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3(금)
 

요즘 때아닌 ‘국군의 뿌리’에 대한 논쟁이 일어 났습니다. 육사 16기 출신이며, 김대중 정부때 국정원장을 했으며, 독립군 후손들의 모임인 현 광복회 회장인  이종찬 씨는 “육사의 뿌리는 신흥무관학교”라고 했으며, 또한 “독립군이 국군의 뿌리”라고 정신나간 소리를 했습니다. 이건 역사를 왜곡하다 못해 등나무처럼 밸밸 꼬는 식의 옳지 않는 언동을 하고 있습니다.


뿌리를 모르면 가만히 있기나 하든지, 과연 국군과 육사의 뿌리는 무엇일까요? 또한 국군의 날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국군의 날은 왜 10월 1일일까요?


현재 대한민국 국방부는 국군의 뿌리를 구한말 의병과 대한제국군, 한국광복군 이라고 보고 있으며, 이들을 정신적으로 계승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군 역사의 시작은 일제에서 해방된 1945년 8월 15일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광복 후 위탁 통치를 하게 된 미군정 당국은 남한이 당시 처한 상황을 따져 보았을 때 미군 병력만으로는 안보를 장담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1945년 11월 13일 미군정법령 제28호에 근거, 현 국방부의 모태가 된 최초의 우리나라 국방 조직 '국방사령부'를 발족하고, 그 예하에 군무국(군사국)과 경무국을 설치하였고, 군무국 내에는 육군부와 해군부를 두었으며, 초대 국방사령부장에는 미군정 헌병사령관인 쉬크(L. E. Schick) 중장이 1945년 11월 14일 취임하였습니다. 


또한 상기 군정 법령 28호에 의하여 국방사령부가 설치되면서 1946년 1월 15일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에서 '남조선 국방경비대'를 창설했는데, 이것이 대한민국 육군과 공군의 모체입니다. 


1946년 1월 21일 한국 내 모든 사설 군사단체는 미군정에 의해 불법화되고 해체되었습니다. 그뒤 국방사령부는 1946년 3월 29일 군정 법령 제64호에 의해 국방부로 개칭되었습니다. 1946년 6월 15일에 ‘조선경비대’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이름의 ‘경비대’는 ‘Guard Unit’가 아닌 ‘경찰경비대’를 뜻하는데, 미군정 당국은 당초 ‘국방경비대’의 명칭을 ‘조선경찰예비대’로 하였으나, 우리나라측에서 ‘남조선경비대’라고 불렀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1948년 9월 1일 대한민국 '육군'으로 편입되고, 9월 5일 대한민국 육군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11월 30일 ‘국군조직법’에 의하여 정식으로 대한민국 국군으로 편입되었습니다. 


국군준비대처럼 독립 직후 한반도에는 훗날 정규 국군이 되기 위해 준비중이던 무장집단이 많았습니다. 그 구성도 일본군이나 관동군 출신, 팔로군, 국부군, 광복군, 만주군 등 출신 성분이 다양했습니다. 1945년 11월경에는 군사 단체가 60개가 넘을 정도였습니다. 미 군정은 이들이 상황을 어지럽힌다 판단하여 훗날 대한민국 해군이 될 ‘해방병단’을 제외한 모든 사설 무장단체들을 해체시켰습니다. 


1945년 11월 11일 손원일 제독과 윤치창이 함께 설립한 해사대(海事隊)와 석은태 대표가 단장으로 있던 ‘조선해사보국단’을 합친 ‘조선해사협회’의 건의에 따라 미군정 당국이 상선사관들과 초대 해군 참모인 손원일을 중심으로 ‘해방병단’을 조직하였으며, 이를 모체로 1946년 6월 15일 ‘군정법령’ 제28호에 의하여 해안 및 도서 순찰을 실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선해안경비대가 창설되었습니다. 조선해안경비대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직후인 1948년 9월 1일 국군으로 편입되었고, 9월 5일 대한민국 해군으로 개칭되었으며, 11월 30일 ‘국군조직법’에 의해 정식으로 대한민국 해군으로 편입되었습니다.


