막을 치고 복음 병원을 세워 행려병자를 치료했다. 장기려 박사님은 가난한 사람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는 다짐을 하며 하루에 200명이 넘는 환자들을 돌보았다. 그럴 뿐만 아니라 1959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간 절제 수술에 성공하는 등, 당시 우리나라 외과 의사 가운데 최고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병원이 커지고 무료 진료가 불가능해지자 장기려는 1968년 한국 최초의 의료 보험 조합인 청십자 의료 보험 조합을 설립하였다. 청십자병원은 가난한 사람을 정성껏 치료해 줄 뿐만 아니라 치료비를 깎아 준다고 소문이 나 늘 많은 환자가 찾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해 있던 농부가 장기려 박사에게 하소연했다. “선생님, 제가 당장은 돈이 없지만 나중에 꼭 벌어서 갚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사정 좀 봐주세요. 내일 당장 모내기를 해야 하는데 이렇게 병원에 묶여 있으면 한 해 농사를 망치게 됩니다.” 농부의 말을 들은 장기려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밤에 문을 열어 줄 테니 그때 가세요.” 농부가 깜짝 놀라자 장기려는 웃으면서 말했다. “병원에서는 아마 병원비를 내지 않으면 퇴원을 안 시켜 줄 거예요. 그런데 돈이 없으니 도망을 쳐서라도 일을 해야 가족을 돌볼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장기려는 그렇게 말하고 농부에게 돈까지 쥐여 주었다. “얼마 안 되지만 차비나 하세요.” 농부는 고마운 마음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는 수술비가 없는 환자를 위해 자기 돈으로 수술을 해 주고, 그나마도 감당할 수 없게 되면 밤에 몰래 환자를 탈출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평생 자기 집 한 채 가지지 못하고 병원 옥상 사택에서 살다가 1995년 12월 추운 겨울날 새벽에 세상을 떠났다. 내 마음이 그러하듯 창밖에는 겨울비가 밤새 주룩주룩 내린다. 오늘따라 ‘바보의사 성산 장기려 박사님’이 그저 그립기만 하다.
    • 주요뉴스
    2024-03-12
  • 다큐‘기적의 시작’ 관람 후기
    ‘은종’이라는 동료 시민의 ‘기적의 시작을 보고’라는 관람 후기를 소개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일대기를 그린 또 다른 다큐극 영화 ‘기적의 시작’을 보고 왔습니다. 두 말이 필요 없습니다. 꼭 보십시오. 건국 전쟁을 보신 분이라면 더더욱 꼭 보십시오. ‘건국전쟁’이 큰 그림을 그리는데 치중했다면 ‘기적의 시작’은 이승만 대통령의 디테일한 부분을 세밀히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건국 전쟁은 역사를 잘 모르고 일방적으로 세뇌 당한 분들에게 유익한 영화입니다. 4.19는 이승만이 원인인가? 김구의 정체, 런 승만의 문제, 한강철교 폭파사건 등 이승만 대통령이 오해받고 있는 부분의 팩트를 설득력 있게 제시함으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오해를 푸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에 대한 역사를 잘 아는 분들이 보았을 때 거의 다 아는 내용이었고 소수의 부분은 새로운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의 시작은 자료를 수집하는 데 있어서 훨씬 더 섬세합니다. 이승만에 대한 책 몇 권을 섭렵했던 분들도 새로운 내용을 보고 저런 자료를 어떻게 찾았을까 하고 그 수고에 감탄하게 됩니다. 어쩌면 흥행에 치명적이 될 수도 있는 이승만이 한성 감옥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된 과정이나 서거하기 전 기도한 장면 등을 삽입한 것은 기독교인들에게 많은 감명을 줍니다. 이승만의 삶은 기도에서 시작하여 기도로 끝납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은 기도로 시작한 나라이니 기도를 놓지 말아야 국가가 번영한다는 무언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만약 성도들이 단체관람한다면 ‘기적의 시작’이 더 감명을 줄 것입니다. 기적의 시작의 증언자들은 이승만과 직접 만난 분들을 등장시켜 훨씬 더 사실적으로 다가왔다. 백선엽 장군,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 이인수 박사, 그리고 그 며느리의 증언은 어느 책에서도 볼 수 없는 사실적이고 감동적인 얘기들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농지개혁, 6.25 전쟁에 대한 일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맺어진 경위 등은 훨씬 더 자세하고 섬세하게 묘사되어 역사의 진실에 더 가까이 갈 수 있게 해줍니다. 무엇보다도 깜짝 놀란 것은 이승만의 경제에 대한 관심입니다. 벌써 한성감옥에서 쓴 ‘독립정신’에 앞으로 한국은 공업국이 되어야 한다고 예견한 것은 대단한 통찰력이었고, 실제로 6.25 이후에 공업국이 되기 위해 그가 이룬 업적을 세밀한 자료와 더불어 제시한 것은 그동안 몰랐던 내용이었습니다. 다큐 영화가 자칫하면 지루할 수 있는데, 텔렌트 임동진의 탁월한 연기력으로 이승만을 잘 살려내었습니다. 아마도 무료 출연이었을 것인데, 눈물과 마음으로 연기하는 것이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대한민국을 정말 사랑하는 대배우라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다른 무명의 배우들이 적절하게 사건들을 잘 재현해내어 다큐에 몰입할 수 있도록 톡톡히 한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승만 한 개인에게 너무 많은 빚을 졌습니다. 그동안 런 승만, 독재자, 친일파 등등으로 왜곡된 이미지를 이제는 바로 잡을 때가 되었다. 위대한 거인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때가 되었습니다. 모든 국민들에게 이승만을 바로 알릴 때가 되었습니다. 두 영화를 꼭 보십시오. ‘건국 전쟁’은 전체적인 그림을 그립니다. ‘기적의 시작’은 섬세하게 그 안을 들여다 봅니다. 성경으로 비유하면 ‘건국 전쟁’은 마가복음에 비유한다면 ‘기적의 시작’은 요한복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둘 중에 한 영화만 선택하지 마십시오. 두 영화 모두 보시는 것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요, 애국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건국 전쟁은 제법 관람객들이 있었는데, 기적의 시작은 관객면에서 많이 부족해 보입니다. 이점이 안타깝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기적의 시작’이 훨씬 더 애정이 갑니다 우리교회 성도님들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가슴에 더 와닿는다고 했습니다. 건국 전쟁을 보신 분들은 반드시 기적의 시작도 함께 보십시오. 다른 감동을 느낄 것입니다. ‘기적의 시작’을 먼저 보셨습니까? ‘건국 전쟁’도 보세요. 두 영화가 결합할 때 우리는 이승만 대통령과 대한민국을 좀 더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총선 전에 두 영화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할 일은 두 영화가 흥행해서 대한민국 국민들의 역사인식이 바뀌도록 열심히 홍보하는 일입니다. 아직 보지 못하셨다면 먼저 극장으로 가십시오. 교회 단체관람을 강력히 추천합니다.”라고 동료 시민 ‘은종’은 말했습니다. 김덕영 감독의 ‘건국 전쟁’이 개봉 27일만에 100만을 돌파하며, 다큐로는 드문 흥행 기록을 세우며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권순도 감독의 ‘기적의 시작’, 그리고 ‘건국 대통령 이념 보급회’의 김효선 사무총장의 ‘이승만의 독립 외교 33년’ 등 다른 기록 영화들도 ‘건국 전쟁’과 거의 동시에 선을 보였습니다. 이장호 감독의 이승만 관련 영화 ‘하우보만의 약속’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동안 영상 매체는 “대한민국은 태어나서는 안될 나라”라는 주장을 하며 반공 애국 진영, 특히 이승만 건국 대통령을 비방하고 폄훼하는 반역 세력의 전유물처럼 이용되어 왔습니다. 그런 영상 매체가 이제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밝히려는 일에 효율적으로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승만이 ‘독재자’ 또는 ‘친일파’로 낙인 찍히며 국민의 뇌리에서 아예 지워버려야 할 추악한 인물로 악마화 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가 독립운동과 반공 투쟁에서 승리해서 대한민국의 건국 대통령이 되었고, 공산군의 6.25 남침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내고 부흥시키는데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이승만만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쉽게 공산화되어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김일성의 지배를 받는 위성국가로 편입되었을 것을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세계적인 위인이자 천재였습니다. 그는 이 나라의 국부였고, 애국자요, 선지자요, 예언자요, 세계가 공산당을 열광할 때 “공산당은 망한다”고 외쳤습니다. ‘전시 중립론’이라는 논문을 쓴 국제 정치가였고, 훌륭한 선교사였고, ‘재팬 인사이드 아웃’의 저자인 작가였고, 민족 복음화를 소망한 하나님의 종이었고, 철저한 반공주의자였으며, 그는 하나님 중심의 철저한 자유 민주주의 투사였습니다. 그는 당시 최고의 학력 소유자였습니다. 죠지 워싱톤대 학사였던 클린턴 대통령과 동문이었으며, 하바드대 석사였던 오바마 대통령과 케네디 대통령과 동문이었으며, 프린스턴대 박사였던 윌슨 대통령과 동문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도 이만한 학력 소유자를 찾기 힘들었습니다. 대한민국에 자유의 등불을 달아준 불세출의 위대한 정치가였습니다. 탁월한 외교가였으며, 토지개혁을 단행했고, 양반과 상놈을 구분하는 ‘반상 철패’를 했으며, 의무 교육을 실시했고, 여성들을 투표에 참여케 했습니다. 의회 정치를 실시 했습니다. 그의 애국정신과 업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한 시대의 등불이었습니다. 전교조에 의해 역사 왜곡이 극에 달한 이 나라는 이승만을 바로 알아야 대한민국이 사는 것입니다.
    • 오피니언
    • 강석종 칼럼
    2024-03-08
  • 이승만 영화 ‘기적의 시작’이 만들어진 배경 이야기
    권순도 감독의 ‘[기적의 시작]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기적입니다.’라는 글을 소개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영화 '기적의 시작'을 만들고, 전국 개봉을 하기까지 모두 기적의 순간입니다. ■ 영화의 시작 ■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저의 아버지께서 '이승만 대통령 영화를 만들어 보라'는 권유를 하셨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유명하지 않은 제가 그 당시 더 기반이 없었던 시절, 그런 권유를 받으니 너무 막연하고 막막하게 다가 왔습니다. 저는 대학 졸업 후에는 부모님 댁에서 같이 사는 것 외에는 따로 '부모님으로부터 금전적인 도움은 받지 말자'고 했고, 또 그것을 실천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신 어머니는 우리나라 영화계와 아무런 인맥도, 기반도, 심지어 카메라 한 대 조차 없던 아들이 이리저리 일감을 찾아다니는 모습에 안쓰러워 ‘카메라 한 대 얼마 하니? 카메라 한 대 사줄게. 그것 가지고 시작해 보라’고 하셨지만 저는 그것마저 거절했습니다. 많은 예술인들이 그렇겠지만, 저 역시 이 분야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돈벌이가 시원치 않았고, 포기하고 다른 일을 해 볼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었습니다. 친구들이 만나자고 하면 누가 밥값을 내야 하는지 신경이 곤두섰고, 스스로를 단련시키기 위해 버스나 지하철 다섯 정거장 정도는 교통비를 안 쓰고 걸어 다녔습니다. 물론 저의 집안이 그 정도 돈 못 쓸 정도로 여유가 없지는 않았으나, 저는 속으로 '이 나이에 돈벌이도 못하면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다니는 것은 사치다'라고 생각하며 가급적 걸어 다녔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 온 저의 영화 인생은 그렇게 밑바닥부터 시작되었고, 많은 분들이 도와주셔서 비록 독립영화이지만 조금씩 규모를 키워가며 제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처음에는 순회 상영을 다니며, DVD를 찍어 판매하는 수준에서 점차 작품을 작은 영화관에서부터 상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작품이 하나 둘 씩 영화관에 걸려 작품을 찾는 관객들이 늘었고, 이번엔 멀티플렉스 상영관 전국 개봉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랜 기간을 지내면서 아버지의 권유를 당장 실행해 옮겨 작품을 완성할 수는 없었으나, 덕분에 이승만 대통령과 같이 일하거나 생활했던 분들을 만나 뵈면 꼭 이 대통령에 대해 질문하고 이를 기록해 두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백선엽 장군님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뵌 분들은 그 당시에도 꽤 계셨으나, 백 장군님처럼 이승만 대통령과 같이 큰일을 하며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셨던 분은 없었습니다. 백 장군님은 이승만 대통령과의 일화와 본인이 참여했던 전투에 대해 매우 실감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전후방 전투 현장을 직접 보여주시며 설명하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런 귀한 증언들은 매번 카메라로 기록해 두었습니다. 그렇게 기록하는 데는 많은 비용이 들지 않아 저는 그 당시에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했습니다. 요즘과 달리 20년 전에는 6mm 테잎을 썼는데, 당시의 기록이 멀쩡하게 보존된 것도 작은 기적입니다. 한편 해를 거듭하며 시간이 지나도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왜곡과 비난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아니, 멈추기는커녕 점점 심각해져만 갔습니다. 또 많은 젊은이들이 그런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모습에 국부 더 나아가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를 두고만 볼 수 없어 '22년 12월부터는 아예 작정하고, 그동안 모았던 자료들과 추가 인터뷰를 통해 '기적의 시작'을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 국민 대배우의 합류 ■ 제작 과정에서 국민배우 임동진 님도 합류하시게 되었습니다. 원래 그런 대배우분께 극영화도 아닌 다큐멘터리에 넣을 재연장면에 출연해 주시라고 요청하는 것은 큰 결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임 배우님께서는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으셔서, 속으로 많이 놀랐고, 겸손한 모습에 크게 감동했습니다. 임동진 배우님과 같은 영화계 거물이 합류하셨음에도 제작환경은 딱히 나아지지는 않았습니다. 제작진은 그 분 이름을 내세워 따로 모금하지 않았고, 제 성격상 여기저기 제작비 모금하러 다니기도 쑥스러워 그러지 못해서 프로듀서 김재동 목사님이 모금해 오신 제작비 내에서 해결했습니다. 그런 형편 속에 많은 분들의 우려와 달리 제작은 무사히 마쳤습니다. ■ 아들 이인수 박사의 생전 마지막 고백 기록 ■ 이번 작업에서 또 기억에 남는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로 이 대통령의 쓸쓸한 말년을 제일 가까이 곁에서 지켜보셨던 이인수 박사님과의 인터뷰입니다. '23년 11월 별세하신 이인수 박사님의 인터뷰는 결코 쉽게 성사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작품을 위해 그분의 증언을 꼭 담고 싶었으나, 그분의 체력에 한계가 많으셨던 때라 인터뷰 약속을 잡고 갔다가도 두 세 번 실패하여 헛걸음을 하고 돌아 왔습니다. 인터뷰가 어렵게 되자 이인수 박사님과의 인터뷰는 포기했습니다. 사모님이신 조혜자 여사께서 마치 곁에서 대신 말씀을 전하시듯 하고, 이인수 박사님은 옆에만 앉아 계십사 하는 게 저의 새로운 바람이자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무 약속도 없이 임동진 배우님과 이화장을 둘러 보러 갔다가 이인수 박사님 컨디션이 최상인 것을 발견! 당장 카메라를 켜고 마이크를 연결해 인터뷰를 진행하였습니다. 그때 마침 장비를 가져간 것도 다행이었고, 그게 이인수 박사님의 생전 마지막 인터뷰가 되었습니다. 다시 봐도 당시 이 박사님은 혼신의 힘을 다해 인터뷰에 응해주셨던 모습이 역력합니다. 이 모든 것이 관객들에게 감동을 전해주는 것 같습니다. ■ 신앙인 이승만 재조명 ■ 이승만 대통령이 젊은 시절 선교사들이 전해 준 예수님을 한성 감옥에서 복역 하며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영접한 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난제 앞에서 하나님께 매달렸고, 우리나라 첫 국회를 기도로 시작했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작품에서 비기독교인들을 의식해서인지, 기독교 색채를 빼고 있습니다. 종교를 떠나 그런 이승만의 모습은 인간 이승만을 이끄는 원천적인 힘이었기 때문에 저는 제 작품에서 그런 부분을 다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마지막 기도는 임동진 배우님의 뛰어난 연기력과 맞물려 관객들에게 많은 감동을 선사해 줍니다. ■ 전국 극장 개봉 ■ 드디어 ‘24년 2월 22일! 기적의 시작은 전국 개봉됩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어렵지만, 영화를 만드는 것도 어렵고, 영화를 한 개 극장에라도 걸기도 어렵고, 극장에 걸었다 해도 관객들을 사로잡기에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그 모든 과정에 전문 인력이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저예산 독립영화에서는 이 모든 과정이 한 두 사람의 몫입니다. 전국 극장에서 개봉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전국 극장 개봉을 위해서 제작사들은 적게는 수 천 만 원, 많게는 수 억 원의 홍보비를 씁니다. 저희는 '기적의 시작' 홍보를 위해 쓸 수 있는 금액이 거의 없었습니다. 금액을 밝히기에 민망해 그럴 수는 없지만, 그 금액조차 제작 과정에서 다 소진했기 때문입니다. 홍보를 위해 쓴 금액은 전단지 인쇄에 30만원 가량, 작품을 소개해 주시는 유튜브 분들께 음료수를 사 드리거나 식사 대접을 한 게 전부입니다. 주말에는 감독인 제가 손수 전단지를 챙겨 광화문이나 시청 같은 곳에 가서 전단지를 돌렸습니다. 젊은이들 중에는 전단지에 이승만 대통령 얼굴이 있는 것을 보고 바로 접어버리며 불쾌감을 표현한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수모를 당하면서도 전단지를 나눠 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것이 많은 홍보비 없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원초적인 홍보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SNS 홍보도 했으나 제가 인플루언서가 아니다 보니 효과는 미미했던 것 같습니다. 넉넉잡고 홍보비로 100만 원 정도 썼던 것 같은데, 그런 상황에서 전국 개봉까지 이어진 것은 '기적'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습니다. 어렵게 잡은 서울 두 개의 극장(필름포럼과 허리우드). 시사회 이후 5개월간 상영을 통해 관객 수 천명이 관람하고, 입소문을 듣고 오는 관객 수가 줄지 않자 멀티플렉스에서 이를 눈여겨보고, 일단 전국 10개 극장에서 상영을 시작해 보자고 제안을 준 것 같습니다. 수 많은 난관을 뚫고 드디어 전국에 소개되는 ‘기적의 시작’. 여태까지는 저와 조력자 분들의 힘으로 끌고 왔으나 이제부터는 여러분의 관심과 성원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렇게 극장에 걸게 되었는데 보러 와 주시지 않으면 허무하게 극장에서 내려지게 됩니다. 극장에 와서 봐 주시는 것은 작은 애국입니다. 교회에서 단체관람 와 주시면 좋겠습니다. 조만간 CGV에 예매가 열립니다. 예매를 많이 해 주시면 더 많은 상영관을 확보하여 더 많은 관객 분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독 권순도 올림
    • 주요뉴스
    2024-03-07
  • 이제는 ‘기적의 시작’이다!