공군은 육군에 속해 있던 '육군항공사령부'가 그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육군항공사령부는 대통령령 제254호인 '공군본부 직제'에 따라 1949년 10월 1일에 육군으로부터 독립하여 대한민국 공군으로 창설되었습니다. 이로써 국군은 육∙해∙공군의 3군 체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국군은 1945년 11월 11일에 창설된 해군의 뿌리가 되는 해방병단(海防兵團)과 1946년 1월 15일에 창설된 조선국방경비대로 시작되었습니다. 해군의 기원인 해방병단은 민간상선사관 출신들이 모인 곳이었고, 육군의 기원인 조선국방경비대는 만주군, 일본군, 중국군, 독립군 등 당시 한국인들이 종군했던 군사조직 및 무장단체 출신들이 모인 곳이었습니다. 공군은 1949년 10월 1일 육군으로부터 분리 독립한 날을 창설일로 정해 기념했습니다.


이후 육·해·공군의 단결과 국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한국 전쟁 당시 동부 전선에서 육군 제3사단이 선봉으로 38선을 돌파한 1950년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지정하여 기리고 있습니다. 


미군정 초대 국방사령관이었던 미 육군 중장 L.E. 쉬크 장군의 지시로 통역관 및 군 간부요원 확보를 위해 오늘날 육군사관학교의 모체인 ‘군사영어학교(軍事英語學校, Military La ngu age School)’가 1945년 12월 5일 개교하였습니다. 


초대 교장은 그린 육군 중령이었으나, 개교 후 5개월 사이에 4번이나 교장이 바뀌면서 실질적인 학교 운영자는 법무장교인 리스 소령과 부교장은 원용덕 참령(소령)이었습니다. 초창기에는 감리교신학대학교(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냉천동) 건물을 활용하다가 1946년 2월 27일엔 태릉으로 옮겼습니다. 


이 군사영어학교의 설치 목적 자체가 통역관을 양성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일본군, 만주군, 중국군 출신 장교 및 준사관 중에서 중등학교 이상을 졸업하고 영어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구비한 자로 제한했습니다. 주로 군사영어(Military English)와 한국사, 참모학, 화기훈련, 자동차 교육 등이 실시됐습니다. 웨스트포인트의 교육방식을 따랐으며 사관생도들에겐 통역관에 준하는 급료가 지불되었고, 일정한 교육을 거친 뒤에 졸업한 이들은 소위로 임관되었으며, 영관급 장교나 장군이 없던 당시 한국군의 특성상 빠르게 진급했습니다. 그러나 ‘군사영어학교’로는 당장 필요한 장교 수요를 충족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1946년 4월 30일 군사영어학교를 폐교될 때까지 110명이 졸업했습니다. 


그 다음 날인 1946년 5월 1일 정규의 간부양성기관인 남조선 국방경비사관학교(南朝鮮 國防警備士官學校)를 개교하여 당시 남아있던 학생들을 1기생으로 전입시켜서 간부 양성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1946년 6월 14일에는 ‘조선경비사관학교’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정부 수립 후인 1948년 9월 5일 ‘육군사관학교’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때까지 1-6기에 걸쳐 총 1254명의 군 간부를 배출하였습니다. 1951년 10월 30일 밴 플리트 장군의 도움으로 경남 진해에서 육군 본부 직할의 4년제 육군사관학교로 재창설된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갑자기 육사 16기 출신 이종찬이 “육사의 뿌리는 신흥무관학교”이며, 또 “국군의 뿌리가 독립군”이라는 정신나간 소리를 하자 육사 총동창회에서 그를 성토하고 나섰습니다. 그는 김대중 정권하에서 초대 안기부장까지 지냈고, 요즘 러시아 공산당원 출신 홍명도의 흉상 이전 문제를 일으켜 부자가 합세해 윤석열 정부를 공격하고 나섰습니다.