    스카이데일리 임명신 기자의 “[기획] 이승만 다큐 ‘건국 전쟁’ ‘기적의 시작’… ‘길 위에 김대중’ 압도”라는 글을 소개합니다. 권순도 감독이 20년 구상 끝에 작년 10월 내놓은 ‘기적의 시작’은 독립영화 특유의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건국 전쟁’ 흥행 속에 역주행 중입니다. 같은 주제의 두 다큐는 상보적이며 상호 심화학습을 가능하게 한다. 필히 두 편 모두 볼 필요가 있습니다. ‘건국 전쟁’과 ‘기적의 시작’은 같은 목표, 다른 매력 건국 대통령 우남 이승만(1875~1965)을 다룬 두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조용한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 2월 1일 개봉한 김덕영 감독의 작품 ‘건국 전쟁’이 주목받으며 4개월 전 나온 권순도 감독의 작품 ‘기적의 시작’도 역주행에 가속도가 붙었다. 두 작품 다 철저히 사료와 증언을 바탕으로 구성된 다큐지만 흐느끼는 관객이 속출할 만큼 뜨거운 반응이다. 두 편의 이승만 다큐가 또 다른 역사 인물 다큐를 압도한 것도 눈길을 끈다. 훨씬 유리한 여건 속에 제작된 김대중 탄생 100주년 기념작 ‘길 위에 김대중’이 개봉 4주 후 12만 관객을 동원한 반면 ‘건국 전쟁’은 개봉 열흘 만에 누적 관객 수 18만 명을 돌파했다. 누적 관객 수 3위, 개봉관 수도 개봉 당초보다 3.3배 늘어난 상태에서 11일 누적 관객 수 24만 명을 넘어섰다. 다큐로선 이례적인 성적이 어디까지 갈지 관심을 모은다. ‘기념관 하나 없는 이승만’이 ‘기념시설 최다의 김대중’을 이겼다는 말까지 나온다. 한편 ‘기적의 시작’은 작년 10월 하순 서울 시내 단 두 곳(종로3가 낙원상가 헐리우드 극장·신촌 필름포럼)에서 개봉된 가운데 주로 각종 애국단체∙교회 등의 상영회를 통해 관람객을 늘려 갔다(현재까지 5000명 정도). ‘건국 전쟁’이 2월 1일 전국 CGV에 걸리고 화제를 부르자‘기적의 시작’ 역시 개봉 약 4개월 만인 22일 CGV 재개봉이 결정됐다. ‘기적의 시작’ ‘건국 전쟁’은 대한민국이 어떻게 세워졌고, 멸망의 위기를 넘어 훗날 선진국으로 도약할 기틀을 구축했는지 조목조목 짚는다. 농지개혁, 문맹퇴치(교육개혁), 안보·경제발전을 담보한 한미 동맹, 자원 빈국의 산업화에 절실한 원자력발전의 토대 마련 등 다가올 산업화가 이승만 대통령 시대에 어떻게 준비됐는지를 두 편의 다큐 영화 는서로 다른 톤으로 설명해 준다. 각각의 장점이 있으며 지루하지 않을 반복 학습 효과가 기대된다. ‘기적의 시작’은 이승만을 다룬 최초의 본격 다큐 영화라는 의미 외에 애국지사로서의 역정과 기독교 신앙의 상관성을 조명한 점도 돋보인다. 창군 및 구국의 영웅 백선엽 장군(1920~2020)과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1931~2023) 박사의 생전 마지막 인터뷰, 원로배우 임동진 목사의 이승만 연기 역시 독보적인 부분이다. 두 다큐는 1천 수백 년에 걸친 왕조 시대와 근대 식민지 시대를 겪은 중세적 공동체에서 자유 민주공화국 헌정 질서 마련이 얼마나 천지개벽할 일이었는지를 묵직하게 일깨운다. 공통된 주제지만 두 감독이 친분이 있거나 사전 협의한 것도 아닌데 내용상 겹치지 않는다. 상보적이며 상호 심화 학습판이므로 둘 다 관람할 가치가 충분하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공산화가 신생국들의 대세였던 시절, 이승만은 현대 국가(자유민주공화국)의 본질과 시스템을 이해한 유일한 한반도인으로 볼 만하다. 두 다큐의 시의성도 각별하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위협받는 오늘날, 정통성 논란은 결국 ‘이승만의 나라’ ‘김일성의 나라’ 양자택일의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한국 현대사를 넘어 세계사적 인물 이승만… 우선 다큐부터 ‘건국 전쟁’ 출연자의 한 사람인 류석춘 전 연세대 교수(전 이승만연구원장)는 연구원이 보관 중인 이승만 1차 자료 100박스에 대해 예산 부족으로 손을 못 대고 있다며 아쉬움을 수차례 토로한 바 있다. 그 자료들은 대부분 40년 망명 생활 중 세계정세를 전하거나 논한 신문·잡지 스크랩과 친필 메모들이라고 한다. 한국 현대사를 넘어‘세계사적 차원에서 연구돼야 할 인물 이승만’이라는 시각에 힘이 실린다. 이승만의 생애는 드라마틱하고 불가사의한 요소로 충만하다. 영화∙드라마 등 대중 서사 장르를 통해 그려질 날이 와야겠지만 일단 다큐가 절실했다. 관련 사실들이 극단적으로 왜곡되거나 묻혀 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교과서에서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고 교과서 밖에선 악마화∙희화화됐을 뿐이다. 해석의 문제 이전에 팩트 자체가 엉터리인 경우도 많다. ‘이승만 죽이기 60여 년’… 가짜 뉴스·역사∙왜곡의 결정판 명저 ‘슬픈 중국’의 저자이자 ‘건국 전쟁’ 첫머리에 등장한 송재윤 캐나다 맥마스터대 교수는 조선일보 칼럼 ‘이승만 죽이기 60여 년, 팩트를 지어 내는 역사가들’에서 “김덕영 감독의 작가 정신과 예술혼이 거짓 뉴스와 허위 정보를 마구 엮어 일방적으로 이승만 악인전(惡人傳)을 집필해 온 역사학계의 고루한 시대착오와 부족 주의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고 평가했다. ‘이승만 죽이기’ 최근 사례로 송 교수는 “(역사학자인)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박태균)”가 TV 교양 프로에서 이승만의 1952년 대선 승리에 대해 기호 1번을 독점해 대다수 문맹 유권자 몰표를 유도한 결과라는 취지로 설명한 점을 들었다. 이어 간단한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그게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는 것과 김 감독이 당시의 선거 포스터를 꼼꼼히 뒤져 이를 입증해 냈음을 짚었다. 이승만은 기호 1번이었던 적이 없다. 이승만에 얽힌 대표적 오해인 6·25전쟁 발발 직후 라디오방송 틀어 놓고 도망갔다는 미확인 소문이 오늘날까지 조롱과 저주 담긴 별명 ‘런Run승만’으로 살아 있다. 김 감독의 ‘건국 전쟁’에서 ‘한강 다리 폭파’ ‘3.15 부정선거’ ‘하와이 도피설’ 등을 바로 잡을 증거들이 제시됐다. 또 한4·19 이후 이승만의 행보야말로 ‘독재자’ 낙인이 왜 부당한지에 대한 결정적 증거다. 자신과 무관한 부통령 선거에 대해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난 무일푼의 독재자? 그런 인물이 과연 독재자일 수 있는지 ‘건국 전쟁’과 ‘기적의 시작’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묻고 있다. 한국인이 처음 만난 이승만… ‘건국 전쟁’ 감동 후기 이어져 조지워싱턴대(학사)∙하버드대(석사)∙프린스턴대(박사) 출신의 이승만이 얼마든 취득 가능했을 미국 시민권을 마다한 채 40년간 무국적자의 불편함을 견딘 사실에 김 감독은 주목했다. 아울러 미국 내 이승만의 족적이 그간 어떻게 왜 지워졌는지 현지 교민들 증언으로 전해진다. 1953년 정전협정 1년 후 미국 방문 당시 자유의 투사로 칭송받으며 뉴욕 시가를 대대적으로 퍼레이드한 영상은 ‘건국전쟁’을 통해 처음 세상에 공개됐다. 이승만이 공산주의에 맞설 냉전 구도의 불가피성과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미국 등 서방세계 조야에 열렬히 설명∙설득한 점도 부각된다. 그것이 대한민국 탄생 비밀의 한 측면이다. 공산주의의 본질·실상에 대부분 무지하던 시절이었다. 개봉 초기 ‘건국전쟁’ 포스터 사진만 네이버 영화면에 누락돼 있어 “좌편향 문화계의 이승만 지우기”라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관람객 평점은 10점 만점에 육박했다. “덕분에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어 감사하다” “공산화 저지의 공로만큼은 이승만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취지의 감상 후기가 가장 많다. 조선일보가 김 감독을 자세히 인터뷰한 것 또한 눈길을 끈다. 여기서 김 감독은“(이승만) 공부를 시작한 뒤 큰 반성을 하게 됐고 그를 비롯한 건국 세대에 대한 죄송함을 영화에 담았다”고 밝혔다. 2012년 유튜브에 유포된 악의적 이승만론(論) ‘백년 전쟁’이 오히려 일부 네티즌이 진실 찾기를 시작한 계기가 되었던 것과 흡사한 경우라 할 것이다. 북한은 왜 그렇게 ‘이승만 타도’에 집착했을까… 586세대 김 감독의 각성 김 감독은 1950년대 동유럽 국가들로 보내진 북한 전쟁고아들을 조명한 다큐‘김일성의 아이들’(2020)로 유명하다. 1만명 가량 동유럽에 분산 위탁돼 자라다 스탈린 사후 격변 속에 집단귀국 당한 후 김일성 유일 체제를 위해 잊혀진 존재들이다. 김 감독은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북한에 관심을 가지다가 1990년대 중반까지 평양에 ‘이승만 괴뢰도당 타도’구호가 있었음을 알게 됐으며 그들이 왜 그렇게까지 이승만 타도에 집착했는지 궁금해졌다. 김 감독이 작품 구상 및 제작 과정에서 깨닫게 된 것은 이승만을 향한 집요한 폄훼가 “오랜 세월 좌파들의 선동에 의한 부당한 평가”와 “북한의 공작” 탓이 컸다는 사실이다. 김 감독 자신이 북한에 호감 내지 환상을 가진 586세대 일반의 감성과 역사관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에 그 폐해 또한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거짓의 선글라스를 벗으면 평생 대한민국만을 위해 살았고 애국애족의 마음을 행동으로 실천했던 한 노인의 모습이 보일 것”이라며 울먹였다. 한 네티즌의 댓글 “대한민국이 버린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위대함은 대한민국 국민만 모른다. 참담한 현실에 부끄럽고 한없이 죄송하다”는 심정과 고스란히 겹친다. ‘건국’ ‘산업화’ 없이 ‘민주화’는 불가능… 그러나 뒤틀린 역사교육 김 감독의 말대로 이승만은 “(파고들수록) 100년 앞을 내다보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한 한국사의 유일한 인물”이다. 작품 속에서 그렉 브레진스키 미 조지워싱턴대 교수가 “미래 비전과 안정된 보장 시스템이 존재해야 건국이라 할 수 있다”고 강조했듯이 “바로 그걸 이승만이 해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이란 결코 일본의 패망으로 당연히 얻어진 게 아니었다. 김 감독은 “이승만이 깔아 놓은 레일 위에 박정희의 경제 개발이란 기관차가 달린 것”으로 두 지도자의 시대를 요약한다. 핵심적인 통찰이다. 산업화를 통한 중산층의 성장 없이 이뤄지는 ‘민주’란 ‘인민 민주주의’에 불과하다.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중국(중화인민공화국)도 모두‘민주’를 전면에 내세운다.문재인 정부 시절 현행 헌법에서‘자유’를 삭제하고자 시도한 행위의 의미와 그 궁극적 지향점이 무엇인지 많은 사람이 알아차리게 됐다. ‘독재자’라는 꼬리표가 3대 세습체제 속에 신격화된 북한 권력자들에게 붙는 대신 변명없이 자진 하야한 이승만에게 당연한 듯 붙는 게 온당한지 이제라도 저마다 자문해야 할 시점이다. ‘이승만=살인마’의 관점을 일반화시키면서 제주 4.3의 비극이 대한민국 수립 및 그것을 위한 한반도 유사 이래 최초의 보통 선거(5.10총선) 저지를 위한 남로당의 무장 폭거에서 출발한 것임은 도외시한다. 이것이 지난 30년 우리나라 제도권 안팎의 역사교육 현실이다. 놓칠 수 없는 ‘기적의 시작’ 권 감독의 20년 구상 끝에 태어난 ‘기적의 시작’은 공산주의가 유라시아 대륙을 뒤덮었던 시절 그 끝자락 한반도에서 어떻게 자유 민주공화국이 수립·유지될 수 있었는지, 이승만 덕분에 가능했던 대한민국탄생의 기적과 그것이 어떻게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토대가 됐는지에 초점을 맞췄다. 독실한 크리스천의 면모도 조명했으며 원로배우 임동진의 이승만 재연으로 다큐 이상의 감동을 더했다. 백선엽 장군 인터뷰와 ‘기적의 시작’ 개봉 며칠 후 별세한 이승만의 양자인 이인수(전 명지대 법정대 학장) 박사의 영상은 진귀한 역사적 자료가 됐다. 본인들의 생전 마지막 공식 기록이다. 대통령 하야 후 전주 이씨 문중의 주선으로 이승만 슬하에 30세때 입적한 이 박사와 그 가족은 지난 60여 년간 이승만 죽이기의 실질적 희생자였다. 권 감독에 따르면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한 이 박사가 기적처럼 촬영에 임했다고 한다. 한 마디 한 마디 온 힘을 다하듯 간신히 해독 가능한 발음으로 건국 대통령의 애국 열정과 말년의 부자(父子)인연을 증언한 모습이‘기적의 시작’에 실려 있다. 특히 망명 생활의 근거지였던 하와이에서 몇 개월 휴식한 이승만 내외가 귀국하려던 당일 한국 정부로부터 하와이 잔류를 종용당한 장면, 이후 우울 속 건강 악화로 현지에서 임종을 맞게 된 과정이 생생하게 회고됐다. ‘건국전쟁’에서 하와이 망명설이라는 거짓 뉴스 유포의 전후 맥락을 짚었다면 ‘기적의 시작’은 당사자들의 내면을 전하고 있다. 영화 ‘서울의 봄’으로 현대사 공부? 화제의 이승만 다큐 두 편은 1300만 관객을 동원한 ‘서울의 봄’에 맞선 체제 정당성 대결의 최전선에 있다. 총선을 약 2개월 앞둔 시점에서 또 하나의 선거전이 될 수 있다. ‘서울의 봄’은 대다수 관객에게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허구의 틀을 빌어 사실상 실존 인물과 역사를 거꾸로 해석한 상업영화다. ‘서울의 봄’이 대한민국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 ‘기회주의자가 득세한 적폐의 나라’라는 인식을 강화하도록 유도하는 반면 ‘건국 전쟁’과 ‘기적의 시작’은 대한민국 헌정사의 절체절명 위기와 우여곡절 속에서 이승만이라는 한 애국자가 지향한 가치를 되새긴다. 이승만이 깔아 놓은 레일(자유민주 헌법) 위에 박정희의 산업화(근대화)가 가능했다는 관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1979년 10.26으로 중단될 뻔한 산업화를 완결짓고 민주화 시대를 예비한 게 전두환의 신군부, 즉 제5공화국이다. 그렇다면 영화 ‘서울의 봄’이 기도한 신군부 악마화는 대한민국 헌정사의 부정 아닌가. 이원석 검찰총장이 몇몇 동료들과 ‘서울의 봄’을 관람한 인증 샷과 소감을 남겼다. 기존 민주화운동 세력의 신군부 서사에 충실한 발언이었다. 건국의 역사를 제쳐둔 채 민주화를 말할 수 있을까. ‘건국 전쟁’ ‘기적의 시작’ 관람 권유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 등 정부 요인과 ‘73년생 한동훈’ 등 여당 인사들의 관람 필요성이 역설되기도 한다.
    • 주요뉴스
    2024-03-06
  • 3.1 독립운동 정신으로 4.10 총선 승리하자!
    ‘한국 NGO연합’ 및 ‘자유정의시민연합’의 글을 소개합니다. 오늘은 3.1독립운동 105주년 기념일이다. 이번 4.10 총선에서 3.1 독립운동의 정신으로 좌파와의 싸움에서 반드시 승리하자. 4.10 총선은 대한민국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중차대한 선거다. 선거라기보다 제2의 6.25와 같은 선거전쟁이다. 4.10 전쟁에 나서는 국민들은 죽을 각오로 선거에 임해야 한다. 나 하나쯤의 자만은 바로 죽음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경각에 달린 나라를 구해야 한다. 자유대한민국이 지속적인 성장과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4.10 총선에서 반드시 자유 우파세력이 국회 다수석이 되어야 하는 것은 진정 역사적 대업이고 사명이다. 문재인의 5년과 더불당이 다수당으로 국회를 농단한 8년 동안 우파들은 충분히 경험했다. 다시는 무도한 반 대한민국 세력이 정부와 국회를 장악하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국민적 합의는 이미 충분히 이루어졌다. 그러나 만에 하나 아직도 안일하고, 나약한 국가 정체성으로 대한민국 이념과 사상에 대해서 혼란스러운 사람들이 있다면 차제에 분명하고 확고한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갖도록 분발해야 할 것이다. 영화 ‘건국전쟁’을 봤다면 자유의 가치를 정말 귀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유의 소중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슬프고 안타깝다. 이번 4.10 총선에서 야당은 좌파시만단체와 협약을 맺어 그들에게 최소 10석의 비례대표 자리를 주기로 합의한 모양이다. 그들 대부분은 친북, 종북단체 출신들이며, 이념 측면에서 북한과 궤를 같이 하는 세력들이다. 따라서 이번 4.10 총선에서 야당을 많이 지지하게 되면, 극단적으로 친북, 간첩세력들이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다. 이는 정말 있어서는 안되는 대한민국 최악의 시나리오다. 1975년 4월 30일 월남은 공산화되었다. 당시 미군 철수 후 미군이 남기고 간 많은 최신 무기와 보급품, 병력에서도 월맹군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던 월남이 왜 공산화 되었을까? 당시 월남은 월맹에 비해 정신력에서 이미 패했다. 그리고 정부, 군, 정치판에 월맹의 간첩들이 요소요소에 포진해 있었다. 그것도 고위직에 자리했다고 하니 월남은 월맹의 손바닥 위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대한민국은 어떨까? 아마 지금의 대한민국도 그 당시의 월남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미 대한민국에도 북한 간첩이 35만이 침투해 있다는 소리가 탈북한 북한 고위인사들을 통해 공공연히 흘러나오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의 국민들은 사상이나 이념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침묵은 동조와 마찬가지다. 간첩들의 생각에 동조하는 이 나라의 미래는 어떠할까? 오늘은 3.1 독립운동 105주년 기념일이다. 그러나 독립운동 기념일행사를 할 정도로 나라의 상황이 여유롭지 않다. 해서 오늘 우리는 주사파와 친북세력들을 척결하기 위한 제2의 독립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여 4.10 총선에서 좌파세력들을 패퇴시킬 것을 천명한다. 여기에는 한 치의 머뭇거림도 있어서는 안 된다. 유관순 열사와 안중근 의사 등 위대한 선배들의 뒤를 이어 좌파세력을 척결하고, 자유우파세력 모두가 한 마음으로 4.10 총선 승리를 위해 진군하기를 간절히 촉구한다. 2024년 3월 1일 한국NGO연합/자유정의시민연합
    • 주요뉴스
    2024-03-02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강석종 칼럼,"5∙18 유공자 정치인 91%가 가짜, 민주당이 압도적!"
    5∙18 유공자 정치인 91%가 가짜, 민주당이 압도적! ‘스카이데일리’의 보도에 의하면, 5·18민주화운동 유공자로 등록된 약 4300명 중 상당수가 5·18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관련 분야 전문가들은 국가기념일로 정해져 있고, 5·18정신의 헌법전문 반영 움직임, 국가 예산으로 보상금 지급과 취업 우대 등 각종 특혜가 주어지는 현실을 감안하면 가짜 5·18 유공자 의혹은 반드시 짚고 넘어 가야 할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스카이데일리’는 지난해 연말께 국민적 관심사인 ‘5·18민주화운동 유공자 명단’을 단독 입수해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관련자와 전문가 자문을 받아 실체적 규명을 진행해 왔습니다. 이에 5·18민주화운동 기념일 43주년을 맞아 등록된 유공자 명단에 대해 개별적인 분석과 검증 결과를 토대로 정계·언론계·문화예술계 순으로 공개해 나갈 예정이라고 합니다. 스카이데일리가 입수한 유공자 명단은 5·18 관련 진실을 찾는 사람들이 광주 5·18 기념탑에 적혀있는 명단과 5·18 관련 단체들의 자료와 관계자 증언·언론 보도 등을 취합해 7년여 데이터 작업을 거친 자료입니다. A3용지 400쪽에 가까운 엑셀 파일 ‘5·18민주화운동 유공자 명단’은 4346명의 ‘위치 001-01’부터 ‘148-02’까지 ‘돌판 명단’에 새겨져 있는 이름·생존 여부·사인·주분류·시기·장소·작성 명단·생년월일·(공적·피해)내용·차수·분류·비고 순으로 나열돼 있습니다. 등록된 유공자들은 5·18 당시 시민군으로 활동했거나 진압군에 의해 사망 혹은 상해를 입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 5·18 당시 군사독재에 대항해 투쟁 활동을 벌이다 옥고를 치르거나 군인들로부터 폭행당한 사례도 있습니다. 하지만 유공자 중에는 5·18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인사들이 상당수 포함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일부 인사는 5·18 당시 광주가 아닌 타 지역에서 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등록돼 있어 유공자 선정 등록 과정에 심각한 오류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5·18 당시 11살이던 A(54) 씨는 1990년 수도권 소재 대학의 총학생회 소속으로 노태우 정부에 저항하는 학생운동을 했다는 명목으로 유공자에 등록되었으며, 경남 마산에 거주하는 B(57) 씨는 한 기업의 노조위원장으로 있던 1988년 무렵 회사를 점거 농성한 이력으로 5·18 유공자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5·18과 아무런 상관이 없음에도 유공자로 선정된 이들은 대부분 ‘민주화 명예’란 이름을 빌어 유공자로 등록되었습니다. 5·18단체의 한 관계자는 “엄격하게 따지면 5·18 당시 사망자나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사람들만 유공자로 선별을 해야 한다”며 “하지만 5·18광주항쟁 현장에 있지도 않았던 인사가 막연히 민주화 운동을 했단 이유만으로 유공자로 선정된 경우가 많은 게 사실”이라고 지적했습니다. 5·18 민주항쟁 허위유공자가 넘쳐나게 된 이면에는 ‘인우보증’ 제도가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기존 5·18 유공자가 보증만 해주면 누구나 별다른 증거가 없어도 유공자가 될 수 있는 법률적 허점을 이용한 측면도 있어 보입니다. 5·18 민중항쟁 구속자회와 5·18 민중항쟁 부상자회 등 관련 단체는 허위로 등록된 유공자들이 1990년부터 2015년까지 보상 차원에서 지급되는 나랏돈을 빼먹기 위해 오랜 기간에 상당한 규모로 세력화돼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최근 이들 단체 대표들은 서울 여의도 국회 앞과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가짜 유공자’들이 넘쳐나고 있다며 이들을 척결해 달라는 촉구 집회를 갖기도 했습니다. 유공자 명단에는 전·현직 언론인과 정치인·문화인·연예인 등도 다수 포함돼 있어 본지의 사실 검증 과정에서 속속 가짜 유공자 실체가 드러날 것입니다. 유공자 명단을 분석한 결과, 정치권에는 가짜 유공자일 개연성이 있는 인사들이 전·현직 국회의원과 도지사를 포함해 310명에 달했습니다. 이는 전체 유공자 중 7.1%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했습니다. 이들 중에는 국내 거물급 정치인뿐 아니라 국회의원 보좌관이나 특보 등을 지낸 이유로 유공자가 된 경우도 다수 있었습니다. 더불당의 한 현직 국회의원은 5·18 당시 광주가 아닌 타 지역에서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지만 유공자 명단에 버젓이 이름이 올라 있었습니다. 심지어 언론계에도 5·18항쟁과는 무관한 기자와 프로듀서(PD) 등 전·현직 인사만 181명으로, 언론사 대표를 지냈거나 편집국장·논설위원 등 고위 임원이나 간부급 출신들입니다. 이들의 공적 내역은 5·18항쟁과 연관 지을 만한 것이 기록돼 있지 않았습니다. 특히 언론노조 활동을 한 인사가 다수 포함돼 있어‘끼리끼리 나눠 먹기 한 것 아니냐’는 세간의 의혹이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일부 연예인도 유공자로 등록돼 있었습니다. 한 중견 가수는 자신이 부른 노래 중 한 곡이 ‘5·18을 연상시킬 수도 있다’는 이유로 유공자가 됐습니다. 이 밖에도 5·18이나 광주에 연고가 없는 남녀 중견 탤런트도 3명이나 유공자로 등록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시인·소설가·평론가 등 문화예술계 인사도 적잖이 눈에 띄었습니다. 1965년생 작가는 5·18을 소재로 시를 썼다는 이유로, 경기도 김포에 거주하는 1964년생 작가는 5·18을 소재로 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유공자가 됐는가 하면, 1963년생 영화평론가는 5·18 관련 평론을 했다는 명목으로 유공자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1955년생 사진작가 최모씨를 비롯한 상당수는 2014년 5·18 기념 순회사진전에 출품한 게 인정돼 유공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사례들은 한 두 건이 아닙니다. 1968년생 조모 씨는 1990년 박종철 3주기 추도식에 참가해 폭력 정권 타도하자는 시위를 하다 집시법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받은 것이, 1975년생 오모 씨는 양심적으로 병역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5‧18 유공자가 됐습니다. 5‧18 당시 전남도청 시민군 상황실장을 맡았던 박남선 5·18 기동타격대 상임고문은 “당초에 5·18 유공자가 되려면 1980년 5월 17일부터 말일까지 항쟁에 참여하거나 피해를 본 사람들로 규정돼 있었지만 민주당이 법을 바꾸는 바람에 관련 없는 인사들이 대거 들어오게 된 것”이라며 “5·18 유공자 관련 법을 다시 개정해 이들을 걸러내는 작업을 거쳐 엄격하게 적용시킬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 가운데 정치인들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 보면, 5·18민주화운동 유공자로 등록된 4346명 중 정치계에서 ‘가짜’로 추정되는 유공자가 가장 많은 것으로 확인됐다. ‘스카이데일리’는 지난해 연말께 국민적 관심사인 ‘5·18민주화운동 유공자 명단’을 단독 입수해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관련자와 전문가 자문을 거쳐 실체적 규명을 진행해 왔습니다. 이에 5·18 민주화운동 43주년을 맞아 등록된 유공자 명단에 대한 개별적인 분석을 토대로 최근 공개한 언론계와 문화예술계에 이어 정치계 인사들에 대한 검증 결과를 추가로 공개합니다. 다만 대법원에서 공인을 제외한 일반 유공자들에 대한 명단 비공개는 정당하다는 원심을 확정함에 따라 공인을 제외한 일반인의 경우, 개인을 특정할 수 있는 실명이나 소속, 공적·피해 내역 등은 신중하게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전·현직 정치인 339명 중 29명만 공적·피해 내역 확인했습니다. 5·18 유공자 1·2차 명단 4346명을 분석한 결과, 전·현직 정치인들이 339명(7. 8%)으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이들 정치계 인사 중 29명은 5·18당시 공적이나 계엄군에게 피해를 본 내역이 확인됐습니다. 이 중 14명은 5·18때 중상이나 경상 등 부상을 입어 유공자로 등록됐습니다. 나머지 12명은 군사법원에 회부된 경우였으며, 3명은 구금이나 체포를 당해5·18 유공자로 선정됐습니다. 1991년 광주지역 구의회 의원을 역임한 김○집(당시 25세)씨는 전남대에 재학 중에 5·18민중항쟁이 터지면서 대학생 조직·홍보팀장으로 활동하다 계엄군에 체포돼 군사법원에 회부됐습니다. 1998년 전남 순천시 기초의원에 당선됐던 심○근(당시34세)씨와 광주지역 정당 지역위원장을 역임한 송○석(당시 21세)씨 또한 계엄군에게 체포돼 고초를 겪었습니다. 2018년 광주시장 예비후보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던 김○수 씨를 비롯해 국민의당 창당발기인 중 한 명인 손○호 씨, 전북지역 시의원 김○오 씨 등은 5·18 당시 부상을 입어 유공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나머지 310명(91.4%)은 5·18과 무관하거나 아무 공적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들 29명을 제외한 나머지 310명(91.4%)의 정치계 인사들은 5·18이 아닌 다른 민주화운동이나 학생운동·노동운동 등을 한 이력으로 5·18 유공자로 등재됐으며, 공적이나 피해 내역 자체가 없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가짜 유공자일 개연성이 높은 정치계 인사 310명 중 86명은 ‘민주화 명예’ 5·18 유공자로 선정됐다. ‘민주화 명예’는 5·18과는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지만 대한민국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유공자로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민주화 명예를 제외한 나머지 224명은 이름과 소속·경력 등만 언급돼 있을 뿐 5·18 당시 공적이나 피해 내역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습니다. 5·18 관련 단체들은 이들이 ‘인우보증’ 방식을 통해 유공자로 편입됐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인우보증은 기존 5·18 유공자가 보증만 해주면 별다른 증거가 없어도 누구나 유공자가 될 수 있는 제도로 가짜 5·18 유공자가 넘쳐난 데 결정적 역할을 했했습니다. ◇가짜 추정 인사 중 정당 관계자가 82명…민주당 출신 정치인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가짜 유공자로 추정되는 정치계 인사들을 직업별로 살펴보면 전·현직 정당 관계자가 82명으로 가장 많았습니다. 또 광역시와 시‧군‧구의회 의원이 79명, 전·현직 국회의원이 49명으로 뒤를 이었습니다. 이밖에도 장·차관이나 청와대 수석·비서관 등 전·현직 고위공무원이 24명, 주요 기관이나 협회 단체장이 22명, 전·현직 광역자치단체장과 군수·구청장 등이 15명, 국내 거물급 정치인의 보좌관·비서관·특보 등이 15명이었습니다. 기타 각종 선거에 낙선했거나 직업 관련 언급이 뚜렷하지 않은 정치계 인사가 24명이었습니다. 특히 가짜로 추정되는 전·현직 국회의원과 시·군·구의회 의원들을 정당별로 분석한 결과 민주당 출신 인사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유공자로 등록된 전·현직 국회의원의 경우 총 49명 중 38명(77.5%)이 민주당 출신이었으며, 나머지 11명은 다른 정당 정치인들이었다. 시·군·구의회 의원 또한 총 79명 중 65명(82.2%)이 민주당 출신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와 관련 5‧18 당시 전남도청 시민군 상황실장을 맡았던 박남선 5·18 기동타격대 상임고문은 “당초에 5‧18 유공자로 인정되는 조건이 1980년 5월 17일부터 같은 달 31일까지 항쟁에 참여하거나 피해를 본 사람들로 규정돼 있었지만, 민주당이 법을 바꾸는 바람에 관련 없는 인사들이 대거 들어오게 된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전 총리부터 전·현직 국회의원, 청와대 수석, 전직 장·차관 등 다양합니다. 5‧18 유공자로 등록된 주요 정치계 인사들 중에는 전·현직 국회의원과 장·차관, 광역자치단체장 등 거물급 정치인으로 추정되는 인사들이 대거 포함돼 있습니다. 이들의 명단은 본지 취재진이 1차로 지난달 28일 광주 5‧18 기념공원 내 지하 추모승화공간 돌판에 새겨진 5‧18 유공자 명단과 대조 작업을 거쳤으며, 실제 본인이 맞는지 인터넷에 게재된 개인 프로필과 유공자 명단의 대조 작업을 추가로 거쳤습니다. 스카이데일리에서 확보한 유공자 명단에는 개인별 성명과 생년월일·소속·과거 정치 이력 등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습니다. 전·현직 국회의원의 경우 김○석·김○현·김○진·김○두·김○우·김○영·박○동·박○주·박○호·설○·유○수·양○조·이○영·정○국·한○갑·허○식 의원 등이 유공자가 되었습니다. 김○두 전 의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 수행비서 당시 1978년 명동 구국선언과 관련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 면회가 거절되자 시위를 하다 1978년 9월 26일 업무방해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아 5‧18 유공자가 됐습니다. 김○우 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1989년 4∼10월간 노태우 정권 퇴진을 위한 청년학도 투쟁연합 발대식 등에 참여해 시위를 벌이다 1989년 12월에 집시법 위반으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아 민주화명예로 5․18 유공자가 되었습니다. 김○영 전 더불당 국회의원은 5‧18 특별법 제정 찬성자 명단에 올랐다는 이유로 민주화명예 유공자가 되었으며, 박○주·박○호·허○식 의원 등은 개인 신상만 기록돼 있을 뿐 5‧18과 관련된 아무런 공적이나 피해 내역이 없었습니다. 공직 출신 중에선 이○찬 전 국무총리도 이름을 올렸습니다. 이 전 총리는 5‧18이 아닌 서울대 재학 당시 민청학련 사건 관련 긴급조치 위반으로 내란 음모죄를 선고받아 명예 유공자가 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비서실 보좌관을 역임한 오○호 씨가 등재돼 있고, 이○영 전 청와대 정무수석과 노무현 전 대통령 비서실 수석과 광역자치단체장을 지낸 박○춘 씨도 이름을 올렸습니다. 전직 대통령 비서실 정책실장을 역임한 김○현 씨와 문재인 정부 시절 청와대 비서관을 역임한 최○욱 씨도 유공자로 등재돼 있지만 공적 내역은 전혀 없었습니다. 전 노무현 대통령 특보와 장관을 역임한 김○경 씨도 5‧18 관련 아무런 공적 없이 유공자가 되었습니다. 시‧군‧구 의원 중 국회의원 보좌관과 광주지역 기초의원을 역임한 이○진 씨는 1986년 4월 대학교 재학 중 교내에서 4‧19기념제 참여 후 “반제·반파쇼 투쟁의 깃발 아래 힘차게 진군하자” 등을 외치는 등 수 차례 집회 및 시위를 주도하다 같은 해 8월 25일 집시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민주화명예로 5‧18유공자가 되었습니다. ◇김경재“가짜 유공자 문제, 민주당서 혁신 과제로 삼아야” 이와 관련, 김대중 전 대통령의 핵심 측근이던 김경재 전 한국자유총연맹 총재는 “민주당이 광주와 호남을 중심으로 정치세력을 마련했기 때문에 5‧18 유공자들을 보호하려 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면서도 “하지만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스스로 삼가고 다른 사람에게 공을 돌려야 했음에도 자신들이 가담했다고 이름 넣고 돈 받고 명예를 얻는 것은 떳떳하지 못한 처사”라고 지적했습니다. 김 전 총재는 또 “더불어민주당의 진정한 혁신은 광주민주화운동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부터가 시작”이라며 “이를 위해선 가짜 5‧18 유공자 문제를 자유주의 진영뿐 아니라 민주당에서도 혁신의 과제로 내세워야 할 것”이라고 일갈했습니다. 5∙18 유공자 정치인 339명 중 91%가 가짜이며, 민주당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뻔뻔스럽고, 창피도 모르고, 자기들의 잘난 맛에 살고 있는 민주당! 양심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우리 세금으로 저런 인간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는 것에 자괴감마저 듭니다. ‘사람이 먼저’라더니 돈이 먼저였구나!