이건 역사를 왜곡하다 못해 등나무처럼 밸밸 꼬는 식의 옳지 않는 언동을 하고 있습니다. 뿌리를 모르면 가만히 있기나 하든지, 먼저 말한 것처럼 육사의 뿌리를 따진다면 1945년 12월 미군정이 서대문 냉천동 감리교회 자리에 세운 ‘군사영어학교’가 될 것입니다. 


해방된 한국의 치안을 담당할 자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미군정에서 과거에 군경력을 가진 일본군, 만주군, 중국군 출신을 대상으로 공모를 통해 일정한 교육을 시켜서 장교로 임관을 시켰습니다. 


그때 배출된 사람들이 군번 1번을 받은 이형근 대위로부터 마지막 군번 110번을 받은 이응준 대령 등 총 110명이었습니다. 그 당시는 해방이 되면서 마지막으로 달고 있던 계급을 인정해 주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소위, 어떤 사람은 대위, 중령, 이런 식으로 임관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1월 15일에 최초로 국군 1연대가 지금 육사가 있는 태릉에서 창설되었으며, 5월 1일에는 육사의 전신인 "국방경비사관학교"가 역시 태릉에서 창설되었습니다.


그때 1기생으로 서종철, 김점곤 등이 입교를 하여 임관하였습니다. 그러다 전쟁통에 10기까지만 가까스로 임관을 시키고, 중단되었다가 1951년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의 도움으로 진해에 4년제 정규 육사가 문을 열게 된 것입니다. 그때 전두환, 노태우 등이 11기 생도로 입교하였습니다. 

그런데 무슨 신흥무관학교가 육사의 뿌리라고? 모르면 말이나 하지 않으면 밉지나 않고, 치매 걸린 노망난 늙은이 취급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또 국군의 뿌리가 왜 광복군입니까? 오늘의 육사는 분명히 미국 육사의 커리큘럼을 그대로 복사해 온 것이나 다름없다. 


창설 당시에 밴플리트 장군의 처남이 육군 중령으로 미 육사에 근무하고 있어서 어렵게 생도들의 학과 프로그램을 보내주어서 웨스트포인트와 유사하게 교육을 시켰으며, 병사들의 훈련도 미군정 시대에는 미군 교관들이 시켰습니다. 


그리고 전투하는 방식도 미군 전투 교범에 있는 원칙과 준칙을 적용했기 때문에 국군의 뿌리가 광복군이니, 독립군이니 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특히 이종찬 씨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세운 "신흥무관학교"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서운해 하는 모양이지만, 러시아 공산당원으로 독립군들을 살해한 홍명도를 어떤 이유에서 인지 자기 조부와 같이 독립유공자 반열에 올려 예우를 받게 하고 싶겠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인정을 하지, 누가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신흥무관학교가 육사의 뿌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며, 공산주의자 흉상이 육사 교정에 있게 할 수도 취지와 목적에도 부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종찬이란 자가 독립유공자인 이회영의 후손이고, 윤석열과 절친인 이철우 교수의 부친이라고 해서 느닷없이 광복회장 자리에 임영된 것도 말이 많고, 87세라는 고령의 나이에 그 자리를 고사했어야 했다는 여론이 지배적입니다.


公과 私는 분명히 가려야 합니다. 공도 아니고 사도 아니게 어정쩡한 태도로 방치하면 결국 우리 후손들이 고생을 하게 됩니다. 부자 모두가 불만을 품고 윤석열 정부의 국정운영에 반기를 들었다면 임명권자에게 더이상 부담을 주지 말고 광복회장직을 사퇴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서로 이념과 사상이 다른 사람들이 안 해도 될 싸움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단지 독립유공자의 후손이라고 그동안 수많은 혜택을 누렸으면 이젠 은퇴하고 여생을 누리고 더이상 윤석열 정부에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이 도리일 것입니다. 

앞 사람들이 잘못해 놓으니, 안 해도 될 싸움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강석종 뉴스워크 칼럼니스트 기자 newswalk@naver.com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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