    • 주요뉴스
    2023-06-14
  • 최만순의 약선요리,"통풍을 예방하는 차"
    최만순의 약선요리 스치는 바람에도 죽을 만큼 고통스럽다. ′통풍′이 잘 발병하는 24절기 중 ′망종시절(芒種時節)′이다. 망종 풍속은 보통 농사의 한 해 운을 보며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였다. 세시 속담에 ″보리는 망종 전에 베라″는 말이 있다. 망종 전에 보리를 베어야 논에 모도 심고 밭갈이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망종이 지나면 무르익은 보리가 바람에 쓰러지는 일이 많아 최소한 이 때까지는 보리 베기를 마쳐야 한다. 예전에 경상도는 보리를 많이 심었다. ″발등에 오줌 싼다″는 속담처럼 1년 중에 이 시기가 가장 바빴다. ′본초(本草)′에 보리는 맛은 달고 평하며 비장과 위장으로 들어간다. 효능은 젓을 잘 나오게 하며 뱃속에 소화되지 않은 물질이 쌓이는 것을 예방하고 구토나 설사가 나오며 유방에 통증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여 준다. 경남 남해에 사는 필자의 제자는 매년 바닷바람을 머금은 야생화와 약초를 채취를 하여 효소를 만든다. 그 중에서 ′구절초′가 6월 첫 더위에 좋다. 약선에서 음식을 만들 때는 증세에 따라 식재를 선택하여 요리한다. 첫째 질병이나 재료의 음양을 항상 먼저 생각하게 된다. 크게 구분하면 밖은 양이요 안은 음이다. 급성병은 대개 밖으로 증세가 드러난다. 예를 들자면 오한, 발열, 두통, 관절통 등 맹렬한 통증을 동반하여 온다. 그 반면에 만성병은 대체로 안쪽에 숨어 있는 증세다. 만성병은 병세도 급격하지 않고 치료 또한 쉽지 않다. 보통 밖으로 드러나는 병세를 치료하는 방법은 첫째 땀을 내는 방법을 사용한다. 땀을 내면 ′발한해열(發汗解熱)′에 의하여 병의 독을 살갗과 호흡기를 통해 몸 밖으로 발산을 시켜준다. 이와는 반대로 안에 있는 증세의 치료법은 아래로 내려 준다. 이것은 곧 이뇨제나 대변이 잘 나오게 하는 재료를 쓴다. 병의 근원을 대변과 소변을 통해 몸 밖으로 배설을 시켜준다. 보통 땀을 내는 재료는 담백한 향기가 난다. 향기란 그 기운이 위로 올라가서 흩어져 버리는 성질을 가진 양성재료다. 아래로 내리는 재료는 쓴맛이 있는 음성재료다. 그러므로 겉으로 드러나는 증세와 안에 숨어 있는 증세를 음과 양으로 갈라서 선택을 한다. ■통풍을 예방하는 차 ▲효능-갑작스런 더위는 소화기관(脾胃)을 냉하게 만들어 혈액이 잘 돌지 않는다. 수족 냉증으로 손발이 저리고 통풍이 오는 것을 방지하며 여름 감기도 예방하는데 도움이 된다. ▲재료-개화직전의 구절초1kg. 원당800g ▲만드는 법 1.구절초를 흐르는 물에 씻어서 바람이 잘 통하는 그늘에 물기가 완전히 제거되도록 말린다. 2.꽃과 설탕을 넣고 3개월 후 채에 받쳐 액기스를 받는다. 3.액기스만 1년 이상 숙성시켜 효소를 만든다. 4.효소 20g을 1회분으로 따뜻한 물에 타서 마신다.
    • 주요뉴스
    2023-06-09
  • 강석종 칼럼,"한국 전쟁 고아의 아버지 참전용사 위트컴 장군을 아십니까? "
    한국 전쟁 고아의 아버지 참전용사 위트컴 장군을 아십니까? 어제 저녁에 텔레비전을 보다가 뉴스에 ‘파란 눈의 의인’, ‘고아의 아버지’,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위트컴 장군’이라는 멘트가 나왔습니다. 누구인지 궁금해서 위트컴 장군(Richard S. Whitcomb)에 대해서 살펴 봤습니다. 부산시 남구 대연동에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유엔이 관리하는 전몰장병 묘지인 ‘세계 유엔 기념공원’이 있습니다. 전쟁과 평화의 기억이 공존한 부산은 6·25 전쟁에서 전투는 없었지만 전쟁의 흔적이 짙게 남아있는 곳입니다.이곳에는 1950년 6.25 전쟁에 참전해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우방국 2,300여 기의 영령과 함께 유일하게 미국 장성인 리차드 위트컴 장군이 잠들어 있는 곳입니다. 리처드 위트컴은 1894년 미국 중부 캔자스주 캔자스시티에서 출생했습니다. 아버지 조지 허버트 위트컴은 캔자스주 대법관을 역임한 저명 법률가였고, 어머니 제시 위트컴 역시 당시 남자대학에서 최초로 강의한 법학 교수였습니다. 전통적인 청교도 가문에서 태어나 엘리트 교육을 받은 리처드 위트컴은 유년 시절 기독교적 정의와 인류애를 터득했습니다. 캔자스주 토피카의 워시본(Washbon) 대학에 진학한 후 미식축구 선수, 토론회 우수 토론자로서 명성을 얻었으며, 같은 시기 학생 자원 선교활동회(SVM· Stu 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s)에서도 활동하며 선교사로서 필리핀에서 사역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미국이 참전을 결정하여 학군사관후보생(ROTC)으로 장교 임관한 위트컴도 전쟁에 참전하여 유럽에서 활약했습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당시 독일 해군의 이동 감시초소인 아이슬란드 케플라비크 기지 건설 참여 후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중 가장 치열한 전투였던 오마하 전투에 참전하여 5만여 명의 연합군 병력, 군수 물자 수송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제임스 밴 플리트(James Alward Van Fleet)와 더불어 프랑스 최고 무공훈장을 받았습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는 17만 명의 대규모 병력이 동원된 필리핀 상륙작전의 수송, 군수 보급 업무를 마치고 준장으로 승진했으며, 1953년 6·25전쟁 휴전협정이 무르익어갈 무렵 부산의 제2군수기지 사령관으로 부임했습니다. 군수기지 사령관으로 재임하던 1953년 11월 27일 오후 8시 30분, 부산역 부근에서 큰 불이 났습니다. 난롯불 부주의로 일어난 불은 강풍을 타고 순식간에 확대되어 대화재가 발생했습니다. 14시간에 걸친 화마는 부산역 인근 번화가의 주요 건물 및 민가 등 약 1,250호를 태우고 다음 날 오전 10시 20분에 완전히 진화되었습니다. 피해는 주택 3,132채가 완전히 소실되었고, 사상자 29명, 6,0 00여 세대 3만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습니다. 판자집도 변변히 없어 노숙자에 가까운 생활을 하던 피난민들은 부산역 건물과 인근에 있는 시장 점포 등이 유일한 잠자리였는데 대화재로 오갈 데가 없게 되었으며, 입을 옷은커녕 먹을 것도 없었습니다. 참상을 목격한 위트컴 장군은 민간에 사용할 수 없는 군수 물자를 직권으로 군수창고를 열어 추위에 갈 곳이 없는 이재민들에게 천막촌을 건립해 주고 군용담요와 군복, 먹을 것 등을 3만 명의 피난민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었습니다. 정부도 할 수 없었던 용단이었으나 군수 물자 무단 전용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연방 의회의 청문회에 불려갔으며,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도 증언해야 했습니다. 의원들의 쏟아지는 질책에 장군은 조용히 말했습니다. “우리 미군은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하지만, 미군이 주둔하는 곳의 사람들한테 위기가 닥쳤을 때 그들을 돕고 구하는 것 또한 우리의 임무입니다. 주둔지의 민심을 얻지 못하면 우리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고, 이기더라도 훗날 그 승리의 의미는 쇠퇴할 것입니다”라고 답했으며,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이다(War is not done with sword nor the rifle. Genuine triumph is for the sake of the people in the country).”라고 말해 오히려 의원들은 일제히 기립하여 오래도록 박수를 받았습니다. 미국 정부는 추가 군수품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군수기지 사령관의 1차 소임은 장기전으로 소모된 유엔군에게 막대한 장비와 탄약을 재보급하여 화력 전투를 보강하고 한국군의 전력을 증강하여 유리한 조건으로 휴전을 성립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긴박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투에 사용할 군수 물자를 무단으로 전용하며 민간의 아픔과 고통을 품는다는 것은 비상식적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위트컴은 한국인들이 겪고 있는 전쟁의 고통과 필연적 후유증을 인간적인 측면에서 가슴 아파했던 것입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 온 뒤 장군은 전쟁이 끝났는데도 돌아가지 않고, 정치권을 설득해 군수기지가 있던 곳을 이승만 대통령한테 돌려주면서 ‘이곳에 반드시 대학을 세워달라’고 청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약 50만 평의 캠퍼스 부지를 제공받았고, 휘하 공병부대를 동원하여 교사(校舍) 건축을 도왔습니다. 그곳이 바로 지금의 부산대학교로써, 부산대학교가 설립된 배경입니다. 그러나 부산대 학생도, 교직원도, 졸업생도 이런 사실을 거의 모를 것입니다. 이 외에도 이재민 주택 건설, 도로 건설, 의료 시설 건립 등을 지원하고 부산대를 비롯한 각급 학교 설립을 도와 한국과 부산의 전후 재건에 힘썼습니다. 부산 대화재를 계기로 위트컴 장군은 한국 정부와 부산시의 총체적인 재건을 위해 당시 테일러 주한 미8군 사령관과 긴밀한 협의를 하면서 미군대한원조(AFAK) 프로젝트를 계획했고 미국 의회 등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미군대한원조 프로젝트는 부산 대화재를 극복하기 위한 묘책으로 위트컴 장군이 제안하고, 미8군 사령관 맥스웰 테일러(Maxwell D. Taylor) 장군이 승인해 탄생했습니다. 또한 장군은 영도구의 피난민촌에서 만삭의 임산부가 보리밭에서 아기를 낳는 장면을 목격하고 조산소를 설치해 주었으며, 부산 중구에 메리놀병원을 증축하는 데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6.25 전쟁 두 달 전인 1950년 4월 15일 메리놀 수녀회에서 설립한 메리놀병원은 시설도 열악하였지만 밀려오는 피난민 환자들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위트컴은 병원기금 마련을 위해 사령관의 체면을 버리고 자신은 파란 눈의 갓에 도포를 걸친 노인으로, 메리놀 수녀회와 부대원들은 한복을 입은 서양인으로 단장하여 거리 가장행렬을 하며 모금 활동을 펼쳤습니다. ‘사람들은 장군이 체신없이 왜 저러느냐?’고 수근 거렸지만 개의치 않고 이 땅에 기부문화를 조성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습니다. 메리놀병원은 위트컴의 노력으로 미군대한원조(AFAK) 기금을 지원받아 1954년 7월 29일 현재의 위치에 지상 3층 160병상을 가진 정식 병원으로 기공식을 하게 되지만 신축 자금은 부족했습니다. 예하 미군 장병에게는 월급의 1%를 기부하게 하여 기금을 충당했습니다. 메리놀병원, 성분도병원 건립 등 전쟁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가난한 병자들을 위한 장군의 발상과 헌신적 노력에 세계가 박수를 보냈습니다. 한복 차림의 벽안(碧眼)의 장군을 두고 ‘라이프(Life)’지는 ‘한국의 양반(Gentle man of Kore a)’이라고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사명은 1950년 겨울 개마고원 장진호 전투에서 몰살한 수천여명의 젊은 미국 병사들이 유해를 찾아 미국으로 송환하는 일이었습니다. 장진호 전투에서 미국 해병대 절반 이상의 희생이 있었기에 중공군의 남하가 2주간 지연되었고, 이렇게 번 시간을 이용해 피란민들 20여만 명이 그 유명한 ‘흥남 철수’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리처드 위트컴 장군은 1954년 퇴역 후에도 한국에 남았습니다. 전쟁 기간 틈틈히 고아들을 도와온 위트컴 장군은 당시 전쟁고아를 위해 함께 활동하던 한묘숙 여사와 결혼했습니다. 한묘숙 여사는 남편과 결별 후 두 자녀를 키우던 ‘고아원 원장’이었고, 선물 상자를 들고 고아원을 방문한 위트컴 장군은 독신의 노신사였습니다. 한묘숙의 보육 활동에 감동한 위트컴은 이듬해 전격적으로 청혼하였고, 두 사람은 33년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퇴역 후 전쟁고아 돕기, 미군 유해 발굴에 남은 삶을 바치면서 ‘전쟁고아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얻었습니다. 1982년 7월 12일 작고한 장군은 “내가 죽으면 한국에 묻어달라.”는 것과, 부인에게 ‘내가 죽더라도 장진호 전투에서 미처 못 데리고 나온 미군의 유해를 마지막 한 구까지 찾아와 달라’고 유언했습니다. 이에 따라 유엔기념공원 내 미국 묘역에서 영면에 들었습니다. 부인 한묘숙 여사는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북조선은 장진호 부근에서 길죽길죽한 유골만 나오면 바로 한묘숙 여사한테로 가져왔고, 한 여사는 유골 한 쪽에 300불씩 꼬박꼬박 지불했습니다. 그 유골 중에는 우리 국군의 유해도 여럿 있었습니다. 하와이를 통해 돌려받은 우리 국군의 유해는 거의 대부분 한 여사가 북조선으로부터 사들인 것들입니다. 한 여사는 한때 간첩누명까지 쓰면서도 굴하지 않고 남편의 유언을 지켰습니다. 장군의 연금과 재산은 모두 이렇게 쓰였고, 장군 부부는 끝내 이 땅에 집 한 채도 소유하지 않은 채 40년 전에 이승을 떠났습니다. UN공원에 묻혀있는 유일한 장군 출신 참전용사가 바로 위트컴 장군입니다. 끝까지 그의 유언을 실현한 부인 한묘숙씨도 장군과 합장되어 있습니다. 국가보훈처는 작년 11월 8일, 민족상잔의 비극 6·25전쟁 이재민을 돕고 한국 재건에 힘쓴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했다.’고 평가받는 고(故) 리처드 위트컴(Richard S. Whitcomb) 미 육군 준장에 대한 국민훈장 1등급인 무궁화장 추서안이 국무회의에서 의결됐다고 밝혔으며, 작년 11월 11일, 부산 유엔기념공원에서 열린 유엔참전용사 국제추모식에서 한덕수 국무총리가 위트컴 장군 자녀인 민태정 위트컴희망재단 이사장에게 훈장을 추서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는 전봉준 동상은 있어도, 전태일 기념관은 있어도, 위트컴 장군에 대한 동상 하나 없습니다. 부산에도, 서울에도 없습니다. 위트컴 장군 조형물 건립은 2018년 한 차례 추진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유엔평화기념관에 조형물 설치를 추진할 예정이었지만 노출 빈도가 떨어진다는 내부 지적 때문에 무산됐습니다. 이후 기약 없이 답보하던 조형물 제작은 작년 11월 국가보훈처가 위트컴 장군에게 국민훈장 1등급 무궁화장을 추서하기로 결정하면서 급물살을 탔습니다. 이러한 리처드 위트컴 장군의 인류애와 한국 사랑 정신을 기리기 위해 장군이 떠난 지 꼭 40년 만에 뜻있는 자들이 모여 위트컴 장군 조형물을 만들기로 결의했습니다. 조형물 건립 시민위원회도 11월 10일 발족했습니다. ‘리차드 위트컴 장군 조형물 건립 시민위원회’ 발족 행사장에는 각계각층 인사 100여 명이 모였습니다. 부산 남구를 지역구로 둔 박수영 국민의힘 국회의원은 시민위원회 발족식 개회사에서 “70년 전 부산역전 대화재로 추위와 배고픔에 떨었던 이재민 3만 명이 위트컴 장군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이제 되돌려줄 차례이다. 시민 3만 명의 성금 모금을 통해 기념조형물을 건립하고 장군의 정신을 되새기자.”고 말했습니다. 위트컴 장군의 딸 민태정 위트컴희망재단 이사장은 “조형물 건립은 아버지의 뜻을 기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라며 청중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습니다. 부산지역 정계, 재계, 언론계, 학계 인사로 구성된 ‘리차드 위트컴 장군 조형물 건립 시민위원회’는 2023년 11월 10일까지 1년간 시민 3만 명이 1만 원씩 내는 방식으로 총 3억 원을 모금해 조형물을 건립하는 캠페인을 벌이기로 했습니다. 사업에는 향토건설업체 협성종합건업 정철원 회장이 몇 년 전 조형물 건립을 위해 3억 원을 희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시민모금운동 방식으로 장군의 조형물을 건립하기로 한 것은 동상 건립 자체보다 장군이 부산시민을 위해 베푼 정신을 공유하고 기리자는 취지에서입니다. 모금 예상 인원 3만 명도 의미가 있습니다. 1953년 11월 27일 부산역 대화재와 관련 있습니다. 이날 화재로 6,000세대 3만 명의 이재민은 추위와 배고픔에 떨어야만 했습니다. 3만 명은 당시 위트컴 장군의 도움에 대한 보은(報恩)의 의미가 담겼습니다. 위트컴 장군의 조형물이 올 해 11월 즈음에는 부산에 세워질 것 같습니다. 늦어도 너무 늦었지만, 국가 예산 말고, 재벌 팔을 비틀지도 말고, 70여년 전 수혜를 입었던 피난민 3만명, 딱 그 수만큼 1인당 1만원씩 해서 일단 3억 원을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민주주의의 생명은 참여입니다. 보은도 십시일반, 참여해야 합니다. 1만원의 기적을 이루어 봅시다. 70년전, 전쟁고아들을 살뜰하게 살피던 위트컴 장군을 생각하면서, 메리놀 병원을 세워 병들고 아픈 이들을 어루만지던 장군의 손길처럼, 대학을 세워 이땅에 지식인을 키우려던 그 철학으로, 부하의 유골 하나라도 끝까지 송환하려고 했던 그 마음을 생각하며 각자 내 호주머니에서 1만 원씩 냅시다. 딱 커피 두 잔 값씩만 냅시다. 1만 원의 기적이 한국병을 고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설마 이 땅에 1만원씩 낼 사람이 3만명도 안 되지는 않겠지요? 1만원의 기적은, 부산은행 101-2073-6988-01 (사)국제평화기념사업회를 통해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 주요뉴스
    2023-06-08
  • 강석종 칼럼,"왜 진보들은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를까?"
    왜 진보들은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를까? ‘진보’라고 불리는 단체들은 국가 행사에서 애국가를 부르지 않고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릅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님을 위한 행진곡’의 노랫 가사는 진보진영 원로이자 상징이었던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을 역임한 백기완 소장의 시 ‘묏비나리’에 곡을 붙인 것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백기완은 어떤 인물일까요? 백기완은 1932년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동부리에서 아버지 백홍렬(白弘烈)과 어머니 홍억재 사이에 4남 2녀 중 넷째로 태어 났습니다. 백기완의 조부인 백태주(白台周)는 3.1운동 당시에도 수천장의 태극기를 제작하여 은율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하는 등 민족운동에 앞장 섰습니다. 백기완은 백범 김구 선생과도 깊은 인연이 있었습니다. 백범 김구는 1898년 치하포 사건으로 인천 감리서에 수감되었다가 탈옥했었는데, 황해도 은율 땅을 몰래 지났을 때 백기완의 조부 백태주가 백범을 자신의 집으로 피신시키고 극진히 돌봐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해방 후 그의 부친 백홍렬이 그를 데리고 서울로 가서 백범을 만나게 되었고, 그때부터 그는 백범을 따르게 됩니다. 백범 또한 그를 좋아해서 그가 즐겨 읊던 한시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를 휘호로 써서 주기도 하고, 중학교까지 학비를 대주리라 약속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백기완은 백범 김구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백기완은 재야운동가로 1960년대 한일협정 반대 투쟁을 계기로 민주화운동에 투신했습니다. 그 후 3선 개헌반대와 유신철폐 등 민주화운동에 많은 활동을 했으며, 1974년 유신헌법 철폐 100만인 선언 운동을 주도하여 긴급조치 1호 위반혐의로 1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75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습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열린 제13대 대통령선거 당시 재야운동권에 독자 후보로 추대돼 선거에 입후보 했지만 야권후보 단일화와 군부독재 종식을 촉구하면서 중도사퇴했습니다. 5년 뒤인 1992년 제14대 대통령선거에서도 재야 운동권의 독자 후보로 추대돼 출마했지만 낙선했습니다. 지난 2020년 1월 폐렴 증상으로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해 투병생활을 이어가다 2021년 2월 15일 오전 향년 88세로 별세했습니다.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는 어떤 뜻일까요? ‘묏비나리’는 1979년 YWCA 위장결혼식 사건의 주모자로 수감된 백기완이 서울 서대문구치소에서 쓴 15장의 장편시입니다. ‘묏비나리’의 ‘묏’는 묘지, 산소(봉분)를 뜻하며, ‘비나리’는 축원, 기도, 굿판을 뜻합니다. 즉 ‘묏비나리’는 ‘죽음의 굿판’이라는 뜻입니다. ‘묏비나리’는 죽음을 미화하고, 선동하고, 군대와 남한 정권을 비하하며, ‘죽음을 불사하고 투쟁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묏비나리’라는 시에 나오는 주요 용어를 살펴 보면, ‘목숨을 걸어라’, ‘죽음을 두려워 마라’, ‘죽음, 들개, 살점, 해골바가지’, ‘죽이려는 자’, ‘모진 채찍’, ‘꿈틀대다.’, ‘치켜뜬 눈’, ‘군바리’, ‘꼬꾸라지고’, ‘분단의 벽’, ‘제국의 불야성’, ‘해방’,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산자여 따르라’, ‘사람을 산채로 키워서 신경과 경락까지 뜯어 먹는 건 바로 이 세상 남은 마지막 짐승 가진 자들의 짓이라⋯’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를 1992년 간첩혐의로 수감되었던 황석영이 개사를 해서 1982년에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작사했습니다. 황석영이가 광주에서 만든 연극단체 ‘광대’는 종북 단체의 선전선동 단체가 되었습니다. 연극단체 ‘광대’에서 활동하던 김종률은 전남대 출신으로 제3회 MBC대학가요제에서 ‘영랑과 강진’을 불려서 은상을 수상한 경력도 있습니다. 그가 1982년에 舊 소련의 T34 탱크부대의 군가를 표절하여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작곡했습니다. 1980년에 사망한 고(故) 윤상원 씨와 1978년에 사망한 故 박기순 씨의 영혼결혼식을 1982년에 했습니다. 이 결혼식에서 ‘윤상원을 기린다’고 하면서 5·18 민주화운동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1970년대 말부터 광주의 극회 광대에서 활동하던 문화 운동 관련자들이 모여 지하방송 ‘자유 광주의 소리’를 창설하기로 하고 첫 작품으로 만든 음악극 「넋풀이 굿(빛의 결혼식)」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넋풀이 굿」은 박기순과 윤상원의 영혼결혼식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임을 위한 행진곡」은 고인이 된 두 남녀가 저승으로 가면서 ‘산 자’에게 남기는 마지막 노래로 배치되어 있으며, 이후 민중가요의 가장 대표적인 양식으로 자리매김 되었습니다. 1980년대 말부터 이 노래는 민주화운동 집회를 시작할 때 민주화운동의 열사들에게 바치는 묵념과 함께 불리는 노래가 될 정도로 한국 민주화운동을 대표하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김대중 정부 이후 5월 18일이 국가 기념일로 지정된 이후 이 노래는 기념식장에서 공식적으로 제창되었으나 2010년과 2013년 국가보훈처가 기념식에서 이 노래를 빼려다 유족들의 반대에 부딪치는 사건이 발생했고, 2013년 6월 국회에서 이 노래를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공식 추모곡으로 지정하자는 결의안이 통과되었으며, 제19대 문재앙때 2017년 5월 12일 37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할 것을 국가보훈처에 지시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님을 위한 행진곡’으로 알려졌으나, 표준어 규정에 따라 최근에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고 부릅니다. 종북 빨치산에서 전사를 양성하는데 광주에 양성된 남민전 전사 3명이 윤한봉, 김상윤, 김남주입니다. 김남주는 공작금으로 광주에 ‘녹두서점’을 개업했는데, 이 서점이 종북단체의 아지트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파리코뮌 강의를 하면서 종북 전사를 양성했습니다. 여기서 양성된 남민전 전사가 윤상원∙이학영∙박석률 등입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처음 만들어질 때 영혼결혼식의 신랑 윤상원은 광주지역에서 활동하던 남민전 전사입니다. 그는 서울에서 다니던 직장을 6개월 만에 퇴사하고 1978년 10월 아세아자동차 바로 옆 공장에 위장 취업을 했으며, 1980년 4월 김대중 지원단체의 사무국장이 되었습니다. 1980년 5월 18일 폭동과 광주시민 선동에 관여하고,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에서 새벽 2시에 칼에 찔려 죽은 뒤 불에 태워졌습니다.(간첩의 소행으로 의심) 영혼 결혼식의 신부 박기순은 역시 종북 남민전의 여전사이고, 1978년 전남대 3학년때 좌빨 활동으로 퇴학당하고, 아세아자동차 옆 한남 플라스틱 공장에 위장 취업했으며, 1978년 12월 26일 오빠 박형선의 집에서 자다가 연탄가스로 사망했습니다. 종북 남민전의 윤한봉이 5.18 재단 설립자인데, 그의 여동생이 박기순의 오빠 박형선의 부인입니다. 윤한봉은 518 재단의 설립자가 되어 518폭동 훨씬 전 1978년 12월 26일에 연탄가스로 죽은 자기 여동생의 시누를 1급 518 유공자로 만들었습니다. 1989년 북조선의 김일성이 황석영과 윤이상을 북조선으로 입북시키고, 5∙18을 이용하여 대남 선전선동에 쓸 영화제작을 하라고 했습니다. 황석영이가 시나리오를 쓰고 윤이상이가 영화음악을 만들어서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를 김일성에게 바쳤습니다. 이 영화의 주제곡이 ‘임을 위한 행진곡’이고, 이 영화에서 ‘님’은 ‘김일성’을 뜻합니다. 그래서 북조선과 종북 단체에게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김일성에 대한 충성의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백기완이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을 향해, 처절하게 절규하며 죽음의 춤판에 앞장서라는 요구는 무엇을 위한 민중 투쟁이며, 누구를 위한 해방이고, 누구를 위한 죽음입니까? 이러한 배경을 가진 노래를 목청껏 합창하는 우파 정치인들은 대가리가 비었거나 우파 행세하는 골수 좌파들입니다. 왜 김대중의 종북 좌파들과 김영삼의 민주팔이 좌파들이 국가 행사에서 애국가를 부르지 않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이유를 아시겠죠?
    • 주요뉴스
    2023-06-07
  • 차석호 칼럼,"ChatGPT는 만능이 아니다"
    ChatGPT는 만능이 아니다 GPT-3.5 기반의 ChatGPT가 등장하자 많은 사람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ChatGP와 채팅을 통해 주고받은 답변을 보면 인간이 하는 것과 거의 유사했다. ‘Who is the famous Korean football Player?’이라는 질문을 했을 때 ChatGPT는 ‘Son Heung-min’이라고 답했다. 게다가 손흥민이 왜 가장 유명한 한국인 축구선수인지 그 근거도 같이 제시했다. 이 정도면 인간이 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것만 보면 인공지능이 인간과 비슷한 능력을 갖춘 것 아니냐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No’다. ‘가장 유명한 한국인 축구선수가 누구냐?’는 질문에는 ‘손흥민’이라는 답과 그 근거를 제시했지만 ‘How do you think about Son Heung-min?’이라는 질문에는 ‘As an AI language model, I don't have personal thoughts or emotions’ 즉, ‘인공지능 언어 모델로서, 나는 개인적인 생각이나 감정이 없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리고 뒤에 오는 문장은 손흥민에 대한 정보들이지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다. ChatGPT가 답했듯이 인공지능은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질문 말고 다는 질문은 어떻게 답할까? ChatGPT에게 ‘What is the best fast food restaurant?’이라는 질문을 했을 때, ‘As an AI language model, I do not have personal preferences or opinions.’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답변을 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인공지능 언어 모델로서, 나는 개인적인 선호나 의견이 없다‘라는 말이다. 그 뒤에는 ‘However, some of the most popular fast food chains globally are McDonald's, KFC, Subway, Burger King, and Taco Bell.’이라고 나온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페스트푸드 체인을 이야기한다. 이처럼 개인적인 취향을 묻는 질문에는 ChatGPT가 제대로 답변하지 못한다. 이런 이유는 기본적으로 인공지능이 인간처럼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은 학습된 빅 데이터에서 자료를 가져올 뿐 자신만의 생각이 없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나만의 생각이 있어야 내 생각, 내 의견, 내 취향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100명의 사람에게 취향을 물어보면 100개의 답이 나오지만 인공지능은 100개의 기계가 있으면 동일한 답이 나온다. 이런 것을 보면 ChtGPT는 놀라운 것이긴 하지만 맹신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 주요뉴스
    2023-06-07
  • 강석종 칼럼,이슬람(아프칸) 난민을 수용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이슬람(아프칸) 난민을 수용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탈레반에 점령당한 아프간에 엄청나게 많은 피난민들이 탈출하고 있어서 최근 미국이 아프간 난민들을 미군기지에 수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이미 파키스탄에 3백만명, 이란에 2백만명의 아프간 난민이 있고, 영국 가디언 등에 따르면 하루에 3만여명이 아프간을 떠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아프간 난민들을 수용하지 못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나라들이 늘고 있습니다. 이슬람 국가인 터키의 에르도안 대통령 조차 “유럽 위해 아프간 난민 떠맡을 수 없다”고 했으며, 그리스는 아프간 난민을 차단하기 위해 터키 국경에 장벽을 설치했습니다. 러시아의 푸틴도 “아프간 난민, 중앙 아시아 유입을 반대한다”고 했으며, 오스트리아 총리도 “아프간 추가 수용 안 한다”고 했습니다. 왜 많은 나라들이 아프간 난민을 거부하는지 그동안 이슬람 난민을 받았던 나라들의 실상을 보면 그 이유를 알 것입니다. 프랑스에서는 무슬림 난민 출신 ‘갱’들이 달리는 버스 안에서 물품을 훔쳐 가고, 가게를 때려 부수기도 했습니다. 2016년 독일 쾰른에서는 1,000여명의 무슬림 난민들이 행인들을 대상으로 성폭력, 강도, 절도, 폭행 등의 범죄를 일으켰습니다. 이처럼 무슬림 난민들이 유럽에서 엄청난 물의를 일으켰던 모습을 봤던 유럽 국가들에서는 난민 반대 공약을 하는 것이 요즘 대세라고 합니다. 아프리카 가나에서도 많은 난민들을 받아서 지원도 해주고, 모든 걸 줬지만 열심히 일하지도 않으며, 그들에게 잔류와 귀국의 선택권을 줬더니 포풀리즘 공짜 혜택 때문에 대부분 잔류를 선택했습니다. 유럽 뿐만 아니라 일본도 난민을 절대로 받지 않고, 돈으로 해결했습니다. 난민 자격을 줄 경우 그들이 범죄를 일으켰을 때 난민 자격을 박탈하려면 국제사법 재판소의 승인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족은 DNA 검사 후 가족으로 인정했습니다. 아프간을 장악한 이슬람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 탈레반이 한국과 경제협력과 교류를 희망한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탈레반 주도의 아프간 새정부가 한국은 물론, 전 세계로부터 아프간의 합법적 대표 정부로 인정받길 원한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2000년대 후반 샘물교회 납치 사건이나 고 윤장호 하사 폭탄 테러 사건 등 과거 한국과의 ‘악연’에 대해서는 명확히 사과하지 않았으며,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답변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슬람교는 자기들 종교 외에 다른 종교인들과 무신교들을 많이 죽이면 죽일수록 알라에 충성한다고 믿는 사람들이라 사람 죽이는 데는 아무런 죄책감을 가지지 않습니다. 이들은 또한 자살 폭탄 테로로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가르치고 있으며, 자살 폭탄을 추켜 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 한국, 중국 중에서 한국이 유일하게 이슬람 확대 타켓이라는 말을 이미 들어 봤을 것입니다. 이슬람 사원을 세우게 하고, 할랄 식품 공장을 세우게 하고, 영주권을 주고, 중국과 이슬람의 침투 공작을 깨닫고 이들의 유입을 막아야 합니다. 2019년 11월 기준으로 외국인이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은 110개국에서 20만명을 돌파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코로나 이전에 아프간인들이 4만여명이나 살고 있었으나 지금은 1만여명 정도 살고 있습니다. 아프간에서 귀화한 사람도 있습니다. 2년 전에는 예멘인들을 수용시켜 지금 제주도에 살고 있으며, 또 아프간 난민이 평택에 살고 있습니다. 이제 세력을 키울 일만 남은 듯 합니다. 영국에서 선교사 활동을 했던 유해석 박사는 “영국의 이슬람화 연구는 미래 한국의 이슬람 성장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된다”며, “앞으로 영국이 유럽 이슬람의 중심지가 된다”고 진단했습니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은 옥스퍼드 대학 인구학자인 데이비드 콜먼 교수의 발표를 인용하여, “2066년에는 백인이 소수민족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이슬람들이 행하는 동영상도 봤을 것입니다. 정말이지 무슬림들은 너무나 소름 끼치도록 무섭고 잔인합니다. ‘어찌 인간으로서 그럴 수가 있을까?’ 할 정도로 정말 충격 중의 충격입니다.이러한 말을 듣고도, 동영상을 보고도 이슬람 난민들을 받아 들이자는 말이 나올 수 있을까요? 지구상에 있는 나라는 모두 몇 개일까요? 유엔 기준으로는 195개국이지만, 올림픽 기준으로는 206개국이며, 월드컵 기준으로는 211개국입니다. 그리고 국제표준화기구(ISO)의 국가 약호 목록에는 249개국이 등재돼 있습니다. UN에 가입한 회원국 195개국 중에서 우리나라는 세계 국토 면적 대비 107위입니다. 우리나라보다 땅덩이가 넓은 나라가 106개국이나 있습니다. 그런 나라들 중에서 미개발한 곳도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태평양에는 수많은 무인도도 있습니다. 그런데 뭐 때문에 이렇게 좁은 땅덩어리를 가진 우리나라에 아프간 난민들을 보내려고 하는가요? 차라리 UN의 지원하에 미개발 지역이나, 태평양에 있는 무인도로 보내서 그런 곳을 개발시켰으면 합니다. 좋은 마음으로 이슬람을 받아 들였지만 이슬람에 먹혀 가는 유럽 꼴이 나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귀순 의사 밝힌 탈북자들의 눈을 감기고 손을 묶어서 북조선에 돌려 보냈던 것은 인도주의 차원이었습니까? 서해에서 북조선에 사살되어 화장시킨 자국민에 대해서는 항의 한 마디 못 하면서, 미군조차 대한민국은 지리적으로 난민 수용에 부적합하다며 난민 수용 계획을 폐기한 상황에서 군 수송기까지 파견해서 언어와 문화와 종교 등 이질적인 중동 난민을 데려 오는 문재앙 정부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쇼 하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한 모양입니다. 그 속내가 자뭇 궁금합니다.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유일하게 난민법을 시행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2013년 7월 법 시행 후 지난 7월까지 약 7만여명의 난민 신청자가 몰리는 난민 천국이 되었습니다. 난민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독일과 스웨덴 등 유럽 국가들에서는 난민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으며, 난민을 수용했던 레바논은 종교전쟁의 내전도 겪었습니다. 최근 프랑스에서는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한 후 프랑스 대사관 직원들의 이동 과정에서 도움을 줬다는 공로로 아프간 난민을 데리고 왔는데, 이들 중 5명이 탈레반과 연계되었다는 증거가 포착되면서 프랑스 사회가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우리나라도 우리나라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데리고 온 400여명의 아프간인 중에서 탈레반과 연계된 사람이 과연 없을까요? 이들이 난민 신청만 해도 1인당 최소 약 20만원에서 최대 140만원(5인 가구)에 달하는 생계지원금이 6개월간 우리 국민들의 피같은 혈세가 지출됩니다. 이들을 데리고 온 비용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제외하고 이들의 6개월간 정착지원금만 계산해 봅시다. 400명 ÷ 5인 가구 = 80가구 × 140만원 = 1억 1,200만원, 매월 1억 1,200만원이 들고, 이들의 6개월간 정착지원금이 1억 1,200만원 × 6개월 = 6억 7,200만원이 된다. 결국 6개월간 정착지원금만 약 7억원이라는 것이다. 이들을 특별 공로자로 대우한다고 했으니, 더 많은 추가 비용이 발생할 것이고, 심사를 거쳐 영주권도 주고, 한국인처럼 사회보장제도 적용 대상이 됩니다. 6개월 이후에는 또 얼마나 많은 국민의 혈세를 지출해야 할까요? 동아시아 지역에 탈북인들이 약 30만명 정도 있다고 하는데, 이들은 데리고 오지도 않으면서 종교도 문화도 언어도 완전히 다른 이슬람 난민들을 단지 인도주의적인 이슈로 수용한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차라리 동아시아 지역에 있는 30만명의 탈북인들을 데리고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지난 번에 탈북민 모자가 굶어 죽은 일도 잘 알 겁니다. 이미 정착한 탈북인들이 굶어 죽지 않도록 정부는 세심하게 살펴서 도와야 할 것이 아닙니까? 탈북인들은 대부분 식당에서 일하는데, 코로나 때문에 식당이 영업을 안하니까 일 자리가 사라졌는데, 저들을 데리고 올 돈이 있으면 북조선에서 목숨 걸고 탈출한 이들을 도와 줘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 주요뉴스
    2023-06-06
  • 애국은 행동하는 것이다.
    애국은 행동하는 것이다. 내일은 현충일입니다. 현충일은 어떤 날입니까? 국토방위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의 충성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 날은 호국영령의 명복을 빌고 순국 선열 및 전몰 장병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위훈을 추모하는 행사로 조기를 게양합니다. 국가가 존재하는 데에는 상당한 전란을 거치게 되어 있고, 모든 국가는 그 전란에서 희생된 자를 추모하는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1948년 8월 정부 수립 후 2년도 채 못 되어 한국전쟁을 맞았고, 이에 40만명 이상의 국군이 사망하였으며, 백만명에 달하는 일반 시민이 사망하거나 피해를 입었습니다. 1953년 휴전이 성립된 뒤 3년이 지나 어느 정도 자리가 안정을 찾아 가자 정부는 1956년 4월 대통령령 제1145호로 「관공서 공휴일에 관한 건」을 개정하여 매년 6월 6일을 현충기념일로 지정하여 공휴일로 하고 기념행사를 가지도록 했는데, 현충기념일은 통상적으로 현충일로 불리다가 1975년 12월 「관공서 공휴일에 대한 규정」이 개정되어 현충일로 공시적으로 개칭되었습니다. 1982년 5월 「각종 기념일에 관한 규정」에 의해 법정기념일이 되었습니다. 행사는 국가보훈처가 주관했는데, 이제는 국가보훈부로 승격되었습니다. 서울에서는 국립묘지에서 시행되고 있습니다. 추모대상 범위는 한국전쟁에 전사한 국군만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니라,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 모든 선열의 넋을 기리고 있습니다. ‘애국(愛國)’이라는 말의 한자어는 ‘사랑 애(愛)’와 ‘나라 국(國)’입니다. 즉 ‘나라 사랑’이라는 말인데, 이 나라는 어떤 나라를 말하는 것이며, 이 나라는 언제 세워졌으며, 누구에 의하여 세워졌습니까? 대한민국 건국의 시작과 자유민주 통일의 염원은 1946년 6월 3일 이승만 전 대통령의 ‘정읍 선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이승만 박사의 정읍 발언은, 유엔의 감시 하의 자유 총선거를 통해 한반도에 통일 독립된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구상은 미국의 공감을 얻었으며, 유엔총회도 이 안을 받아들여 1948년 5월 10일 유엔감시 하의 자유 총선거를 통한 정부 수립안을 가결했습니다. 그러나 소련은 이미 북조선을 동유럽처럼 위성국가로 만들기 위해 지령을 내렸으며,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만들어졌으며, 토지개혁, 화폐 발행, 군대 창설 등 국가 기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련이 북조선을 위성 정권으로 만든 것이 탄로 날까봐 유엔감시위원단의 북한지역 방문을 거부하고, 자유총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공산당의 4.3 제주폭동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격렬한 선거방해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전체 유권자의 3분의 2가 참가하는 선거를 통해 198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하였으며, 헌법을 제정하였으며, 대통령선출 등의 수순을 밟음으로써 건국과업을 완료했습니다. 1948년 7월 20일 제헌 국회에서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로,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선거를 통하여 국가원수를 뽑았습니다. 제헌 헌법에 따르면, 대한민국 대통령과 부통령은 지금과 같은 형태의 직선제 즉, 국민의 직접선거가 아니라, 국민들이 직접 뽑은 국회의원들의 투표로 선출되는 간선제 즉 간접 선거였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미국의 방식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대통령 선거에 재적의원 198명 중 196명이 참여해 91.84%인 180표로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부통령 선거에는 197명이 참여해 2차 투표에서 67.51%인 133표로 이시영이 당선되었습니다. 이 나라는 언제 세워졌습니까?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은 되었으나 북쪽은 舊 소련군이, 남쪽은 미군이 들어와 군정을 펼쳤습니다. 이후 미국은 카이로선언과 얄타협약에 따라 한반도에 단일 독립 정부를 세워주려고 했으나 舊 소련이 현재의 분단상태에서 분할통치할 것을 고집하여 ‘미소공동위원회’를 만들어 이 문제를 6섯 차례에 걸처 논의했으나 합의를 보지 못하자 미국은 이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했고, 유엔에서는 남북한 인구비례에 의한 자유 선거를 실시하여 단일 독립국가를 건국하도록 의결하였습니다. 그러나 舊 소련의 거부로 북쪽에는 유엔 선거감시단이 입국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거가 가능한 남쪽에서만 1948년 5월 10일 선거를 실시하여 국회의원 198명(정원 300명. 남측200, 북측 100명. 그러나 북측 100명과 제주도 2명은 선거 미실시)을 뽑아 헌법을 만들고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시영을 선출하고 조각을 하여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유엔은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 유일 합법 정부로 인정하였습니다. 1948년 7월 20일 국회에 의해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4일 후인 7월 24일에 당시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던 중앙청 광장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미군정 통치는 마감되었습니다. 1948년 8월 15일 드디어 대한민국이 건국되었습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철저한 반공으로 대한민국은 건국되었음을 전 세계에 알리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기조(基調) 위에 세워진 나라가 조상 대대로 살아온 우리의 조국(祖國) 대한민국입니다. 해방되어서 우리는 비로소 ‘자유’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77년 동안이나 자유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자유를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정치적 자유만 있으면 다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굶어보니까, 정치적 자유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6·25 사변을 통해 나라의 경제가 다 무너졌습니다. 모든 백성이 다 굶주리게 되었습니다. 경제적 자유가 없으면 정치적인 자유도 소용이 없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탄생한 100여개 신생독립국 중의 하나입니다. 그 100여개 신생국가 중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함께 이룩한 나라는 어느 나라인 줄 아십니까? 그 나라는 바로 제가 태어난 나의 사랑하는 조국 대한민국입니다.우리 대한민국은 이승만 대통령이 1948년 8월 15일 세운 나라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에 그 어떤 나라에도 없는 건국 설계도를 그렸습니다. 국부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4대 기둥(건국 이념) 위에 세웠습니다. 이 4대 기둥은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 한미동맹, 기독교 입국론입니다.대한민국에 태어난 5천만 국민들은 절대적으로 이승만의 혜택을 본 사람들입니다.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세우지 않았다면 우리는 북조선 김일성 수령님을 모시고 살아야 했습니다. 우리가 자유민주주의 할 때 북조선은 공산주의를 시작했으며, 우리가 자유시장경제를 할 때 북조선은 사회통제경제를 했으며, 우리가 미국을 친구로 삼아 한미동맹을 했을 때 북조선은 중국을 친구로 삼아 조중동맹을 했으며, 우리가 기독교 입국론을 했을 때 북조선은 김일성 주체사상(주사파)을 했습니다.대한민국은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 설계도대로 박정희 대통령이 집을 지은 결과 우리는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나라는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우리의 주적은 북쪽에 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즉 북조선입니다. 그러나 이 나라에는 북조선을 위하는 자들, 다시 말하면 주적인 북조선을 이롭게 하는 이적 단체나 개인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 들 중에는 대통령을 지낸 사람도 몇 명이나 있습니다. 문재앙은 2019년 현충일 추념사에서 “현충원은 살아 있는 애국의 현장”이라고 말했으며, “약산 김원봉이 이끈 조선의용대가 광복 후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되고, 한미동맹의 토대가 됐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김원봉은 1948년 월북해서 그해 8월 북조선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되었고, 같은 해 9월 국가검열상에 올랐으며, 6∙25 전쟁 때는 ‘군사위원회 평북도 전권 대표’와 ‘노동상’(장관)으로 활동하며, 6∙25전쟁에서 세운 공훈으로 북조선에서 훈장까지 받았으며, 당시 북조선 정권의 요직을 지낸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입니다. 문재앙은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였던 지난 2015년 8월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도 “광복 70주년을 맞아 약산 김원봉 선생에게 마음속으로나마 최고급의 독립유공자 훈장을 달아 드리고 술 한 잔을 바치고 싶다”고 했습니다. 또한 지난 4월 5일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국회에 입성한 지 44일된 진보당 강성희(전북 전주시 을) 의원이 5월 22일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 후보 청문회에서 이승만 건국 대통령을 향해 “내란 목적 살인죄를 저지른 범죄자”로 몰며 “내란의 수괴를 기념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날 더불당 소속의 김성주 의원과 김병원 의원들은 ‘민주주의 유린자’, ‘부정선거로 쫓겨난 독재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재명 대표는 대통령 후보 당시 서울 국립현충원을 찾았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 매국 세력의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지금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대한민국에 3대 암덩어리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민노총, 전교조, 민주당입니다. 북조선에서는 연일 미사일을 쏘아 대고, 핵으로 위협을 합니다. 내부에는 간첩들이 득실거립니다. 간첩이 숨어 있는 민노총에는 대규모 집회로 사회 혼란을 선동하고 있고, 전교조에서는 학생들을 ‘홍위대’로 세뇌하고 있습니다. 민주당에서는 부정부패와 코인 투기 등 간첩 사건에는 침묵합니다. 북조선 정찰총국 정보부 소속 출신의 최고위층 탈북자 김국성 대좌는 말하기를 “‘남조선 정치예속화’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문재앙 정부 때 봤듯이 좌파단체가 자유·민주·인권 등을 가지고 투쟁하는 것으로, 물밑에는 대남기관이 알게 모르게 작동한다. 이것이 바로 정치예속화의 주춧돌이다. 지하공작과 공식적인 통일전선사업의 병행은 정치예속화를 위한 대남전략의 기본이다. 남한 사회의 좌우로 갈라진 이념 갈등, 사회갈등, 빈부격차 등은 대남공작의 전술이다.남한 시민단체 상당수가 북에 장악되었다. 민주조선, 자주시보, 김정은 연구위원회, 주체사상연구위원회 등 우리 동포돕기 운동 및 우리 민족끼리 구호를 내는 수많은 단체들은 북한이 추구하는 대남전략에 부합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남한은 집회·시위·결사·표현의 자유를 가진 사회이다. 북한 정보기관에는 남조선 법률연구소가 있다. 남한에서 가장 합법적인 대남공작 투쟁방법을 찾고 연구하는 비밀기관이다. 남한 헌법에 딱 맞는 방법을 찾아 공작하고 투쟁하니 남한 정부도 어찌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민주당에서는 합법적으로 공산화를 시도하고 있는데, 그것은 북조선의 ‘남조선 정치예속화 전략’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좌파나 진보나 종북 주사파를 지지하는 세력들에 의해서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의 4대 기둥이 흔들리고 있으며, 침몰 직전에 있습니다.좌파와 진보와 종북 주사파들이 주장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 곧 공산주의로 가자는 것이며, 자유시장경제가 아니라 국가가 균등하게 분배하는 배급 경제로 가자는 것이며, 한미동맹이 아니라 조중동맹으로 가자는 것이며, 기독교 입국론이 아니라 기독교를 적폐세력으로 몰아 박해 및 박멸을 주장하고 있습니다.대한민국을 부정하고, 대한민국의 헌법을 부정하고, 김일성이 하자는 대로 하는 이들이 주사파입니다. 문재앙 정권 5년동안 이 나라는 바로 북조선과의 낮은 연방제 통일 국가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 전 단계로 사회주의 국가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동안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자유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모든 국민들이 똘똘 뭉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막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켜서 대한민국을 더 위대하게 하며, 모든 벽을 초월하여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애국 운동에 하나가 되어서 내년 총선에서 압승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유의 가치를 지키고, 흔들리는 대한민국 4대 기둥을 바로 세우는 국민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보여 줘야 합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더 공고해진 자유를 바탕으로 더 굵고 튼튼한 기둥을 세워, 희망찬 미래의 ‘예수 한국, 복음 통일’로 통일 한국을 준비해야 합니다.
    • 주요뉴스
    2023-06-05
  • 차석호 칼럼,"ChatGPT를 능동적으로 활용하려면"
    ChatGPT를 능동적으로 활용하려면 ChatGPT는 ‘양날의 검’입니다.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약이 될 수도 있고,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ChatGPT가 나에게 약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사용해야 될까요? ChatGPT를 사용하기 전에 ChatGPT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만든 것이라 단점 또한 존재합니다. ChatGPT가 만능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는데, ChatGPT는 결코 만능이 될 수는 없습니다. 또한 ChatGPT 사용에는 표절 이유가 항상 따라다닙니다. 학교에서 ChatGPT로 과제를 했다가 0점 처리당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ChatGPT를 활용하면 분명 편리한 점은 있지만 부작용 또한 따라다닙니다. 그래서 ChatGPT는 능동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나에게 약이 되는 것입니다. ChatGPT가 약이 되기 위해서는 ChatGPT를 활용하되 이것을 나만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은 창의력과 연결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과 동물, 인간과 인공지능을 구분 짓는 가장 큰 것이 창의력입니다. 창의력은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것을 응용해서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닙니다. 기존의 것을 가지고 재해석해서 나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창조입니다. 창조는 ‘다르게 생각하는 것’에서 나옵니다. ChatGPT가 답변을 제대로 못 하는 부분이 생각, 의견, 취향, 경험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라면 쉽게 답을 하고, 100명에게 묻는다면 100가지 답이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ChatGPT는 기계 100개가 있으면 동일한 답을 합니다. 이것이 인간과 인공지능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ChatGPT는 기본적으로 빅데이터에 있는 것을 가지고 와서 답변을 해 줍니다. 아무리 우리가 디테일하게 질문을 한다고 해도 그렇습니다. 이 말은 나만의 방법을 찾아주는 것이 아니라 빅데이터에 있는 것을 그냥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초보적으로 ChatGPT를 활용하는 방법입니다. ChatGPT를 활용해 자료를 찾고 그것을 바탕으로 매 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만의 방법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ChatGPT는 주관을 가지고 사용을 해야 합니다. ChatGPT는 양날의 검입니다.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참고는 하되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체조 금메달리스트 양학선 선수가 여홍철 선수의 여2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기술인 양1을 만든 것처럼 기존의 것을 바탕으로 해서 나만의 것을 만들어야 합니다.
    • 주요뉴스
    2023-06-02
  • 강석종 칼럼,"지구에서 사라질 위기의 대한민국! 출산이 국력이다."
    지구에서 사라질 위기의 대한민국! 출산이 국력이다. ‘가정의 달’이라는 5월이 다 가기 전에 이 문제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지구온난화로 바다 수위가 점차 높아져 가고 있어서 많은 나라의 국민들이 불안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유엔기후변화정부간위원회(IPCC) 분석에 따르면, 지구 온도가 2도만 올라도 ‘마셜제도’는 통째로 사라지게 됩니다. 이미 일부 작은 섬 지역은 해수면 아래에 잠겼고, 마셜제도의 주민들은 ‘기후 난민’이 돼 살 곳을 찾아 미 아칸소주 스프링데일에 정착한 인구가 전체의 15%인 1만명에 달합니다. 마셜제도처럼 사라질 위기에 처한 국가는 44개국이 넘습니다. 남태평양의 섬나라 ‘키리바시’는 30∼60년 후 지도상에서 사라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으며, 인근 섬나라 ‘투발루’는 9개 섬 가운데 벌써 2곳이 바다에 잠겨 정부는 국토 포기를 선언했습니다. 전체 국토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기까지는 40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호주 서부의 해수면 상승 속도도 전 세계 평균의 2배 정도로 빠릅니다. 세계변호사협회에 따르면 2050년까지 최소 2억명의 기후 난민이 지구촌을 떠돌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세계 각국은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 수준을 올리고 있습니다. G7(주요 7개국) 정상들은 독일에서 정상회의를 갖고 글로벌 탄소 배출량을 2050 년까지 현재의 40∼70% 수준까지 줄이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기후변화가 아니라 저출산과 고령화로 “지구에서 제일 먼저 사라질 나라”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왜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을까요? 첫째는, 우리나라에 저출산 위기를 악용하는 저출산 유도 세력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저출산 위기가 찾아 온 것은 그동안 좌파 정부의 급진 페미니즘 정책에 의해서 초래된 사회현상입니다. 급진 페미니즘은 ‘남성, 결혼, 가정, 출산, 육아’를 혐오하는 사상입니다. 대신에 ‘프리 섹스, 낙태, 레즈비언으로 살기’를 주장합니다. 이들은 가족제도가 여성 억압의 원인이라고 보기에 전통적인 가족을 해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가족제도를 약화시키고 소멸시키는 ‘다양한 가족 형태’를 주장합니다. 즉, 저출산 원인 제공자의 가족 폐지 전술이 저출산 극복대책으로 선전되고 있는 꼴입니다. 페미니즘의 아버지라 불리는 ‘에릭 프롬’은 사회주의자인 프랑크푸르트학파입니다. 급진 페미니즘의 선두주자인 여성들도 대개 마르크스주의자나 사회주의자였습니다. 냉전시대에 서구에서 공산주의를 말하기 어려웠고, 프랑크푸루트 학파는 미래 소련과의 만남을 기다리며 그동안 서구 국가들은 약화시키는 전술을 고안했습니다. 그것을 ‘권리(인권)’라며 학생들에게 신념화시키고 행동하게 합니다. 학교 교육이 대량 복제의 장소였습니다. 68운동이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폭력 운동(폭력 시위, 테러, 도시 게릴라)뿐 아니라 문화 운동(전통적 사회를 해체하고 새로운 사회 만들기)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즉, 여기에서 나온 성 해방이나 급진 페미니즘, 낙태, 전통 가치와 제도의 해체 등은 망국의 전술이라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체제를 전복하려 하던 사회주의자, 친북 공산주의자 68운동은 훌륭한 전술지침이 되었습니다. 3당 합당으로 우파 정당마저 그들과 혼합되면서 한국은 그것에 대한 대응세력이 점차 쫓겨나면서 현재의 상황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저출산 국가소멸론까지 나온 겁니다. 저출산 극복의 해법을 그들이 배운 ‘다양한 가족 형태 전술’에서 찾는다면 이런 바보가 없을 겁니다. 저출산위원회를 만들어 놓고 페미니스트들이 주도하게 한 결과 수백조 원의 돈을 써도 효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페미니스트들의 진지 구축 비용이였던 것입니다. ‘서울 경제’의 기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프랑스가 1999년 도입한 ‘팍스(PACS)’는 결혼이 아닌 생활동반자 관계를 법적으로 보장하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프랑스의 비혼 출산율은 1998년 41.7%에서 2012년 56.7%로 증가했고, 2020년에는 62.2%를 기록했습니다. 현재 팍스 제도를 통해 결합한 관계의 90% 이상이 이성 간 결합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 위 기사에서 1999년 시민연대계약(팍스)이 도입되기 전에 이미 혼외 출산율이 41.7%였다는 점이 포인트입니다. 왜 혼외출산율이 높아져서 사회적 문제를 만들어 냈는가에 원인파악을 해야 하는 것이죠. 급진 페미니즘의 제도화로 이혼시 남성들은 재산분할과 양육비 지급 등으로 부담이 증가했고, 그래서 혼인을 거부하였고, 동거상태로 지냈습니다. 부부의 의무를 배격하는 페미니즘과 성해방 사상의 확산도 평생을 함께 한다는 부부, ‘가족이란 운명적이다’는 믿음을 잃게 했고, 만나다가 질리면 부담없이 헤어질 관계로 남녀관계를 생각하게 되면서 재산분할, 양육비 부담을 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 부담을 없게 하는 ‘팍스’라는 제도가 도입되자 남자들은 혼인을 줄이고 ‘팍스’를 선택하는 비율이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혼외 출산율이 더 높아진 것입니다. 급진 페미니즘은 이혼시 여자의 경제적 안정을 위해서 남자의 부담을 늘려왔는데, 혼외 출산율이 늘자 남자의 부담을 배제한 ‘팍스(생활동반자)’라는 제도를 만들어 호응을 받은 것입니다. 결국 페미니즘의 목적인 혼인제도 파괴에 어느 정도 성공한 셈입니다. 이것이 과연 좋은 결과였을까요? (2) 프랑스의 합계출산율은 1999년 1.79명에서 2010년 2.01명으로 뛰었으며, 2020년에도 1.83명을 기록했습니다. -> (2020.10.14.) 프랑스의 전폭적인 출산과 양육 지원 정책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국민들은 아이를 더 낳지 않았으나, 아프리칸 이민자들은 출산 지원 정책 덕분에 본국에서보다도 더 많은 아이를 낳았습니다. 이민자의 출산율은 3.3명이나 되며, 그래서 프랑스의 출산율이 상승한 것입니다. (3) 나영정 가족구성권연구소 연구위원은 “프랑스의 팍스도 이미 동거 커플이 많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도입됐으며 사회에 존재하고 있는 다양한 관계들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사회적인 현상을 규정하는 게 아니라 사회 현상에 맞춰서 정책을 수립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 기사의 통계에서 보이듯이 한국의 혼외 출산율은 2.5%입니다. 1980년도의 2% 내외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유럽은 90년대 혼외 출산율이 수십%가 되어서 ‘아이들을 위해 제도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한국은 아직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회현상이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60년대 사실혼 제도 도입으로 혼외관계에 대해서는 서구보다 일찍 보호를 제공해 왔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법제화는 위의 구차한 명분들 때문이 아니라 평생을 운명공동체로 간다는, 사회의 최소 구성단위인 가족이라는 전통적 가치를 파괴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급진 페미니즘의 아버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에릭 프롬은 가족을 국가의 축소판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공산주의는 국가의 해체를 주장하는데, 국가의 해체의 축소판이 가정의 해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급진 페미니즘(여성단체, 정당, 언론)을 통해 진행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급진 페미니즘이 초래한 저출산 위기를 극복한다는 해법으로 급진 페미니즘의 가족 제도 해체 전술인 ‘다양한 가족 형태’를 제시한다는 것은 사회와 국민들에 대한 조롱과 조소가 아니면 뭘까란 생각이 듭니다. 한국의 젊은 남성들은 위와 같은 국가 페니미즘을 학교에서부터 강요당하면서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한국의 우파 정당과 정권은 국가 페미니즘에 협조해 왔으며, 문제점이 무엇인지 인식도 안 되어 있었습니다. 우파의 주력인 어르신 우파들은 신마르크스주의의 각종 (인권) 전술을 배우지 못했기에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으며, 눈뜬 장님과 같이 문화적으로 사회주의화 되는 것에 당황만 해온 것입니다. 젊은 남성들과 연대를 할 수 있음에도 좌파의 역사를 모르기에 어르신 우파는 그 연결의 가능성조차 몰랐던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좌경화와 몰락을 막으려면 젊은 남성들이 국가에 대해 저주까지 하게 만드는 급진 페미니즘에 대해 우파 어르신들이 눈을 뜨고 연대의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둘째로, 이런 사상에 물들어 있는 당사자들의 현실 문제입니다. 왜 결혼을 하지 않을까요? 적령기 남녀 청년들이 결혼 안 하고도 경제적으로 혼자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남편에게 얹혀 살지 않아도 혼자 먹고 살 수 있고, 성적 욕구도 결혼 않고도 채울 수 있는 길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결혼하고도 왜 아이는 낳지 않을까요? ‘애 키우느라 자기 즐거움은 다 없어지고 애 키울 돈도 집도 없다’는 것이 이유라고 합니다. 애를 왜 하나만 낳느냐? 먹고 살려면 맞벌이해야 하는데 애 봐 줄 사람이 없다. 도우미를 쓰면 300만원까지 월급을 줘야 한다. 애 엄마가 돈 번다고 해도 도우미 월급 주면 아무것도 남는 것 없으니 차라리 직장을 그만 두고 애를 보는 겁니다. 지난 15년간 280조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하고도 현실로 나타난 합계 출산율 0.78명의 초저출산은 가히 재앙이기에 이대로 강 건너 불 구경 하듯이 바라보다가 500년 후인 2500년이면 우리나라는 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입니다. 약 25%의 젊은이가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했습니다. 4차산업혁명 시대를 맞이하여 젊은이들에게 더 줗은 일자리를 만들어 주는 일 그리고 여러가지 결혼방법을 설계해 새로운 길과 희망을 만들어 주는 일을 열심히 하다보면 안 보이던 답도 보이고 길도 보이는 것입니다. 셋째로, 저출산의 해결책은 없을까요? 결혼과 출산 문제의 해결은 인구와 경제가 연관되기 때문에 국가의 가장 큰 미래의 방향으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출산율이 늘어나려면 결혼해야 하는데, 결혼하고도 요즘 출산을 안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구가 늘어나기 위하여 나라에서 노력하고 있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부분이 많은데,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처녀와 총각, 노처녀와 노총각들의 ‘만남의 행사’를 주도하는 무료 중매 사단법인이나, 결혼공사를 지자체나 정부에서 만들어 운영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단법인이나 공사에서 남·여 만남의 단체 행사 시 약간의 정부 비용 보조를 하고, 결혼 비용도 1인당 5천만원씩 지원해 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결혼식과 혼수 문화는 단순하게 할 수 있게 정부 규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결혼하면 주택 전세 대출도 좋지만 필요시 10년 무상 임대아파트의 혜택을 주고, 결혼해 출산하면 25년 무상 임대아파트를 주는 제도를 만들고 임대아파트가 적은 도시는 결혼용 임대아파트는 기존 아파트 재건축이나 신규아파트 건설 시 주거지 용적률 250%를 500%로 상향해 주는 대신 추가로 주는 125%는 신혼 주택 임대용으로 주택 공사가 소유하고 추가 125% 용적률은 기존 주택자에게 주고 임대자가 타 지역으로 이사를 하더라도 기존 임대아파트나 주택 공사에서 남은 거주 기간 동안 임대 혜택을 주는 임대 아파트를 확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기업과 공사직에 기혼자에게 인사고과 +1점이라도 더 주고, 출산자에게는 인사고과에 +5점을 더 주고, 1명 자녀 이상 다자녀에 대하여 자녀 수에 따라 +1점 추가로 주며, 다자녀 부모일수록 부모 모두 직장에서 승진을 더 빨리하고, 미혼일수록 승진이 늦는 제도가 필요합니다. 다 출산자는 군대의 면제 제도 혜택과 급여와 연금도 다자녀 출산자에게 더 주는 제도가 필요합니다. 자녀 교육비가 부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둘째부터 대학 등록금 및 입학금을 장학제도를 실시하면 됩니다. 지난 5월 22일 TV조선 뉴스에서, ‘싱가포르의 가사도우미 월급 90만원 제도를 도입하자’는 국회의원 인터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최저임금 법대로 하면 ‘가사도우미 저임금으로 쓸 수 없다’며 이것이 문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필리핀, 미안마, 베트남, 등 동남아 국가에서 오는 가사도우미들은 말하기를 자기네 나라에서 일하는 것보다 서너배 더 받는 것이고 그들은 가족에게 돈 부치고 집도 사고 얼마나 좋은지 대환영이라고 합니다. 우리 엄마들도 좋고, 도우미들도 좋고, 윈윈 될 수 있어 문제 될 것 없다고 했습니다. 5월 23일자 중앙일보에 의하면 일본도 노동력 부족이 심각하다고 합니다. 일본 생산가능인구가 2022년 7400만명이고, 65세 이상 노인이 인구의 20%를 넘어 초고령사회가 되었습니다. 2019년에 이민청 격인 ‘출입국재류관리청’을 신설하고 적극적으로 외국사람을 받기로 하였습니다. 작년 일본 내 외국인 수가 300만명을 넘었습니다.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이 남한의 부족한 노동력을 채울 수 있을텐데. 남남북녀 결혼도 좋고. 남북통일되면 다 해결되겠지만 통일 전이라도 북한 동포들이 남한에 와서 일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나 결혼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올 수 있는 길을, 죽음을 무릅쓰고 탈북해 오는 길보다 합법적이고 민족 공영의 길을 위해 남북이 의논해 볼 수 없을까요? ‘출산절벽’이라는 말은 정말 가슴을 후벼 파는 슬픈 단어입니다. 아이들은 우리의 미래이고 희망입니다. 아이를 낳는 것은 미래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동안 초저출산 문제에 대해 백화점식으로 나열된 단기 처방에 치중하다 보니 280조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예산만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대한민국은 국회의원만 많았지 밥그릇 싸움하기에 바쁘고, 자기들을 위한 법만 잘 만들어 놓은 이상한 집단입니다. 제발 땜빵식 정책은 하지 말고, 지금이야말로 인구재앙을 대비할 마지막 ‘골든 타임’이라는 마음으로 초저출산 대책과 정책을 새롭게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이대로 계속 가다간 대한민국은 역사 속에서나 존재했던 나라가 될 것입니다. 이제 그 숙제를 함께 해결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 주요뉴스
    2023-06-01
  • 강석종 칼럼,"지구에서 사라질 위기의 대한민국! 출산이 국력이다."
    지구에서 사라질 위기의 대한민국! 출산이 국력이다. ‘가정의 달’이라는 5월이 다 가기 전에 이 문제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지구온난화로 바다 수위가 점차 높아져 가고 있어서 많은 나라의 국민들이 불안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유엔기후변화정부간위원회(IPCC) 분석에 따르면, 지구 온도가 2도만 올라도 ‘마셜제도’는 통째로 사라지게 됩니다. 이미 일부 작은 섬 지역은 해수면 아래에 잠겼고, 마셜제도의 주민들은 ‘기후 난민’이 돼 살 곳을 찾아 미 아칸소주 스프링데일에 정착한 인구가 전체의 15%인 1만명에 달합니다. 마셜제도처럼 사라질 위기에 처한 국가는 44개국이 넘습니다. 남태평양의 섬나라 ‘키리바시’는 30∼60년 후 지도상에서 사라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으며, 인근 섬나라 ‘투발루’는 9개 섬 가운데 벌써 2곳이 바다에 잠겨 정부는 국토 포기를 선언했습니다. 전체 국토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기까지는 40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호주 서부의 해수면 상승 속도도 전 세계 평균의 2배 정도로 빠릅니다. 세계변호사협회에 따르면 2050년까지 최소 2억명의 기후 난민이 지구촌을 떠돌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세계 각국은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 수준을 올리고 있습니다. G7(주요 7개국) 정상들은 독일에서 정상회의를 갖고 글로벌 탄소 배출량을 2050 년까지 현재의 40∼70% 수준까지 줄이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기후변화가 아니라 저출산과 고령화로 “지구에서 제일 먼저 사라질 나라”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왜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을까요? 첫째는, 우리나라에 저출산 위기를 악용하는 저출산 유도 세력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저출산 위기가 찾아 온 것은 그동안 좌파 정부의 급진 페미니즘 정책에 의해서 초래된 사회현상입니다. 급진 페미니즘은 ‘남성, 결혼, 가정, 출산, 육아’를 혐오하는 사상입니다. 대신에 ‘프리 섹스, 낙태, 레즈비언으로 살기’를 주장합니다. 이들은 가족제도가 여성 억압의 원인이라고 보기에 전통적인 가족을 해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가족제도를 약화시키고 소멸시키는 ‘다양한 가족 형태’를 주장합니다. 즉, 저출산 원인 제공자의 가족 폐지 전술이 저출산 극복대책으로 선전되고 있는 꼴입니다. 페미니즘의 아버지라 불리는 ‘에릭 프롬’은 사회주의자인 프랑크푸르트학파입니다. 급진 페미니즘의 선두주자인 여성들도 대개 마르크스주의자나 사회주의자였습니다. 냉전시대에 서구에서 공산주의를 말하기 어려웠고, 프랑크푸루트 학파는 미래 소련과의 만남을 기다리며 그동안 서구 국가들은 약화시키는 전술을 고안했습니다. 그것을 ‘권리(인권)’라며 학생들에게 신념화시키고 행동하게 합니다. 학교 교육이 대량 복제의 장소였습니다. 68운동이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폭력 운동(폭력 시위, 테러, 도시 게릴라)뿐 아니라 문화 운동(전통적 사회를 해체하고 새로운 사회 만들기)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즉, 여기에서 나온 성 해방이나 급진 페미니즘, 낙태, 전통 가치와 제도의 해체 등은 망국의 전술이라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체제를 전복하려 하던 사회주의자, 친북 공산주의자 68운동은 훌륭한 전술지침이 되었습니다. 3당 합당으로 우파 정당마저 그들과 혼합되면서 한국은 그것에 대한 대응세력이 점차 쫓겨나면서 현재의 상황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저출산 국가소멸론까지 나온 겁니다. 저출산 극복의 해법을 그들이 배운 ‘다양한 가족 형태 전술’에서 찾는다면 이런 바보가 없을 겁니다. 저출산위원회를 만들어 놓고 페미니스트들이 주도하게 한 결과 수백조 원의 돈을 써도 효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페미니스트들의 진지 구축 비용이였던 것입니다. ‘서울 경제’의 기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프랑스가 1999년 도입한 ‘팍스(PACS)’는 결혼이 아닌 생활동반자 관계를 법적으로 보장하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프랑스의 비혼 출산율은 1998년 41.7%에서 2012년 56.7%로 증가했고, 2020년에는 62.2%를 기록했습니다. 현재 팍스 제도를 통해 결합한 관계의 90% 이상이 이성 간 결합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 위 기사에서 1999년 시민연대계약(팍스)이 도입되기 전에 이미 혼외 출산율이 41.7%였다는 점이 포인트입니다. 왜 혼외출산율이 높아져서 사회적 문제를 만들어 냈는가에 원인파악을 해야 하는 것이죠. 급진 페미니즘의 제도화로 이혼시 남성들은 재산분할과 양육비 지급 등으로 부담이 증가했고, 그래서 혼인을 거부하였고, 동거상태로 지냈습니다. 부부의 의무를 배격하는 페미니즘과 성해방 사상의 확산도 평생을 함께 한다는 부부, ‘가족이란 운명적이다’는 믿음을 잃게 했고, 만나다가 질리면 부담없이 헤어질 관계로 남녀관계를 생각하게 되면서 재산분할, 양육비 부담을 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 부담을 없게 하는 ‘팍스’라는 제도가 도입되자 남자들은 혼인을 줄이고 ‘팍스’를 선택하는 비율이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혼외 출산율이 더 높아진 것입니다. 급진 페미니즘은 이혼시 여자의 경제적 안정을 위해서 남자의 부담을 늘려왔는데, 혼외 출산율이 늘자 남자의 부담을 배제한 ‘팍스(생활동반자)’라는 제도를 만들어 호응을 받은 것입니다. 결국 페미니즘의 목적인 혼인제도 파괴에 어느 정도 성공한 셈입니다. 이것이 과연 좋은 결과였을까요? (2) 프랑스의 합계출산율은 1999년 1.79명에서 2010년 2.01명으로 뛰었으며, 2020년에도 1.83명을 기록했습니다. -> (2020.10.14.) 프랑스의 전폭적인 출산과 양육 지원 정책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국민들은 아이를 더 낳지 않았으나, 아프리칸 이민자들은 출산 지원 정책 덕분에 본국에서보다도 더 많은 아이를 낳았습니다. 이민자의 출산율은 3.3명이나 되며, 그래서 프랑스의 출산율이 상승한 것입니다. (3) 나영정 가족구성권연구소 연구위원은 “프랑스의 팍스도 이미 동거 커플이 많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도입됐으며 사회에 존재하고 있는 다양한 관계들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사회적인 현상을 규정하는 게 아니라 사회 현상에 맞춰서 정책을 수립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 기사의 통계에서 보이듯이 한국의 혼외 출산율은 2.5%입니다. 1980년도의 2% 내외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유럽은 90년대 혼외 출산율이 수십%가 되어서 ‘아이들을 위해 제도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한국은 아직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회현상이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60년대 사실혼 제도 도입으로 혼외관계에 대해서는 서구보다 일찍 보호를 제공해 왔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법제화는 위의 구차한 명분들 때문이 아니라 평생을 운명공동체로 간다는, 사회의 최소 구성단위인 가족이라는 전통적 가치를 파괴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급진 페미니즘의 아버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에릭 프롬은 가족을 국가의 축소판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공산주의는 국가의 해체를 주장하는데, 국가의 해체의 축소판이 가정의 해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급진 페미니즘(여성단체, 정당, 언론)을 통해 진행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급진 페미니즘이 초래한 저출산 위기를 극복한다는 해법으로 급진 페미니즘의 가족 제도 해체 전술인 ‘다양한 가족 형태’를 제시한다는 것은 사회와 국민들에 대한 조롱과 조소가 아니면 뭘까란 생각이 듭니다. 한국의 젊은 남성들은 위와 같은 국가 페니미즘을 학교에서부터 강요당하면서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한국의 우파 정당과 정권은 국가 페미니즘에 협조해 왔으며, 문제점이 무엇인지 인식도 안 되어 있었습니다. 우파의 주력인 어르신 우파들은 신마르크스주의의 각종 (인권) 전술을 배우지 못했기에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으며, 눈뜬 장님과 같이 문화적으로 사회주의화 되는 것에 당황만 해온 것입니다. 젊은 남성들과 연대를 할 수 있음에도 좌파의 역사를 모르기에 어르신 우파는 그 연결의 가능성조차 몰랐던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좌경화와 몰락을 막으려면 젊은 남성들이 국가에 대해 저주까지 하게 만드는 급진 페미니즘에 대해 우파 어르신들이 눈을 뜨고 연대의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둘째로, 이런 사상에 물들어 있는 당사자들의 현실 문제입니다. 왜 결혼을 하지 않을까요? 적령기 남녀 청년들이 결혼 안 하고도 경제적으로 혼자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남편에게 얹혀 살지 않아도 혼자 먹고 살 수 있고, 성적 욕구도 결혼 않고도 채울 수 있는 길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결혼하고도 왜 아이는 낳지 않을까요? ‘애 키우느라 자기 즐거움은 다 없어지고 애 키울 돈도 집도 없다’는 것이 이유라고 합니다. 애를 왜 하나만 낳느냐? 먹고 살려면 맞벌이해야 하는데 애 봐 줄 사람이 없다. 도우미를 쓰면 300만원까지 월급을 줘야 한다. 애 엄마가 돈 번다고 해도 도우미 월급 주면 아무것도 남는 것 없으니 차라리 직장을 그만 두고 애를 보는 겁니다. 지난 15년간 280조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하고도 현실로 나타난 합계 출산율 0.78명의 초저출산은 가히 재앙이기에 이대로 강 건너 불 구경 하듯이 바라보다가 500년 후인 2500년이면 우리나라는 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입니다. 약 25%의 젊은이가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했습니다. 4차산업혁명 시대를 맞이하여 젊은이들에게 더 줗은 일자리를 만들어 주는 일 그리고 여러가지 결혼방법을 설계해 새로운 길과 희망을 만들어 주는 일을 열심히 하다보면 안 보이던 답도 보이고 길도 보이는 것입니다. 셋째로, 저출산의 해결책은 없을까요? 결혼과 출산 문제의 해결은 인구와 경제가 연관되기 때문에 국가의 가장 큰 미래의 방향으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출산율이 늘어나려면 결혼해야 하는데, 결혼하고도 요즘 출산을 안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구가 늘어나기 위하여 나라에서 노력하고 있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부분이 많은데,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처녀와 총각, 노처녀와 노총각들의 ‘만남의 행사’를 주도하는 무료 중매 사단법인이나, 결혼공사를 지자체나 정부에서 만들어 운영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단법인이나 공사에서 남·여 만남의 단체 행사 시 약간의 정부 비용 보조를 하고, 결혼 비용도 1인당 5천만원씩 지원해 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결혼식과 혼수 문화는 단순하게 할 수 있게 정부 규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결혼하면 주택 전세 대출도 좋지만 필요시 10년 무상 임대아파트의 혜택을 주고, 결혼해 출산하면 25년 무상 임대아파트를 주는 제도를 만들고 임대아파트가 적은 도시는 결혼용 임대아파트는 기존 아파트 재건축이나 신규아파트 건설 시 주거지 용적률 250%를 500%로 상향해 주는 대신 추가로 주는 125%는 신혼 주택 임대용으로 주택 공사가 소유하고 추가 125% 용적률은 기존 주택자에게 주고 임대자가 타 지역으로 이사를 하더라도 기존 임대아파트나 주택 공사에서 남은 거주 기간 동안 임대 혜택을 주는 임대 아파트를 확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기업과 공사직에 기혼자에게 인사고과 +1점이라도 더 주고, 출산자에게는 인사고과에 +5점을 더 주고, 1명 자녀 이상 다자녀에 대하여 자녀 수에 따라 +1점 추가로 주며, 다자녀 부모일수록 부모 모두 직장에서 승진을 더 빨리하고, 미혼일수록 승진이 늦는 제도가 필요합니다. 다 출산자는 군대의 면제 제도 혜택과 급여와 연금도 다자녀 출산자에게 더 주는 제도가 필요합니다. 자녀 교육비가 부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둘째부터 대학 등록금 및 입학금을 장학제도를 실시하면 됩니다. 지난 5월 22일 TV조선 뉴스에서, ‘싱가포르의 가사도우미 월급 90만원 제도를 도입하자’는 국회의원 인터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최저임금 법대로 하면 ‘가사도우미 저임금으로 쓸 수 없다’며 이것이 문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필리핀, 미안마, 베트남, 등 동남아 국가에서 오는 가사도우미들은 말하기를 자기네 나라에서 일하는 것보다 서너배 더 받는 것이고 그들은 가족에게 돈 부치고 집도 사고 얼마나 좋은지 대환영이라고 합니다. 우리 엄마들도 좋고, 도우미들도 좋고, 윈윈 될 수 있어 문제 될 것 없다고 했습니다. 5월 23일자 중앙일보에 의하면 일본도 노동력 부족이 심각하다고 합니다. 일본 생산가능인구가 2022년 7400만명이고, 65세 이상 노인이 인구의 20%를 넘어 초고령사회가 되었습니다. 2019년에 이민청 격인 ‘출입국재류관리청’을 신설하고 적극적으로 외국사람을 받기로 하였습니다. 작년 일본 내 외국인 수가 300만명을 넘었습니다.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이 남한의 부족한 노동력을 채울 수 있을텐데. 남남북녀 결혼도 좋고. 남북통일되면 다 해결되겠지만 통일 전이라도 북한 동포들이 남한에 와서 일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나 결혼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올 수 있는 길을, 죽음을 무릅쓰고 탈북해 오는 길보다 합법적이고 민족 공영의 길을 위해 남북이 의논해 볼 수 없을까요? ‘출산절벽’이라는 말은 정말 가슴을 후벼 파는 슬픈 단어입니다. 아이들은 우리의 미래이고 희망입니다. 아이를 낳는 것은 미래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동안 초저출산 문제에 대해 백화점식으로 나열된 단기 처방에 치중하다 보니 280조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예산만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대한민국은 국회의원만 많았지 밥그릇 싸움하기에 바쁘고, 자기들을 위한 법만 잘 만들어 놓은 이상한 집단입니다. 제발 땜빵식 정책은 하지 말고, 지금이야말로 인구재앙을 대비할 마지막 ‘골든 타임’이라는 마음으로 초저출산 대책과 정책을 새롭게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이대로 계속 가다간 대한민국은 역사 속에서나 존재했던 나라가 될 것입니다. 이제 그 숙제를 함께 해결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 주요뉴스
    2023-05-30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